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은혜>
검은색으로 그려진 파도 그림 아래엔 그런 이름이 한글로 붙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추고,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모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흑백 그림은 평소 그림에 관심도 없던 남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흑백의 파도는 사진처럼 정교했다. 햇빛에 이는 윤슬과 물거품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는데 어쩐지 색이 있는 그림보다도 훨씬 흡입력이 있었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 그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예쁘장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림이 주는 이미지와 화가의 느낌이 아주 달라서 내심 놀랐다.
싫은 티를 내고 있지만, 강하게 밀어내지 못하고 웃고 있는 여자와 늙은 남자.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갔을 텐데 서준은 자기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인을 본 게 오랜만인 탓일까, 아니면 그림에 마음이 동한 탓일까.
잔뜩 긴장한 작은 옆얼굴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다행히 여자는 생각보다 갑작스러운 상황극에 잘 따라 주었다.
하얀 피부에 어깨까지 단정하게 내려오는 갈색 머리, 큰 눈, 올망졸망한 코와 조금 말라 보이는 것 같은 입술. 단정한 옷차림까지.
‘어디서 봤더라?’
이 짧은 사이에 호감과 친근감을 느낀 건, 낯익은 기시감 때문일까 아니면 예쁘기 때문일까. 서준은 그런 것을 상기하며 여자의 얼굴을 익혔다.
와락 안겨 왔을 땐 좋은 향기가 났고, 팔이 너무 가늘어서 조금만 세게 당겼다간 부서지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었다.
할 말은 다 하면서 떨리는 작은 손을 보고 오지랖 부리길 잘했다 확신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드디어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목소리에 바위 같은 몸이 움찔거렸다. 목소리마저 예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가죽 작품이 전시된 곳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현저하게 줄었고, 감사 인사를 듣자마자 서준이 먼저 팔을 뺐다.
그가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보자 눈치를 보던 은혜 작가가, 혜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먼저 끼어든 건 난데 뭐가 그렇게 죄송해요?”
“그럼…… 감사합니다, 로 바꿀게요.”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밝게 웃는데, 솔직히 제 취향인 외모였다. 서준은 즉각적인 끌림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괜히 멋쩍어져 목 부근을 손으로 문지르며 답했다. 눈은 내내 그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렇게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오지랖이었으니까.”
“오지랖 부려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토할 뻔했거든요.”
눈꼬리가 휘어지고,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예쁜 미소를 보자마자 그의 본능은 자연스레 여자를 붙잡을 핑계를 찾아냈다.
“그렇게까지 감사하면 같이 밥 먹죠.”
“……네?”
“어차피 애인이랑 있겠다며 나온 거잖아요. 은혜 작가님.”
주변의 소음 안에서 또렷하게 들리는 낮고 깊은 음성에서 희한하게도 두려움이 일었다. 미묘한 것이라 혜수는 낯설어서 그렇다고 치부했다.
오롯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작은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벌어졌다.
“절 아세요?”
서준은 근사하게 웃어 보였다.
“아까 그 늙은이가 시끄럽게 말하기도 했고, 때마침 저는 작가님 그림 옆에 서 있었죠. 그 파도 그림, 보고 있었어요.”
“아아. 그러셨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자 그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강서준입니다.”
물끄러미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던 혜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악수는 좀…….”
“안기고 팔짱까지 끼더니 악수는 안 되는 겁니까?”
남자의 눈매가 길어지는 찰나, 시간이 멎는 것 같았다. 무언가 부드럽게 몸을 울리며 간지럽혔고, 그의 모습과 심장 박동만이 의식을 차지했다.
짙은 눈썹에 좌우의 쌍꺼풀이 약간 다른 눈은 매력적이었지만, 차가워 보였다. 자기주장이 강한 오뚝한 콧대와 귀 끝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턱선. 적당히 힘주어 넘긴 머리는 나이 들어 보이지도, 가벼워 보이지도 않았다. 말투는 묘하게 딱딱했지만, 목소리와 표정은 퍽 다정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최초의 미학적 경험 앞에 혜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사정이 좀 있어서요.”
싫은 건 아니라는 소리와 여자의 눈길에서 서준은 반 긍정적인 기운을 읽어 냈다. 애초에 이성의 거절이 익숙하지 않은 남자이기도 했다. 어깨를 으쓱거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악수는 패스하고, 혹시 점심 먹었어요?”
“아직……이요.”
“나랑 같이 먹어요.”
어디서 부는지 몰라도 건조한 바람이 서준을 지나 혜수 쪽으로 불어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식물과 가죽의 냄새, 마지막엔 아까 안기며 맡았던 그의 향기만이 다시 한번 강렬하게 코끝에 남았다.
