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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8화 (8/76)

[8화]

***

서준을 보내고 호텔로 들어오자마자 혜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하며 돌아가려던 찰나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인사를 건넸다.

빨간 원통형의 전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혜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여태 의미 없이 지나가기만 했는데 함께 웃으며 인사했다.

단어 없이 미소로만 대화하던 혜수의 눈에 작은 팸플릿이 들어왔다. 사막 투어에 관한 내용이었다.

직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필하기 시작했다. 눈이 크고, 매부리코를 가진 그는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1박 2일, 사막 여행입니다. 아침에 출발해서 밤에 사막에서 자고, 다음 날 와요. 버스 타고 이동하고, 최고급입니다. 숙소며 식사 역시 모두 준비됐고, 소수 인원이라 좋습니다. 내 친척이 합니다. 낙타 탈 수 있습니다!”

서툰 영어로 급하게 쏟아 내는 어리숙한 홍보였지만, 씩씩했다.

“금액은요?”

“500디르함(Dirham).”

한화로 10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혜수가 살짝 쥔 주먹을 입 앞에 두고 고민하자 그가 흥정하기 시작했다.

“480? 450?”

“친척이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멋대로 줄여도 괜찮아요?”

“딱 한 자리 남았습니다.”

‘경험담인데, 지금처럼 낯선 곳에 있다 보면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서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450디르함이라는 거금을 주고, 투어를 예약했다.

해 본 적 없던 충동적인 짓을 저질렀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뒤 휴대폰을 안고 문에 기대섰다.

뒤늦게 발밑으로 몰려드는 민망함에 입술 끝을 깨물었지만, 기껏해야 잠깐뿐인 시간과 인연일 거라고 치부했다. 얼굴을 양손으로 소리 나게 쳤다.

내일 필요한 짐을 간단하게 챙기고, 샤워하려는데 침대 위에 던져둔 전화가 울렸다.

“네.”

― 너 어디야!

귀가 아플 정도로 빽 소리를 지른 탓에 전화기를 잠깐 떨어트렸다 붙였다.

“호텔이요.”

― 근데 왜 종일 전화를 안 받고 지랄이야! 누구 피 말리려고 작정했어?

걱정했다는 소리를 참 곱게도 했다.

“배터리가 없었어요. 우주한테 메시지 보냈는데. 한국은 지금…… 새벽이잖아요. 강원도 공방 다녀오는 길이에요?”

― 그 상놈 새끼가 그런 거 나한테 일일이 얘기해 주겠냐고. 시발. 별일 없으면 됐어. 그리고 너 왜 그 미친놈이 바람피워서 헤어진 거 말 안 했어?!

정우주의 부재중 전화가 80통 가까이 찍혔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별일 아니니까 그랬죠.”

오히려 당황한 건 은하였다. 그저 한없이 유순한 것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멘탈이 센 건가 싶기도 했다.

― 미친놈이 와서 얼마나 지랄했는지 알아? 그런 병신 새끼한테 내가 아티스트 멘탈 관리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어?!

날카로운 음성에 이 먼 땅에서조차 두통이 재발했다.

“혹시 그 사람이 정우주한테 뭐라고 했대요?”

― 정우주가 아니고 다른 놈들한테 씨불이다가 걸렸지. 너보고 어렵다고 그랬대.

“그게 무슨 소리예요?”

― 너 걔랑 안 자 줬다며.

불쾌한 것보다 정우주가 난동을 피웠을 생각에 아찔해졌다.

전 남자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그놈은 디지털 아트 플랫폼의 대표였다. 일 때문에 은하의 소개로 만나 몇 번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좋다는 말에 거절하지 않았다. 모든 연애의 시작이 대부분 그랬듯이.

남자는 만나는 내내 비싼 물건들을 사다 날랐고, 혜수의 인생에 대해 간섭했다.

받은 것을 돌려주면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개념 있는 여자’라고 말하며 칭찬했다. 없어서 못 드는 것뿐인데 명품 하나 없는 걸 ‘수수하고, 소박하다’고 표현했다.

그러던 놈이 삼성동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우연히 마주쳤을 땐 혜수를 모르는 척하며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야, 저기 네 여자 친구 아니야?’

‘혜수가 왜 여기 있어! 닮은 거겠지. 나가자, 우리. 다른 거 먹자.’

쪽팔린 거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명색이 사귀는 사람이 도망치는 꼴을 보고 오랜만에 자기 비하를 했었다. 그 결과의 끝이 바람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구린내 나는 추억에 속이 울렁거렸다.

아마 적당히 꾸며 놓고, 말 잘 듣는 어린 여자 친구를 바란 것 같았지만 이혜수는 온몸으로 거절했다. 이용당하는 건, 윤 회장과 정 남매로 충분했다.

― 아무튼, 너 앞으로 남자 만날 때 나한테 컨펌 받아. 남자 보는 눈, 심각하게 별로야.

매번 자기보다 더 심하게 연애에 실패하는 정은하에게 그 말을 듣는 게 좀 우스워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넌 진짜 그림도 그렇지만, 모든 거에 너무 심각해! 그게 문제야!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남녀 관계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야. 딱 봐서 뜨거워진다, 그럼 물어 버려! 자 보는 거야! 살 맞대고 그놈이 좀 한다, 그러면 일단 그거로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거지. 도덕적 기준이나, 배경, 직업, 성정 같은 건 나중 문제라고. 모로코에 좋은 놈 없디? 보이면 좀 내 몫까지 물어 와.

