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2. 테러
한편 사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혜수는 서준이 있던 곳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팔과 허벅지를 가리는 하얀색 원피스에 그가 준 파란색 스카프를 목에 맨 차림은 영락없는 여행객 같았다.
엊그제 미처 다 둘러보지 못한 미술관 안을 헤맸다.
구태여 다시 올 필요 없었지만, 미술관에 걸린 제 그림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 설렜다. 거기다 서준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역시 내포되어 있었다.
밤하늘 사진을 보고 걱정이라도 한 건지 무슨 일 있냐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오늘 새벽에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야 확인했다.
늦은 답장에 화라도 난 건지 아니면 아쉽다는 말은 겉치레였는지. 뭔지 몰라도 서준에게선 여태 대답이 없다.
‘강서준.’
낯선 남자의 이름을 발음하는 게 묘하게 친근하고 편한 이유는 호감 탓일까. 모쪼록 기회가 된다면 그의 말처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밥도 한 번 더 먹고, 술도 한잔했으면 했다. 사막에서 본 풍경과 경험을 얘기해 주고 싶었다. 다시 생각해도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나누고 싶었다.
물이 졸졸 흐르는 중정을 지나 어제 그와 서 있던 가죽 전시관에까지 도착했다. 생각난 김에 휴대폰을 재차 확인했지만, 여전히 메시지는 읽지 않음 표시가 붙어 있었다.
“……바쁜가?”
어제와 달리 화장까지 한 예쁘장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빠르게 손부채질 하다가 잠깐 주저앉았다. 무의식이 새벽에 본 꿈까지 이어진 탓이었다.
셔츠를 뚫고 보일 정도로 단단하고, 커다란 몸. 짧고,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과 긴 손가락. 존재감을 확연하게 드러내며 튀어나와 있는 손등의 힘줄과 푸른 혈관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낮은 목소리 등등.
“진짜 단단히 미쳤지, 이혜수.”
플랫 슈즈를 신은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첫날이 지나면, 조금이라도 전시의 질이 올라갈 거라고 기대했는데 첫날보다 더 어수선했다. 다시 보니 아마추어 작가들의 그림을 쌓아 놓은 동네 화랑보다 못한 것 같았다.
제 그림이 걸려 있는 C전시관에 도착했지만, 출입 금지 팻말이 걸려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고개를 비쭉 내밀고 안을 쳐다보려는 혜수를 제지했다.
“작업 중이라 출입 불가능합니다.”
그 찰나 혜수의 눈동자는 그 안을 샅샅이 빠르게 살폈다.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일렬로 서서 창문 밖으로 미술관에 있던 그림과 작품들을 내보내며 흰색 승합차에 옮기고 있었다.
심지어 제 그림도 있었다.
“내 그림…….”
모로코에서의 전시가 끝나면 스페인의 박물관으로 옮긴다고 들었지만, 그건 일주일 후였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혜수가 심각하단 얼굴로 움직일 줄 모르자 전시관 안에 있던 대머리의 남자 하나가 미간이 팰 정도로 찌푸리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직원 같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그가 혜수를 구석까지 밀고 들어가더니 대뜸 총을 꺼내 보였다. 쇳소리와 그 모양새엔 현실감이 없었다.
“넌 또 어느 쪽 떨거지야? 냄새 맡고 왔냐?”
떨거지로 오해받은 혜수가 들라고도 안 한 양손을 얼굴 옆으로 들어 올렸다.
바로 코앞에서 총을 본 건 처음이었지만, 그 차가운 느낌에 순식간에 목뒤로 소름이 돋았다.
예전 같으면 순순히 이마를 들이밀었을지도 모르지만, 사막을 다녀온 이혜수는 더는 죽음 앞에 의연하지 못했다.
언제 죽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던 여자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하루아침에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 우습게도 삶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다,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건 반칙 아닌가?”
이게 옳은 건지 모르지만 누군가 들어 주길 바라며 일단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시켰냐고!”
“알아서 뭐 하게?”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패기가 내심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영어를 쓰면 더 용감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와중에 도와줄 누군가를 찾는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 순간, 혜수의 어깨 옆으로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 끝에도 총이 들려 있었다.
“어디 소속인지 몰라도 일반인 대응을 이딴 식으로 하는 걸 보니 배운 게 없군. 뒈지기 싫으면 총 치워.”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준 씨!”
벽 반대편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남자가 이렇게까지 반가울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어깨를 잡은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연락 없더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근처에 사람들 있으니까 쏘진 못할 거예요. 자극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자극은 서준 씨가 하는 것 같은데요?”
둘이 속삭이는 꼴을 보던 대머리 남자가 들고 있던 총을 꺼떡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영어로 말해!!”
그의 말을 끝으로 바닥에 잔잔한 진동이 울렸다.
