소설리스트

나쁜 접점-13화 (13/76)

[13화]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죠?”

“네?”

“금방 올게요.”

어디 가냐는 물음을 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혜수의 발끝 아래로 이름 모를 흰 꽃이 툭툭 떨어졌다. 앞에 있던 남녀는 그 꽃들을 주워 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뭘까.

아주 잠깐 혼자가 됐을 뿐인데, 덜컥 외로워졌다. 무섭고, 거북스럽기까지 했다. 꽃이 발치에 떨어지는데도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빨리 그 남자가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생각을 알았는지 서준은 순식간에 돌아왔다. 손에는 생수와 이온 음료가 들려 있었다.

“좋아하는 쪽으로 마셔요.”

혜수가 이온 음료 쪽으로 손을 뻗자 서준이 뚜껑까지 따서 건넸다. 그러곤 혜수의 목에 묶여 있던 스카프를 풀어서 생수로 적셨다.

“잠깐 실례할게요.”

차갑게 적신 파란 스카프가 다시 목에 닿자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지만, 그는 놓치지 않았다.

“자국이 꽤 선명한데, 목 안쪽은 안 아파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분명 감사했지만, 완벽한 타이밍과 배려에 놀란 게 먼저였다. 갈증과 따끔거리는 통증도, 거짓말조차도 이 남자에겐 모두 들켜 버렸다.

“왜요? 맛없어요?”

“그게 아니라……. 아니, 아녜요.”

“자꾸 그렇게 쳐다볼 거예요?”

“네?”

서준은 답하지 않고 남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에 흐른 물이 턱과 목울대를 지나 흘렀다. 탄탄한 몸이 드러날 정도로 딱 붙는 셔츠가 조금 젖었다. 단추 두어 개를 풀고 있어서 하얀색 셔츠 사이의 틈이 슬쩍 보였다.

젖어서 점점 선명해지는 뼈대와 근육, 탄탄하고 매끄러운 피부 위로 그려지는 것들이 입안을 마르게 했다. 꿈 때문이었다.

혹시 그 얼굴을 들키진 않을까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음료를 들이켰다. 홧홧해진 얼굴과 귓가를 식혀 보려 연신 손부채질만 했다. 좀처럼 식지 않았다.

관광지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가 지냈다는 작은 미술관과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에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인공적으로 밝아진 실내에 땀과 피 묻은 몸이 그제야 신경 쓰였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화장실 역시 독특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런 감상도 잠시, 거울 속의 제 얼굴을 그제야 확인한 혜수가 경악했다.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산발된 머리, 번진 화장, 너덜거리는 팔꿈치까지.

“못 봐 주겠네, 진짜.”

손을 닦는 페이퍼 타월에 물을 묻혀 화장을 대충 지워 냈다. 찬물로 씻고, 선크림을 덧발랐다.

그가 물을 묻혀 목에 매 준 스카프도 다시 풀었다. 대머리의 손자국이 여전히 무식하게 남아 있었다. 눈앞이 잠깐 깜깜해질 정도였다. 서준이 없었으면 정말 그대로 허무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아.”

제대로 민폐만 끼친 기분이었다. 목숨 한번 구해 줬다고 떵떵거린 게 부끄러웠다. 자기혐오를 마치고, 젖은 손을 털어 내며 나가자 서준이 화장실 바로 앞에 있었다.

“기, 기다렸어요?”

“……불안해서.”

그의 머리와 얼굴도 조금씩 젖어 있었다. 사이좋게 젖은 앞머리를 한 두 사람은 같은 보폭으로 나란히 걸었다.

미술관 안엔 패션 디자이너가 만든 옷들과 가방이 매장처럼 전시되어 있었고, 그림도 많았다. 아크릴 물감처럼 보였는데 온통 ‘LOVE’라는 글자로 가득했다. 어느 그림에든 사랑이, 들어차 있었다.

“사랑이 참…… 많네요.”

“네, 그러네요.”

언뜻 성의 없는 대답 같았지만, 그림을 보는 눈이 꽤 진지했다.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작게 웃어 버렸다.

“왜요?”

“아니, 서준 씨랑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새삼 어이가 없잖아요. 아직 우리, 서로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일이 많기도 했고. 다 꿈같아요.”

“괜찮아요?”

때를 놓친 것 같은 걱정이 일었다. 그에겐 있음직한 일들이었으나 이 여자에겐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사건이었다. 혜수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요. 어제 사막에서부터 그랬어요.”

“사막?”

“네, 어제 다녀왔어요. 내가 보낸 사진 봤죠? 누가 낯선 곳에 있다 보면 답이 보인다고 부추겨 주는 바람에 좋은 경험 했어요. 답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막까지 갈 줄은 몰랐네요. 무서웠을 텐데.”

내리까는 시선에 약간 떨리는 속눈썹. 괜찮다는 말이 나올 붉은 입술과 굳어 버리는 오른쪽 볼. 서준은 손등으로 거짓말할 때마다 티가 나는 그곳을 슬쩍 쓸어내렸다.

“또 거짓말하지 말고.”

남자의 손등이 살짝 닿았던 볼을 만지며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일찍이 들켜 버려 혜수는 당황했다.

“그냥, 조금요.”

“난 작가님 다칠까 봐 좀 무서웠어요.”

“아,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허공에서 일찌감치 맞닿은 시선이 뜨겁게 타올랐다.

