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상한 꿈을 꿨다.
이불 안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더니 등 뒤로 두꺼운 체온이 느껴졌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잠에 취해 있는데 낯설고 커다란 손이 대범하게 혜수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하아.”
낮고, 애끓는 신음에 힘을 주며 밀어내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뱀처럼 몸을 휘감아 왔다.
힘줄이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혜수를 만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대의 흥분이 적나라케 등에 닿았고, 몸을 움직여 비비기까지 했다.
허리를 떼어 내며 도망가려 하자 대번에 혜수의 약점을 휘어잡았다. 목뒤로 닿는 뜨거운 숨에서 희미한 웃음이 느껴졌다. 아등바등거리는 작은 몸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 잠깐, 잠깐만요……!”
간절한 목소리에 그제야 떨어졌다. 이때다 싶어서 몸을 벌떡 일으키고 도망치려 하자 남자도 따라 일어나더니 서둘러 입술을 덮쳐 왔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동시에 꿈에서 깼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남자에게 설렌 건 사실이었고, 무턱대고 손을 뻗은 것도 모두 현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다고. 그저 잠깐의 인연일 거라고 치부하더니 혜수의 무의식은 성질 급하게도 저 먼 우주까지 다녀왔다.
“괜찮아요?”
같이 방을 쓴 일본인 여자아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깼죠?”
“어차피 일찍 일어나려고 했어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나가요.”
해가 뜨는 새벽, 사람들은 늦은 취침 시간이었음에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찍 일어나 모래 언덕 위로 올라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볼 만큼 봤다고 생각한 풍경은 시시각각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 줬다.
생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대지를 태양이 덮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혼자 이런 걸 봐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숨어 있던 죄책감과 부채 의식이 꾸물꾸물하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몸이 더 크게 반응했다.
찬 온도와 적당한 바람에 굳어 있던 세포가 움직였다. 손의 근육들이 연신 이상하게 튀는 게 느껴졌다.
고통이 아니었다. 열망하고 있었다.
다시 그리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살고 싶었다. 이 보잘것없는 편린 같은 삶을 이어 가고 싶었다.
여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마음이 터져 버려서 한참을 숨죽여 울어야 했다.
***
― 어제 미술관 안은 스캔 끝낸 상태고, 주요 지점 해킹까지 마쳤어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알려 주세요.
“확인.”
― 잠입할 땐 억양 신경 써 주시고, 가짜 라이선스 챙겼죠?
“어.”
― ……준?
“왜?”
― 뭐지, 왜 또 돌아왔지? 어제 그 묘하게 친절하고, 다정하던 준은 어디 갔습니까.
“걔 어제 죽었어.”
무뚝뚝한 말을 끝으로 통신을 끊었다.
아쉽다며 호텔 밖에 나와 있던 여자의 연락도 끊겼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엔 여전히 기대감이 어려 간지러웠다.
참지 않고 돌진하는 성격이라고 한들, 열렬히 들이댄 건 후회했다. 아무래도 연애를 너무 쉬었다고 되새겼다. 감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종일 연락을 기다렸지만, 이혜수는 ‘무응답’ 상태였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걸었지만 꺼져 있었고 밤에 메시지 하나만이 도착했다.
깜깜한 밤하늘 사진. 심지어 사진뿐인 무성의한 메시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까지 됐지만,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집착할 명분이 그에겐 모자랐다.
일이 우선이었다.
여전히 소음과 모래 먼지로 가득한 붉은색 광장을 지나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어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삭막하기만 하던 풍경에 이따금 그 여자가 튀어나온다는 것 정도.
“애새끼도 아니고…….”
틈만 나면 연락 없는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도대체 왜, 라는 자문을 수도 없이 씹어 대고 자기 비하를 뇌까려도 하얀 얼굴과 귀여운 보조개, 부드러운 머리칼 따위는 불쑥불쑥 나타났다. 몰래 무슨 약이라도 먹인 걸까 싶을 정도였다.
미술관에 도착해 준비된 대기실로 들어가자 미리 와 있는 경호원들이 호의 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준비를 시작했다. 보급된 무기를 점검하고, 엑스 반도까지 착용 후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답장 없는 휴대폰의 전원을 끄는 게 아쉬웠다.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떠올릴수록 초조했다. 당연히 잠도 못 잤다.
떼어질 생각이 없는 거스러미처럼 불편하고, 거슬렸다. 그의 고민이 다시 깊어지기 직전.
쿵!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2M는 돼 보이는 커다란 신장에 근육질인 몸, 짧은 블론드 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상대방 역시 서준을 보고 알아차렸는지 벽안이 시리게 빛났다. 순식간에 등 뒤로 긴장감이 흘렀다.
