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분명 봤어요! 거기 있던 걸 하얀색 승합차에 싣고, 떠났어요. 그 후에 바로 폭발했어요. 라브리카인……. 남동쪽 3.5마일 떨어진 지점. 발음이나 스펠링은 정확하지 않지만 분명 세컨드 하우스라고 말했어요.”
혜수의 말을 들은 서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일부러 엉망으로 만들었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이상했다. 사라진 그림들과 엘리스,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놈은 단순 경호원도 아니었다. 오히려 범죄자에 가까운 면상이었다.
“일단 하얀색 차라도 찾아봐.”
― 봤죠, 봤는데…… 엘리스 법인 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차량이에요.
요한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혜수가 물었다.
“엘리스가 누군데요?”
“알면 당신이 뭘 할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날카롭게 대치하자 요한이 끼어들었다.
― 지금 두 사람이 거기서 싸운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요. 일단 피해요.
서준은 다시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마주했다. 아까와 다르게 부드럽게 또 천천히 말하려고 노력했다.
“여기 있다가 분위기가 잠잠해지면 호텔로 돌아가요. 주최 측이나 미술관 쪽이랑 연락이 닿으면 곧바로 출국해요. 만약 그게 안 되면 경찰이나 대사관 쪽에라도…….”
“그런 건 나도 알아요! 하아……. 이해 안 될 거라는 거 알아요. 미친년 같겠지만, 나한텐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작은 거라도 좋으니까 알려 줘요. 난 지금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초조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피가 흐르는 팔을 본 서준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혜수의 어깨 위에 올려 주었다. 안에 착용하고 있던 엑스 반도를 풀어 버리고, 넥타이와 단추 몇 개를 풀어 헤치는 게 삽시간이었다.
“그림 꼭 찾아 줄게요. 그러니까 일단 나한테 맡기고 기다려요.”
상인들과 관광객들, 폭발에 놀란 사람들과 관계자들까지 일제히 몰려 있는 광장에 그 여자를 두고 애써 돌아섰다.
이미 몇 번의 테러를 경험한 나라였다. 어디든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지만 적어도 엘리스가 있는 곳보다는 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광장 끝의 택시 승강장엔 요한이 혹시 몰라 준비해 둔 차량이 있었다. 장소와 걸맞게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흰색의 시로코(Scirocco_V사의 전륜 구동 쿠페 차량.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라는 의미)였다.
“요한, 엘리스 위치 확인되는 대로 알려 줘. 그리고 나랑 접촉했던 대머리 남자 신원도 확인해 봐. 스패니시(Spanish) 같았어.”
형체 없던 불안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한이 경악하는 소리가 다 끝나기 전에 리시버를 끄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엔진에서 약간의 소음이 들렸고, 차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려는 순간, 조수석 차 문이 벌컥 열렸다.
혜수가 당당하게 차에 올라서 벨트까지 야무지게 매고 앉아 버렸다. 당당한 행세에 어이가 없어 웃었다.
“작가님, 진짜 말 안 듣는다.”
“옷 돌려드리려고 온 거예요. 그리고 아까 그 대머리가 괜히 나를 쫓아오면 어떡해요?! 무서워서 그래요.”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어깨 위에 올려 줬던 재킷을 그에게 건넸다. 서준은 그걸 뒷좌석에 무심하게 던져 버리며 비아냥거렸다.
“핑계도 잘 만들어 왔고.”
“억지 부려서 미안해요. 저도…… 지금 제가 너무 이상하거든요? 근데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릴 순 없어요.”
간절함에 한숨이 나왔다. 한심하거나, 답답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위험하다고 했잖아.”
“여기 있어도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잖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절대 방해 안 될게요. 싸움은 못해도 달리기는 빨라요.”
결심한 듯 머리를 질끈 묶어 올렸다. 먼지 묻은 얼굴이 오후 햇살에 반짝였다. 맑고 곧은 시선이 그를 관통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출발했다.
요한이 전송해 준 위치와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비교해 가며 빠른 속도로 밟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미술관에서 일어난 폭발과 광장에서의 소란함은 꿈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평화로운 광경이 나타났다.
말은 없었지만, 혜수는 바깥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예쁘장한 옆얼굴과 평화로운 광경을 곁눈질하며 아무 목적이나 이유 없이 여행을 온 거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보닛에서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흰 연기가 조금씩 올라오더니 금방 앞 유리창을 가려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서준은 급하게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보닛을 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혜수가 따라 내렸다.
“고장 난 거예요?”
“냉각수가 없는 것 같아요.”
방해될까 바로 옆의 보도블록 위로 올라서긴 했지만, 멀리 가진 않았다.
서준은 차도 능숙하게 만졌다. 연기를 손으로 치워 가며 급한 대로 바닥난 냉각수 대신 물을 채워 넣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가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한 영어로 무전이나 통화를 하는 걸 들어 보면 꽤 전문직인 것 같았다. 거기다 총까지. 위험한 일임이 확실한데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조금 지나자 연기는 사그라졌지만,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엔진에 무리가 간 상태였던 것 같았다.
