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들켰네. 그래도 응원하고 있어요.”
불쑥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하다가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가 나란히 섰다.
“그림도 모르는 분이 응원해 준다니. 그 작가분이 누군지 몰라도 행복하시겠어요.”
“앞으로 작가님도 응원할게요. 그림이 아니어도 어디서 뭘 하든 잘해 낼 거예요.”
처음 보는 상대가 건넨 응원은 우습게도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혜수는 먹먹해져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앞서 나갔다.
“작가님, 길 모르잖아요!”
서준은 길치처럼 직진만 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다. 잠깐이었지만, 처음으로 진짜 얼굴을 보여 준 것 같았다. 한쪽에 드리우는 이유 모를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여자와 동행하는 동안 신기하게도 수면 부족으로 인한 두통이 말끔하게 사라졌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아파 왔다.
단순한 호감 혹은 욕망과는 명백하게 다른 종류의 자극이었다.
그런 그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쉽게도 금방 해가 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여자를 붙잡고 있기엔 모호한 시간이 어느새 그림자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괜찮으면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는 여지를 둔 제안에 혜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관과 같이 갔던 식당 가운데쯤에 호텔이 있었다. 작은 데다가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깔끔했고, 치안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놀아 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오늘 여러모로 감사해요.”
“그 이상한 노인네랑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가고, 여긴 밤 되면 위험하니까 호텔 밖으로는 나오지 말아요.”
“네, 서준 씨도 몸조심하세요.”
미련 하나도 없다는 듯 상큼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여자가 돌아서는 뒷모습을, 머리카락을, 작은 어깨를, 소리도 없이 닫히는 문을. 끝까지,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대로 헤어지면 되는 걸까.
갑자기 손에 땀이 배어 나오고 갈증이 일었다. 튀어나올 것처럼 뛰는 심장에 미간을 찌푸리며 서준은 왼쪽 가슴 부근을 문질렀다.
뒷모습을 향해 살짝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리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굳이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
몸을 돌렸다.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도로라 모래바람이 일었다. 숨을 잠깐 참고, 눈을 감았다 떴다.
멀리 보이는 키 큰 네온 전광판은 호텔 수영장을 광고하고 있었고, 그 옆엔 작은 파도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각인되도록 바라봤던 여자의 잔상이 지나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이 멋대로 호텔 입구로 돌아갔다. 계단 하나에 발을 올리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람 역시 서준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왜 돌아오셨어요?”
거기 서 있었다.
“그러는 작가님은 왜 다시 나왔어요?”
“……좀 아쉬워서요.”
떨리는 입술과 상기된 뺨을 보고 서준은 속절없이 웃어 버렸다.
“나도 그래요. 한 번 더 만나요, 우리.”
두 사람 안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뭔가가 터져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서준은 이 풋풋하고, 간지러운 행위가 백 퍼센트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아니, 좋았다.
마음 같아선 같이 저녁이라도 먹고, 술이라도 한잔하며 더 붙어 있고 싶었지만 이런 만남은 쉽게 타올랐다가 금방 꺼지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부러 몸을 사렸다.
‘다음’을 기약하며 뒤로 미루는 건, 내일 없이 사는 그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유는 호감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묘한 불안함이 단서인 것 같았다. 여전히 그 정체는 불분명했다.
강서준은 현명했고, 동물 같은 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는 여자를 본 이후부터 뭔가를 놓치고 있단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어떤 위험한 신호일까.
어쨌든 지금은 잊고 있었던 일부터 진행해야 했다. 무전기와 GPS를 끄고, 미친 듯이 울리는 휴대폰도 꺼 두는 바람에 지금쯤이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여자를 데려다준 호텔 근처를 한 바퀴 돌며 요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히 위험한 요소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전해 보이지도 않았다. 해가 지면서 도시의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나 진짜 실망했어요.
받자마자 퉁명스럽게 말하는 요한 때문에 웃었다. 아니, 그냥 기분이 좋은 걸지도.
“오랜만에 한국인 만난 거라 불가항력이었어.”
― 누가 들으면 한인 단체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요.
과장된 표현에 머쓱해져 궁금하지도 않은 걸 물었다.
“제레마이는?”
― 그쪽도 데이트하러 나갔어요.
“여기 상황은 모르나 보네.”
― 알면 재밌는 상황 직관하겠다고 전용기 띄웠겠죠. 따로 보고도 안 했고, 기록도 안 했어요.
“고마워.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 그게 몇 시간 만에 뚝딱 나오는 그런 게 아니라……. 잠깐,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말한 거예요?
“왜?”