“내가 또 빨랐나 보네요.”

서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멀어지자 혜수가 널찍한 등을 쫓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위험한 상황을 겪고 난 이후라 그런 걸까. 초조해졌다. 좀 빨라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근데 아까부터 여기서 좋은 향기 나는 것 같지 않아요?”

“이 브랜드에서 나오는 향수래요.”

“아, 좋다.”

직설적인 언어가 살짝 초점을 바꾸어 그에게 닿았다. 마치 여자를 만나는 게 처음인 것처럼 과하게 의식했다. 서준은 자칫 실수라도 저지를까 다른 주제로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작가님은 왜 흑백으로 그렸어요?”

“처음엔 색을 썼는데, 쓰면 쓸수록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렇게 됐어요. 무채색으로 질감을 표현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서준이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여러 방식과 모양으로 들어찬 사랑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혜수를 그저 묵묵히 쳐다봤다. 자신이 사 준 파란색 스카프를 목에 매고 있는 여자를 볼 때마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자꾸만 눈이 갔다.

혜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따금 느껴지는 그 정염 가득한 시선과 낮은 목소리에 몸 안쪽이 간지러웠다.

미술관을 나온 후에는 정원으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아치형의 문을 몇 개나 지나서 마침내 들어선 정원은 다른 세상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키 큰 코코넛과 올리브나무, 향이 진한 오렌지나무까지.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동양에나 있을 법한 대나무가 하늘 높이까지 서 있었다.

말 그대로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았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보폭을 맞춘 걸음으로 마음껏 길을 잃었다.

크고 작은 선인장, 화려한 색의 꽃들을 지나 중간까지 들어가자 물이 흐르는 푸른색의 분수가 나타났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너무 예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프고, 아름다운 푸른색에 무의식적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혜수는 그 파란색을 흡수하는 것처럼 오래도록 만지고, 눈에 담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있는 정원이었지만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다.

마지막 그림이 사라지고, 총으로 위협당하고, 바로 옆에서 폭탄까지 터졌던 조금 전의 현실을 망각하기에 충분했다.

“문 하나 지났을 뿐인데 여기만 꼭 다른 나라 같아요.”

“작가님.”

부름에 앞서가던 혜수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 바람에 뒤따라오던 서준이 등 뒤로 바짝 붙어 버렸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커다란 몸의 선이 그대로 등에 닿아 슬쩍 고개를 돌리고 올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네.”

짧은 대답과 달리 시선은 서로에게 진득하게, 오랫동안 머물렀다. 주변은 어두워지고 있는데 둘 사이의 열기는 점점 더 강해졌다.

눈을 피하지 않는 바람에 당황한 혜수가 한 걸음 멀어지려 하자, 서준은 가까이 다가가 작은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마라케시를 방문하기 전엔 모든 것이 검은색이었다. 이 도시는 나에게 색을 알려 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 저기서 보니까 여기 살았던 예술가가 그런 말을 했대요. 작가님도 어울리는 색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그의 말에 혜수의 안에 내재된 파란색이 조금 더 진해졌다. 먼저 앞서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따라갔다.

꿈같은 풍경 안의 완벽한 피사체를 보고, 사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이 툭툭 튀어 올랐다. 그리고 싶었다. 그려 내고 싶었다.

불붙은 욕구는 지금 이 남자에게 느끼는 것과 중첩된 것일까. 사랑이나 연애에 대한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됐음에도 설렜다. 먹고살기 바쁘고 힘들어서 그런 여유조차 나지 않았다. 조금만 평온하면 이는 죄책감 역시 한몫했다.

그래서였을까. 감정이 배제된 만남과 사람은 늘 하나같이 덧없고, 허무했다.

그러니 이 남자를 보면서 느껴지는 몸의 미열과 목마름, 간지러움 같은 것들은 다 한때라고 다시 강하게 부정해 본다.

서준이 지나치게 매력적인 것도 있었지만, ‘먼 이국땅에서 만난 타인’이라는 타이틀만으로 설레기에 충분했다. 혹은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 더 끌리는 건지도 모른다.

꿈까지 꿀 정도로 호감을 느끼는 일에 갖은 핑계를 가져다 대고 밀어냈다. 뭐가 됐든 하루의 가벼운 이야기로 끝날 것이다. 모두 차갑고 허무하게 사라질 거라고.

아까보다 서늘해진 날씨에 혜수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안았다. 아주 짧은 찰나였는데도 서준은 곧바로 챙겨 왔던 재킷을 아까처럼 걸쳐 주었다.

“저 괜찮아요.”

“예의상 거절한 거라면 그냥 입어요.”

지긋이 내려다보는 눈엔 이상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깨에 닿은 재킷에서 아까 맡았던 그의 향기가 진하게 났다.

“서준 씨.”

“네.”

“……아무것도 아녜요.”

재킷의 목 부근을 꼭 붙들었다.

잘못했다간 괜히 이상한 말을 해 버릴 것 같았다.

허무하게 끝난 말에 서준이 피식거리며 다가왔다. 귀와 목 부근에 손을 올리고 코끝이 닿기 직전까지 고개를 숙였다.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시선을 깔며 눈을 피하고, 망설이는 혜수와 달리 서준은 또 속삭이며 귓가를 간지럽혔다. 혜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애써 부정하던 심장이 요란하게 쿵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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