시커멓게 마른 손을 털어 내며 옆에 서 있던 혜수를 쳐다봤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데려가지 않아도 될 핑계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차에 있던 리시버와 휴대폰을 작동시켰지만, 그것마저도 먹통이었다.
“혹시 지금 휴대폰 돼요?”
그의 물음에 혜수가 옆으로 메고 있던 작은 가방 안을 뒤졌다.
“먹통이네요.”
아무래도 통신 자체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좋은 뜻은 아니었다. 통신 기능을 망가뜨리는 건, 종교를 앞세운 극단주의자들의 방식이었다.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테러를 겪은 나라였다.
“데려와 놓고 미안한 말이지만, 차가 고장 났어요. 처음부터 엔진에 이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 휴대폰도 통신 기기들도 말을 안 들어요.”
“뭘요. 제가 멋대로 쫓아온 거잖아요.”
“일단…… 먼저 돌아갈래요? 아직 택시는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서준 씨는요?”
“난 여기서 일몰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깐 망설이던 혜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제가 여기 있는 게 많이 불편해요?”
그는 팔짱을 끼더니, 차에 몸을 기대며 거들먹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팔뚝까지 걷어 올린 셔츠가 검게 얼룩져 있었다.
“불편했으면 벌써 길가에 버렸겠죠.”
두 사람은 그제야 다시 웃었다.
“그럼 우리 잠깐 걸을까요?”
“네?”
“어차피 연락 수단도 찾아야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요.”
황당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먼저 씩씩하게 앞서가는 혜수의 뒤를 그가 쫓았다. 차에까지 올라타 따라올 정도로 절박하게 굴더니 차선책을 선택했다. 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던 표정도 금세 밝아졌다.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그린 마지막 그림을 잃어버리는 건 어떤 감정일까. 쉽게 동정하기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괜찮은 척하는 걸지도.
둘은 목적지를 두지 않고 걸었다.
10분 정도 빠르게 달려왔으니 같은 마라케시 안이겠지만, 붉은 광장이 있던 곳과는 확연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인도는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으나 도로는 오히려 도심의 중심가보다 훨씬 깔끔하게 닦여 있었다.
간헐적으로 심긴 크고, 작은 가로수를 말없이 따라 걷다 보니 관광지 같은 곳이 나왔다.
흰 담벼락 아래로 수증기가 나오는 하얀색 파라솔이 길게 늘어선 건 관광객들의 더위를 덜어 주기 위한 이색적인 모습이었지만, 그에 비해 낙후된 도심의 풍경은 두 사람의 상황과 관계처럼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저기 가 볼까요?”
***
“여기가 어딘지 감이 안 오지만, 유명한가 봐요.”
“그러네요.”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전쟁터 같았던 광장의 사람들과는 표정조차 확연히 달랐다. 아비규환이었던 상황이 오히려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둘은 그저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것처럼 차례를 기다렸다. 비록 옷도 찢어지고, 피도 좀 흐르긴 했지만, 평범한 관광객처럼. 물론 이상하단 시선을 몇 번 받긴 했다.
이따금 먹통이 된 휴대폰을 하늘로 이리저리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안한 말도 들려오긴 했지만, 무작정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폭발이 난 건 미술관인데 왜 통신 장애가 생긴 걸까요?”
“글쎄요. 갑자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이용하려니까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아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일부러 다른 가능성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일상에서 도망쳐 온 사람에게 알려 불안함을 조성하고 싶진 않았다.
“무서워요?”
“덕분에 든든해요. 혼자 있었으면 무서웠을 거예요.”
“……아까 그 난리를 피운 것치곤 씩씩하네요.”
“우울해 봐야 달라지는 거 없잖아요.”
성의가 듬뿍 담긴 대답과 예쁜 미소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는 사이 무엣진(Muezzin_기도하는 시간을 알려 주는 사람)의 아잔(Adhan_이슬람 예배의 시각을 알리는 소리)이 들려왔다. 오후의 기도 시간 아스르(Asr_오후 예배, 작중 배경은 10월 말로 15시를 조금 넘긴 시각)였다.
길거리에 있던 현지인들이 같은 곳을 향해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자 같이 줄 서 있던 관광객들도 똑같이 따라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도를 하네요.”
“이런 상황이니까.”
“서준 씨는 신이 있다고 믿어요?”
“……적어도 나한테 없다는 건 확실해요.”
“나랑 같네요.”
두 사람만이 배제된 기도가 끝났다.
줄이 짧아질수록 졸졸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가까워졌고, 목이 말랐다. 혜수는 더위에 늘어졌던 머리를 잡아 올리고 다시 묶었지만,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연신 손부채질 했다.
혜수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서준도 열이 오르긴 마찬가지였다. 날씨도 날씨였지만, 햇빛에 빨갛게 익은 볼과 손부채질 때문에 코끝에 닿는 체취, 하얗고 작은 손등 같은 것들이 그의 몸을 덥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