콰아앙!!
곧이어 뒤따르는 어마어마한 굉음은 분명 바로 옆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였다.
***
모건의 명령으로 서준이 맡은 출구는 대표 작품과 먼 곳이었기에 그다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았다. 그가 서 있는 동안 지나간 사람들은 총 쉰다섯 명. 수상한 기척은 없었다.
요한이 내부의 CCTV를 확인하며 감시하고 있지만, 지금 위치에서 엘리스의 행동을 모두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 일단 오늘은 모건이라는 남자랑 부딪쳤으니까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엘리스 쪽에서도 특별한 움직임은 없어요. 그나저나 그 사람, 데나로 어패럴 보안관으로 있었네요. 무슨 사이예요?
서준은 넋을 놓고 있다가 한참 후에 답했다.
“뭐라고 했어?”
― 모건이요.
“……프랩 스쿨(Preparatory school) 동기는 아니야.”
― 참 도움이 되는 대답이네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잠깐 다른 생각 했어.”
― 무슨 생각?
“자꾸 이상하게 초조하고 심장이 아파서 자가 진단 중.”
― 음? 바이탈엔 문제없는 것 같았는데.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공대생다운 대답에 서준이 그제야 웃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 감정적인 문제라면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 원한다면 제레마이라도 불러 줄게요.
“됐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무의식은 또 그 여자를 불러들였다.
웃으면서 할 말은 다 해도 떨리던 손끝, 얼마 먹지도 못하고 테이블 밑에서 연신 손을 주무르고, 미소 지으면서도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얼굴.
빠져나갈 틈도 없이 무너져 내린 현실 탓에 꼭꼭 숨어 있던 치기 어린 지난날의 감정이 아스팔트 사이에서 피어나는 싹처럼 살아나고 있었다.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본능은 혜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멀뚱멀뚱 서서 가만히 있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생각은 점점 꼬리의 꼬리를 물고 길어지기만 했다.
그렇다고 지금 적극적으로 나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서준을 알고 있는 모건도 위험해질지 모른다.
뻐근해진 목을 돌리는데 관광객으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빠져나왔다. 아이 둘을 포함한 가족이었다. 양쪽으로 부모의 손을 잡고 짓는 아이의 행복한 표정에 숨이 찼다.
남자아이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기에 어색하게나마 손을 들었다.
분명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곧 11월이었다.
어쩌면 파도처럼 연신 요동치는 감정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그때, 흰색 젤라바(djellabah_가운 형태의 모로코 전통 의상)를 입은 남자들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 서준의 앞을 지나갔다.
‘하나, 둘……, 셋.’
시차를 둔 세 사람이 복사해서 붙여 넣은 것처럼 지나갔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차이점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목뒤로 불안하고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불길함을 감지한 서준은 보급받은 가스총을 근처 화단에 던져 버리고, 제레마이가 준비해 준 글록으로 바꿨다.
“요한. 지금 나간 하얀색 전통복 입은 남자들 출입 시간 확인해 봐.”
― 왜요?
“이유는 묻지 말고. 그리고 오늘 입장한 사람 중에 어제 내가 만났던 한국인 있는지 확인해 줘. 관계자라 패스가 따로 있을 수도 있어.”
― 예압! 어어……. 준, 그 한국인, 조금 전에 미술관에 들어간 거로 확인돼요. 근데 CCTV가 좀 이상하네요? C구역, 이상해요.
요한의 말에 그는 망설임 없이 미술관으로 돌아갔다.
“제기랄.”
정확한 위치를 묻지도 않고 그저 감만 믿고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장소, 구석에서 대머리의 남자에게 총으로 협박을 당하며 서 있는 혜수가 보였다.
총을 파지하고 반대편으로 다가가 최대한 천천히, 조용히 다가갔다. 혜수의 어깨를 안자마자 움찔 튀어 올랐다. 그의 검지가 하얀 목 위를 타고 올랐다. 맥박을 확인하겠다는 명목으로 야릇하게 섰다.
“연락 없더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근처에 사람들 있으니까 쏘진 못할 거예요. 자극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자극은 서준 씨가 하는 것 같은데요?”
달래 주려는 말이 무색해지게 폭발음이 이어졌다.
서준이 혜수의 머리를 붙잡아 안고,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도 바로 근처에서 터진 게 분명했다.
삐이이…….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으윽.”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에 혜수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모래바람이 안개처럼 일어 시선을 가렸다.
“꺄아악! 테러다!”
“폭탄이야!!”
“도망쳐! 다 나가요!!”
크고, 작은 돌들이 떨어지는 먼지 속에서 관람객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지나갔다. 모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망쳤지만, 혜수는 휘청거리며 총을 들고 있던 대머리 남자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