하다하다 이젠 별걸 다 물어 오라고 시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좋은 놈인지는 몰라도 밥도 먹고, 구경도 하고, 연락처도 주고받은 ‘놈’이 있긴 했다. 물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언니 혹시 술 마시고 운전하는 건 아니죠?”

― 가, 갑자기 뭔 소리야?

“술 마시면 하는 잔소리가 나와서…….”

― 흠, 갑자기 전화가 안 들리네.

“은하 언니!!”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기를 침대 위로 던지고,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면허 정지 이력에 취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 남매가 사고 친다 한들 혜수에게 책임은 없었지만, 귀찮게 만든다는 게 문제였다.

정은하의 면허가 정지된 몇 년 전에도 그랬다. 일이 있을 때마다, 술 마실 때마다 혜수에게 대리운전을 시켰다.

장롱면허에, 운전 자체를 무서워하던 혜수가 졸지에 운전에 단련된 건 그 때문이었다.

열받아서 전화기를 꺼 버렸다.

***

눈이 떠지지도 않는 새벽, 호텔 앞에서 몸을 실은 낯선 버스엔 이미 일곱 명이 타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혜수와 마찬가지로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앉아 인사했다.

어둠도 잠시, 해가 완전히 뜨자 차창 밖 풍경은 다른 세상으로 달라졌다.

“와…….”

광활하게 깔려 있는 암적색의 대지, 듬성듬성 나 있는 잎이 뾰족한 나무들을 보니 다른 행성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보이는 아틀란스 산맥엔 눈이 아직 쌓여 있었다. 이 마르고, 더운 사막 나라에 겨울이 공존했다.

“여러분은 에잇 벤하두(Ait Benhaddou)에 대한 어떤 환상을 품고 오셨겠지만, 사실 별거 없습니다. 이미 에일리언 나오는 영화에서 다 보셨을 거고, 화면과 다름없습니다. 그저 11세기 조상들이 땅을 지키려고 만들어 놓은 저 카스바(Casbah_이슬람 도시의 방어용 성)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여기 들르는 건, 제가 먹고살기 위함입니다. 뭔가 좋은 걸 발견하면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다음에 일할 때 써먹겠습니다.”

재밌는 설명을 하며 일정을 진두지휘하는 남자는 프런트 직원과 닮아 있었다.

유머러스한 그의 설명에 일행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노부부, 일본인 자매, 스페인에서 유학 중인 태국인 등……. 언어가 완벽하게 통하진 않았지만, 의미는 하나로 통일됐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맑은 공기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이드는 모든 사람이 모인 틈을 타서 경이롭기 그지없는 산맥과 땅을 마치 동네처럼 편안하게 설명했다.

‘찰나 우리는 모두 알라가 주신 이 땅을 가집니다.’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투어가 끝났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막 입구에 도착하자 낙타들이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긴 속눈썹과 뭉툭하고 두꺼운 얼굴에 입술을 가진 생물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금은 귀여울 줄 알았지.

“으악! 너 냄새나!”

분명 일본어였지만, 뜻은 일맥상통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낙타는 푸르릉 소리를 내며 콧물을 뿜어냈다. 다른 이들이 배를 잡고 웃는 광경에 혜수 역시 같이 웃었다.

“레이디, 스카프 갖고 있습니까?”

다른 이들이 모두 모래 먼지를 막을 만한 것을 두르고 있을 때, 혜수 혼자 맨얼굴로 멍하니 낙타를 보고 있자 가이드가 다가왔다.

“아…….”

어제 서준이 제게 사 준 파란색 스카프를 챙겨 온 게 떠올랐다.

앞으로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그것을 꺼내 두르려 하자, 그가 직접 매듭을 지어 주기 시작했다. 코와 입술을 가리고, 눈만 보이게 만들었는데 일본인 자매가 혜수를 보고 예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서준이 아니었다면 혼자서 모래바람을 맞아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울로 확인한 모습이 무척 낯설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낙타의 승차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구를 오르고, 내려갈 때마다 허벅지 안쪽과 골반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여러분, 하늘을 보세요!”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선명하게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분홍,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낙타에게 몸도, 미안한 마음도 맡긴 채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때까지 하늘만 쳐다봤다.

사막 가운데에 만들어진 숙소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안락하고 편안했다.

“허니, 내 생각엔 넌 너무 얇게 입었어. 사막의 밤은 춥다고.”

“괜찮은데.”

“제 생각도 그래요. 혹시 다른 옷 없어요?”

“좀 낡았지만, 내 재킷이라도 빌려줄게. 잘 때 입고 자.”

처음 보는 사람들의 친절함에 당황한 나머지 팔을 허공에 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억지로 어깨 위에 올려 주었다.

이탈리안 노부부와 숙소를 같이 쓴 일본인 자매는 내내 혜수에게 따뜻했다.

그들은 혜수의 이름을 완전히 부르지 못했다. 어깨 위로 얹어지는 익명성에 안도감이 들었다. 받아 본 적 없는 호의에 괜히 마음이 뭉클해진 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에 순간 모든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당장에라도 눈 안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아름다운 걸 보면, 꼼짝없이 동화됐다.

고개가 아플 때까지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잠깐 켜서 사진을 찍어 서준에게 전송했다. 제 행동이 과한 걸까 잠깐 고민했지만, 충동적인 기회를 만들어 준 그와 이 하늘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피곤하지가 않네.”

“네, 저도 그래요.”

“사실 늘 우리 위에 숨어 있는 건데, 멀리까지 와서 돈을 줘야 보인다는 게 아이러니하군.”

“저걸 보니까 우리가 진짜 먼지 같네요.”

늦은 새벽까지 그런 대화를 듣다가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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