― 뭐지? 갑자기 왜 그래요? 그런 친근하고, 따뜻한 인사는 수상하잖아요. 어쩐지 말투도 부드러워졌네요.
초반엔 얌전하기만 하던 너드가 제레마이랑 붙어 있으면서 아무래도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일일이 상대해 봐야 말만 길어질 뿐이니 무시가 답이었다.
“미술관이랑 묶어서 홍보하는 건 잠깐 보류하지.”
― 왜요?! 보스 결재만 남았는데!
어둠이 깔린 골목, 긴 담배를 입에 문 남자들이 서준을 위아래로 쳐다보며 주시했다. 짐을 미리 호텔로 보내면서 무기까지 보낸 건 잘못한 일일까. 하다못해 나이프라도 들고 있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괜한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이럴 땐 외부인인 자신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느낌이 그래. 아까 네가 말한 농부, 어떻게 생각해?”
엉망인 미술관 구성과 미적지근한 홍보, 평소보다 심하게 많은 경호원도 여러모로 수상했다. 확실하지 않은 심적 증거들뿐이라 느낌이라고 둘러댔다.
― 글쎄요. 그냥 가짜?
“그럼 다행이지만, 스페인에서 가장 돈 되는 농사가 뭔 줄 알아?”
― 으음……. 포도?
“대마초야.”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요한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했다.
― 에이……. 설마요.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은 엘리스가 뭐 하러? 거기다…….
요한은 옆에 없는 누군가를 의식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더니 말을 이어 갔다.
― 데나로(DENARO) 알잖아요. 자기네들이 범죄 조직이었다는 역사 씻어 내려고 얼마나 노력했어요? 이탈리아 이름도 버리고 이상한 미국식으로 쓰잖아요.
“그렇다고 그 자식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지.”
― 솔직히 방탕한 생활을 하는 우리 보스라면 모를까. 엘리스는 철이 없어서 그렇지, 도덕적으로는 훨씬 청렴해요. 가방에 쓰던 악어가죽, 제일 먼저 끊은 게 여기예요. 화장품도 동물 실험 안 한다고 선언한 것도 모자라서 꼬박꼬박 보호 단체에 기부하고, CDF(Children's Defense Fund)며 여성 보호 단체에 꾸준히 들인 기부금까지 합하면 아주…… 어마어마해요. 거기다 알잖아요. 만약 엘리스가 그쪽을 건드렸다면, 일단 그 집안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걸요.
“추측이야.”
― 아아!! 진짜 싫은 게, 그쪽 추측은 옳은 경우가 많아서 무섭다고요! 진짜!
부정하고 싶은 건, 말을 꺼낸 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나쁜 예감은 좀처럼 틀린 적이 없었으므로 이런 느낌이 들 때면 늘 이번만은 틀리길 바랐다.
“그럼 그게 틀렸다고 증명해 내면 될 일이야. 거기다…… 제레마이 말이 맞아. 이 미술관도, 행사도 이상해. 애초에 엘리스가 벌여 놓은 일치고 홍보가 덜하다는 생각을 못 했어.”
정통성 운운하며 시작한 사업임에도 허점이 많이 보였다.
미술관은 오래된 건물에 색만 칠하고, 작품만 갖다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그나마 그것마저도 초보자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듯이 엉망진창. 수십억이 든 사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 내 생각인데, 오아시스 같은 건 다 핑계고 사실은 그 여자가 그림을 좋아해서 모아 두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원래 이해 안 되는 현대 미술품도 잘 사 모으잖아요.
“지적 허영심이 강한 여자야. 구매할 때마다 요란하잖아. 좋아하는 척하는 거지. 걸린 작품 목록 확인하고 탈세 현황도 찾아봐. 그리고 그쪽 일정 갖고 있지?”
― 내일은 어린이 보호 단체 방문, 모레는 개관식 마무리되는 대로 카사블랑카 이동으로 되어 있어요. 스페인으로 가는 육로 동선, 직접 확인한대요.
“그걸 왜 걔가 직접 해?”
― 모르죠! 그걸 알면 제가 엘리스 비서겠죠.
집 앞에 나갈 때조차 1,800달러짜리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는 여자였다. 동선을 직접 확인할 리 만무한데…….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실체를 모르는 불안은 그 여자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했다.
새삼 이런 걸 확인하고 수상하다 생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가만히 있어도 될 텐데 사서 일을 크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루트 확인해서 미리 사람 대기시키자.”
― 아, 정말!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녜요?
“대신 난 여기서 엘리스한테 걸리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려니 해.”
― 좀! 그쪽이 죽으면 다음엔 내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고요.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차는 널 줄게. 아파트도.”
― ……녹음했어요. 행운을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