평소라면 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
작은 대답 끝에 어딘가 그리운 느낌의 미소가 그대로 쏟아졌다. 냉랭해 보이는데 웃는 얼굴은 또 심하게 근사했다. 그 탓인지 시원스레 받아들인 태도와 달리 심장은 두근거렸다.
미술관을 나오자 그가 좀 멀어졌다. 그저 한 걸음 앞장선 것뿐인데 옆이 서늘해질 정도로 허전해져 내심 깜짝 놀랐다.
“음식 가리는 거 있어요?”
“딱히 없어요.”
“쌀국수, 좋아하죠?”
“네…… 네? 어떻게 아셨어요?”
“찍어 봤어요.”
진지한 얼굴로 하는 시시한 농담에 황당하게 웃다가 자기보다 훨씬 큰 보폭에 놀라 얼른 따라갔다.
남자는 슈트 재킷을 벗어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커다란 몸에 어울리게 걸음걸이가 묵직했고, 빨랐다. 놓치진 않을까 서둘러 뒤를 쫓았고, 조금 뒤처진다 싶을 때마다 그는 가만히 서서 기다려 줬다.
두 사람은 인파가 몰려 있는 광장과 시장의 중심지를 지나 2층으로 된 신식 건물로 올라갔다.
입구에 다가서기 전부터 고수 향이 났다.
붉은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벽 쪽에는 대나무가 있었고, 온통 라탄으로 만들어진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이색적인 분위기였다.
혜수가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앉는 사이, 종업원이 금방 다가왔고 서준은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주며 주문을 마무리했다.
종업원이 연신 ‘땡큐’를 외치며 사라졌다.
“팁을 주신 건가요? 제가 내고 싶었는데.”
진실된 호의를 받아 본 적 없는 혜수는 경계부터 했다. 그 말을 들은 서준은 눈을 살짝 찡그리더니 묘한 웃음을 지었다.
“여자가 밥 사겠다고 하는 거,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는 뜻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런 뜻 아니면 우리 또 볼 수 있어요?”
망설임이라고는 1g도 느껴지지 않는 당당함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입가에 남아 있는 은은한 미소에 시선이 고정됐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얼굴만 감상하는 걸 가만히 기다리던 서준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답 안 하는 것치고는 제 얼굴을 꽤 오랫동안 쳐다보시네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할 말을 잃었거든요.”
싫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습관적인 끼 부림 혹은 착각,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그가 두 번째 선제공격을 날렸다.
“다행이네요. 벌써 차인 줄 알았어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구로 던지는 추파에 한숨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정도면 습관이지.
“이런 거, 평소에 자주 하시나 봐요?”
“이런 거?”
“이렇게 막, 웃으면서 친근하게…….”
“플러팅?”
직설적인 단어에 화들짝 놀란 건 오히려 혜수 쪽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거렸다.
“부정을 안 하시네요.”
“거짓말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여유롭고, 곧은 그의 시선에 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쌀국수도 그렇고,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그 플러팅에 속하는 건가요?”
“둘 다 짐작입니다. 근데 이러는 거 처음이에요.”
눈꼬리 끝에 믿지 않는다는 웃음을 확연하게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믿어요. 처음치고는 굉장히 능숙하시네요.”
“이래 봬도 엄청 긴장하고 있는데. 아, 혹시 아까 그 노인네가 했던 멘트가 조금 더 취향인 건 아니죠? 진하게 지내보자고, 이런 거.”
서준이 김 이사를 따라 하자 혜수가 얼굴까지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밥은 제가 사게 해 주세요.”
끝까지 지질 않았다. 여러모로 이상한 남자였다.
사막에서 맡는 고수 향기만큼이나.
***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또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기도 했다.
똑같은 테이블의 같은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시선의 높낮이가 달랐다. 혜수가 작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서준이 컸다.
어깨도 넓고, 덩치도 커다래서 멀리서도 한눈에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장만 보면 영락없는 비즈니스맨인데, 운동선수라도 되는 걸까.
소심하게 힐끔힐끔 관찰하는 저와 달리 서준은 뚫어져라 쳐다봤다. 열렬하고 진한 눈빛에 결국 먼저 항복을 외치고 물었다.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테이블 위를 톡톡 치던 커다란 손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죄송해요. 계속 눈이 가네요.”
사과를 받긴 했지만,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제 감정을 숨기지 않는 태도에 오히려 민망해진 건 혜수였다.
직설적인 태도에 면역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물만 마셨다.
반면 서준은 물잔을 열심히 채워 주며 덤덤하게 관심을 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