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은혜 작가님은 훌륭한 작가님이신가 봐요.”
필명으로 불리는 일이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의 입에서 나오니 낯간지러웠다. 본명을 말해 줄까 하다가 괜한 짓이라 여겨 참았다.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람이니까.
“그렇진 않아요.”
“이 먼 곳까지 그림을 가져올 정도면 훌륭한 것 아닌가요?”
웃으면서 손사래 치더니, 하얀 얼굴이 살짝 질려 버렸다.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했으며 불안해 보였다.
말을 꺼낸 서준이 걱정스레 쳐다보자 민망해서 억지로 웃었다.
일부러 지은 표정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이러면 그냥 넘어가는데,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당황한 혜수가 재깍 입을 열었다.
“그냥 운이 좀 좋았어요. 출품도 스튜디오 대표님이 해 주셨어요.”
“옆에 그런 사람 둔 것도 실력이에요. 아무것도 안 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겠죠.”
‘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들은 탓일까. 낯선 타인이 대충 내뱉은 것 같은 말에도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튀어나왔다.
“실은 거기 걸린 그림, 3년 전에 그린 거예요.”
남자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날카로운 콧대와 턱선이 두드러졌다.
“문제가 됩니까? 문외한이 봐도 오늘 전시는 엉망이었고, 그쪽 섹션에 걸려 있던 그림 중에 제일 눈에 띄었어요.”
“전시 구성이 좀 독특하긴 했죠? 사실 그 덕을 좀 본 것 같기도 해요.”
“독특? 진심입니까?”
심각하게 정색하는 바람에 웃어 버렸다.
왜 이렇게 자꾸 허파에 바람 빠진 사람처럼 굴게 될까.
사실 그의 말에 혜수도 동의했다. 전시는 정말 엉망이었다. 소장품과 공모전을 통해 받은 작품들이 어떤 규칙도 두지 않은 채 빨래처럼 걸려 있었는데 조명이나 위치마저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조악했다. 동네 작은 화랑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구성 때문이 아니라 정말 멋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칭찬에 볼이 상기됐다. 고개를 내릴 때마다 보이는 풍성한 속눈썹, 가늘고 하얀 팔, 유리잔을 매만지는 작은 손이 또렷하게 그의 안에 각인됐다. 시간이 늘어지는 것처럼 느릿하게.
진정할 의욕이 없어 보이는 팽팽하고, 뜨거운 시선에 혜수는 어색해서 말을 돌렸다. 본능이 담긴 이성의 표현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유독 열이 올랐다.
“사실 그만둘까 고민 중이거든요.”
“왜요?”
악의 없는 호기심 어린 질문, 입술이 달싹거렸다.
여태 ‘손’에 관해서 의사가 아닌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었지만, 그에겐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 만난 타인이기 때문일까.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손이 잘 안 움직여서요. 평상시엔 괜찮은데 붓만 쥐고 있으면 저리기 시작하고, 나중엔 제멋대로 곱고 아파요.”
“병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입원까지 해서 검사도 여러 가지 해 봤는데 이상 없대요. 3년 내내 그려 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답이 없어요.”
서준은 그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예사로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 건, 한참 뒤였다.
“경험담인데, 지금처럼 낯선 곳에 있다 보면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담백하게 대답하며 혜수는 습관처럼 웃었지만, 서준은 또 인상을 썼다. 자꾸 거짓말을 들키는 기분이었다. 나중엔 아예 피해 버렸다.
반면 서준의 눈동자는 그런 여자를 끝까지 좇았다.
작고, 예쁘장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마음이 미어졌다. 조금만 이성을 놓으면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단순한 호감과는 좀 달랐다.
초조함에 인내심이 떨어진 그가 다짜고짜 물었다.
“사귀는 사람은요?”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오래 사귀었어요?”
“잠깐이요.”
“연애는 원래 짧게 하는 편인가요?”
“그런 건 아닌데……. 저 무슨 죄지은 건 아니죠?”
“아, 죄송합니다.”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런 걸 보면 선수는 아닌 것 같은데.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남자에게 호기심이 커지는 건 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애가 길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서준 씨는요? 사귀는 사람…….”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제 외형이 먹힌다는 걸 아는 자신감인지, 본능인지 몰라도 제대로 통해 버렸다.
“애인 있는데 모르는 여자보고 밥 먹자고 할 만큼 귀찮은 짓 안 해요.”
당당한 표현에 얼이 빠졌다.
만약 평소 같았다면 껄렁거리고 가벼워 보이는 낯선 남자를 혐오하며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분명 술자리 안주 정도로 쓰이며 끝났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모든 걸 무릅쓰고 앉아 있게 할 만큼 그가 지나치게 매력적이라는 것이었다. 얼굴, 목소리, 자세나 말투, 입고 있는 옷이나 향기까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이 낯선 사막에서 가장 이질적인 모습을 한 남자가 하필이면 같은 언어까지 사용했다.