남자는 자신을 보안 부서 팀장이라 소개했고, 간단한 이슈를 확인한 후에 손가락으로 요원들을 찍으며 분담했다.
근접전선팀 ‘알파’에서 배제되고 남은 네 명은 각각의 출입구에 배정됐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백인이 아니었다.
기분이 더럽다는 얼굴을 한 네 사람이 일렬횡대로 섰고, 그 안에는 서준도 포함됐다.
“특이 사항 발생 시 즉시 보고하고, 되도록 엘리스한테 가까이 가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서준이 움직였다. 날이 선 두 남자의 시선이 지독하게 얽히며 불꽃을 일으켰다.
“모건.”
먼저 입을 연 건, 서준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분명 ‘톰’이라는 남자는 가라테에 능한 일본인이라고 들었는데……. 어제부터 있었나?”
모건은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가져다 놓은 작은 테이블에 궁둥이를 붙이고, 팔짱을 끼었다.
“허점투성이군.”
“경호 임무에 특별한 게 필요해? 그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 ‘특별’한 게 있나.”
두 남자가 웃는 얼굴로 치열하게 서로를 탐색했다.
“그건 알 바 없고. 퇴역한 번견이 인종 차별주의자한테 입양될 줄은 몰랐네. 뉴욕에서 진즉 ‘백마’만 데려왔어도 됐을 텐데, 굳이 여기까지 몰고 와서 따돌린다는 게 기분이 더러워. 아! 하긴 그 동네에선 이런 게 불법이었지.”
“진지하게 대답해. 당장 체포할 수 있는 상황이야.”
“안 될걸.”
뻔뻔하게 비웃는 얼굴에 모건이 미간을 주무르며 물러섰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엘리스가 알면 넌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
“너만 조용히 지나가면 위협되는 행동 할 생각 없어. 그러는 너는 엘리스가 많이 아끼나 봐.”
“그래. 친히 채용해 주신 것도 모자라 사막 산책에 데려와 주시는 거 보면 모르겠어? 나중에 아이들 등록금까지 책임져 주겠대. 그러는 우리 톰은 뭘 받기로 했나?”
모건은 한때 특수 부대에서 명망 있는 요원이었고, 제대 후에 서준과 같은 민간군사기업체에서 근무했다. 모건은 그중에서도 프리미엄이 붙는 인재 중 한 명으로 리더였다.
큰 사고 때문에 임시직으로 구성되어 있던 팀원들이 죽거나, 그만두면서 사이가 와해됐지만 서준은 그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늘 존경받던 퇴역 군인이 데나로 패션 1층에서 상주하며 택배를 받아 주거나, 시위하는 단체를 내쫓기까지 한다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직원이란 소식을 들은 게 최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사막에, 서준의 눈앞에 실존했다.
“팔 하나 잃은 거로는 부족해? 대가 없는 호의는 없어.”
“천만에. 너 처음 벌크 캐리어(Bulk carrier_곡물, 광석, 석탄 등을 싣고 수송하는 화물선) 탔을 때 어리바리하게 굴다가 총 맞아 죽을 뻔했던 걸 누가 구해 줬지?”
의수를 흔들며 하는 특유의 농담에 얼어붙은 분위기가 풀어져 버렸다.
“잘났군.”
“서준, 내가 왜 엘리스의 조건을 수락했는지 알아?”
“억만장자로 만들어 준대?”
“계약서 조항 끝에 내가 사망한 후에 가족들이 받게 되는 것들이 적혀 있더라고. 전에는 이런 게 없었잖아. 설령 우리 애들이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책임져 주겠대.”
모건의 말 덕분에 엘리스의 행보엔 위험한 뭔가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쓸데없이 호의를 베풀고, 먹이를 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담겨 있는 말에 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블라인드 사이에 손을 넣어 평화롭기 그지없는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 이번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
“우리 막내가 무용한다고 했잖아. 그 덕에 요즘 다른 가족들은 트레일러에서 지내고 있어.”
현실적인 대답에 서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그는 다시 장난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나야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밖에 없다고 쳐. 넌 학교까지 제대로 다닌 새끼가 도대체 왜 여기서 구르고 있는 거냐?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것도 중독된다니까. 생태계 흐리지 말고, 돌아가. 가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아. 인생은 그게 전부니까.”
모건은 씁쓸하게 웃으며 습관처럼 목걸이가 걸린 부분을 만졌다.
“다 산 것처럼 말하는 건 여전하네.”
“눈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해. 조용히 원하는 것만 가져가고, 또 보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