평생 느껴 본 적 없던 시월 말의 열기가 심한 갈증을 일으켰다.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그럼 모로코엔 왜 오셨어요?”
깊은 전후 생각 따위 모르는 남자는 그저 호기심과 조심스러움이 반반 섞인 여자의 물음을 퍽 귀엽다고, 여겼다.
“일 때문에 왔습니다.”
“그러시구나. 전 사실 여기 전시회 핑계 삼아서 도망 온 건데, 직무 유기.”
“기껏 도망 온다는 게 결국 또 일이네요.”
“그건…… 그러네요.”
또 나오는 거짓 얼굴. 이따금 튀어나오는 저 억지스러운 미소가 심하게 거슬렸지만, 애써 꼬집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이에 지적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그저 지금은 이 여자에게 적당히 호감을 표하고, 덧없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즐거웠다.
“저도 오기 싫었는데 도망 온 거예요.”
“정말요?”
“네, 시월 말인데 뉴욕에 벌써 눈이 오더라고요.”
앞뒤를 뎅강 잘라 버린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자기도 겨울을 싫어한다고, 답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제법 그럴싸한 모양의 쌀국수 두 그릇이 나왔다. 일부러 미적지근하게 만든 국물 음식이 나쁘지 않았다.
“입맛에 맞아요?”
“맛있어요.”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뒀던 혜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간격으로 울렸다. 메시지도 전화도 모두, 정우주였다.
서준이 손끝을 쳐다보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짧게 답장하곤 휴대폰을 꺼 버렸다.
“친한 친군데, 제가 안 보이면 좀 불안해해요.”
“애인은 아니라는 확신을 줘서 고마워요.”
저돌적인 대답에 마시던 물을 뿜어 버릴 뻔했다.
“서준 씨.”
“부담스러웠다면 미안해요. 확신이 생기면 미루지 않는 주의라.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웃으며 말하는 현실적이고, 매서운 문장이 이혜수의 어딘가를 건드렸다.
장난기 어린 가벼움은 사라지고 당황만 남아 그녀의 붉은 입술 근처를 맴돌았다.
“저…… 그, 저는…….”
“농담입니다. 천천히 할게요. 작가님이 밥만 먹고 도망갈 기세라 초조해서.”
누가 덤벼도 이길 것 같은 덩치 큰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연약한 척하는 게 싫지 않았다. 혜수는 계속 손으로 입을 가리기 바빴다. 진짜 웃음을 들킬까 봐.
필시 프리 패스감인 저 얼굴과 몸이 문제인 거다.
어색하지만 열띤 분위기가 이어졌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온 두 사람은 따로 권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산책했다.
광장은 아까보다 더 시끄럽고, 복잡했지만 사람들 사이엔 활기가 넘쳤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양한 색으로 번쩍이는 의상들이 널려 있는 가게 앞에 섰다.
“그만두면 어떤 일을 할 생각이에요?”
“글쎄요. 혹시 추천 직업 없어요?”
“적당히 벌어먹을 수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림밖에 몰라서…… 모르겠어요. 뭘 해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혜수의 고민에 서준은 시장 한복판을 혼자 달려 나가는 어린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는 게 작가님의 방식이 될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되면 위험하죠. 지금 저 아이가 가다가 차에 치여 죽어도 그 삶에 의미가 없진 않잖아요.”
“……너무 극단적인 예시네요.”
“극단적인 건 없어요. 다 현실이죠.”
서준은 하늘하늘한 파란색 스카프 하나를 집어 들어 혜수의 머리에 씌워 주곤 턱 밑으로 매듭지었다.
앞에서 보던 상점 직원이 어색한 한국말을 꺼냈다.
“구여워!”
심각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활짝 웃어 버렸다. 그렇게 함께 나누는 영양가 있거나, 없는 대화들도 꽤 즐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게 두 사람 모두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쉴 틈 없는 대화에 목이 말라 길에서 파는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해금처럼 생긴 악기의 연주를 듣고,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것 같은 상점들도 둘러봤다. 낙타와 원숭이, 바닥엔 뱀도 기어 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등과 어깨가 자주 부딪힐 정도로 간격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필 둘 다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밝게 웃으며 걷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연인처럼 보였다.
그림으로 만들어진 작은 간판들이 잔뜩 붙어 있는 상점 앞에 혜수가 우뚝 멈춰 섰다. 그 옆얼굴을 보다가 서준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내가 아는 사람도 화가예요.”
“정말요? 어떤 그림 그리시는데요? 동양화? 서양화?”
“아마도…… 예쁜 그림?”
“솔직히 그분 그림엔 관심 없으시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에 혜수는 서준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더니 눈을 맞추며 웃어 왔다. 머리가 햇살 아래 찰랑거리며 반짝일 때마다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이 그의 안에 일었다.
예쁜 웃음을 따라 씩 웃고는 어깨를 제 쪽으로 살짝 당겨 주며 답했다. 그대로 두면 뒤에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