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런 근본적인 질문은 비행기 타기 전에 했어야지.
휴대용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 내며 서준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내 업무는 호텔 시찰이었어.”
― 물론 그것도 포함해서! 무기는 어때? 마음에 들어?
뻔뻔한 웃음소리에 살벌하게 대답했다.
“한 번도 안 쓰고 가져가서 네 얼굴에 들이대 줄게.”
― 안전했으면 하는 친구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겠냐? 참고로 구석 포켓에 콘돔도 들어 있어. 물론 넌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운명 같은 만남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닥쳐.”
― 그럼 어떡해? 엘리스 캐려면 너밖에 없는데! 나나 회사 사정 다 알면서 적당히 똑똑하고, 출세나 돈 욕심 없고,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 자기방어 기술을 가진 사람이 강서준 밖에 더 있어? 아니면 연약한 너드를 보내리?!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연약한 너드, 요한이 질문을 덧붙였다.
― 무슨 기술을 갖고 있는데요?
― 요한, 같은 팀원 뒷조사는 기본 아니냐? 준은 한국 특수 부대 출신에 무술 특기자야. 잠깐이지만 경호 경력도 있지. 상파울루에서 처음 만났을 땐 진짜 짐승 같은 놈이었단다.
― 와우! 어쩐지. 회사원이라기엔 쓸모없는 근육이 많더라.
― 좀 사회성이 떨어져서 문제지만, 그 덕에 엘리스가 이놈 얼굴은 모르잖아.
뒷말은 요한에게만 속삭이듯 했지만, 모로코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됐고, 오면서 사직서 업로드했으니까 처리해.”
진심이 분명한 서준의 말에 제레마이는 호들갑을 떨었다.
― 요한, 방금 저 잔인한 말 들었니? 우리를 버리겠다는 말 들었어?!
― 준, 제발. 적당히 해 주세요. 저 혼자서 이 미치광이 감당하기 힘들어요.
“네 월급에 그것도 포함된 거야.”
요한은 구원을 바라고 징징거렸지만, 서준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 이거 봐.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너는 돈과 권력에 너무 욕심이 없어. 듣자 하니 허드슨 야드의 새 아파트도 장난 아니라며?! 차도 그렇고……. 너 사실 재벌인데 심심해서 놀러 다니는 거 아니냐?
“시끄러워.”
― 이번 일로 엘리스만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호텔이 대수겠어? 내 앞길이 20번 국도만큼이나 쫙 펼쳐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나의 성공은 곧 너의 성공이다!
짜증이 난 서준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초록색의 드레스를 입은 엘리스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지만, 확실히 눈에 띄었다.
“사복 입은 것들 포함해서 서른 명은 되겠군. 모두 뉴욕에서 데려왔나?”
새로 개장한 미술관은 이슬람 전통 가옥을 리노베이션 한 형태로 군데군데 종교적 냄새가 남아 있었다.
― 정확히 서른두 명. 그럼 어퍼 이스트 사이드 사는 인간이 모로코에서 경호원을 사겠어요? 사전에 경호원들 신원 확인 마쳤어요.
연신 하품을 하며 지루한 듯 말했지만, 요한의 실력 하나는 확실했기에 믿음이 갔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비영리 단체와 함께 개최한 행사는 소외당한 어린이들을 위해 ‘오아시스 프로젝트’로 명명했지만, 생각보다 홍보가 미적지근했다.
오면서 확인했지만 화려하고,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엘리스의 평소 방식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생뚱맞은 행보임이 확실했다. 거기다 얼추 둘러봐도 구성도 엉망이었고, 허점투성이였다.
― 서준은 경호원 ‘톰’이에요. 일본계 미국인에 가라테가 특기입니다. 용병으로 5년, 개인 경호 경력 3년…….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그가 성질부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 왜 하필 일본인이야?”
― 그게 중요해요? 엘리스 경호하는 척하면서 수상한 점 찾아서 보고해 주면 됩니다.
“한국인한텐 좀 중요한 문제야. 제레마이는?”
― 어, 음…… 잠들었네요.
“하, 됐다. 내가 아까 알아보라고 했던 건?”
― 함부르크에 역외 법인이 있었어요. 예전 사업 수익 중에 신고하지 않은 자금 돌리는 거 보니까 단순히 터널링(Tunneling_기업 및 개인의 이익이나 자산 및 세금을 빼돌리는 행위) 같은데 희한한 게 차명 이사가 스페인 사람이에요.
“스페인?”
― 찾아보니까 직업이 농부라고 하던데 아직 아무 연관도 못 찾았어요.
서준의 눈썹이 근사하게 일그러졌다.
“엘리스 최근 출국 기록이랑 호텔 출입했던 내용까지 찾아서 대조해 봐.”
― ……준, 제 생각엔 우리가 지금 충분히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 해야 해요?
“지금 네가 하는 모든 것들은 제레마이가 합법적으로 붙여 놓을 거야.”
― 흑, 아무래도 제 안전을 위해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겠네요.
서준은 티 나지 않게 웃었다.
주제도, 목적도 분명하지 않은 그림들이 무작위로 걸린 곳을 걷다가 검은색의 파도 그림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제 턱을 매만지며 잠깐 생각에 빠졌다.
“냄새가 나긴 하네.”
― 네?
요한은 괜스레 책상 위에 올려 둔 먹다 남은 치킨샌드위치를 보며 되물었다.
***
뜻을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은혜 작가.”
멍하니 듣기만 하던 혜수가 자신을 필명을 부르는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 김 이사님.”
턱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중년의 남성이 흐뭇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힘들어요?”
걱정스레 바라보는 남자의 눈엔 욕망이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몇 번을 받아도 불쾌했다. 이젠 저 남자가 낀 뿔테 안경도, 턱수염도 더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피곤해 보여서 걱정 많이 됩니다.”
“아닙니다.”
어지간히 싫은 티를 내는데도 그는 웃으며 샴페인 잔을 부딪쳐 왔다.
모로코에 초대된 건 혜수뿐만이 아니었다. 데나로와 연관된 몇몇 기업들과 유명인들이 있었고, 김 이사는 이 미술관 건축에 뛰어든 기업 관계자 중 하나였다.
“난 개인적으로 우리 은혜 작가가 이렇게 글로벌한 활동을 이어 가면서 더 유명해지길 바랍니다. 회장님 밑에서 ‘그림 그리는 개’로 잡혀 있는 거 힘들지 않습니까.”
혜수가 피식 웃었다.
“전업으로 생계유지하는 작가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개라도 안 하면 먹고살기 힘들어서요.”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한들, 잘나가는 젊은 작가 붙잡아 두고 상업적으로 독점하고 있으니 그런 소문이 돌 수밖에요. 듣자 하니, 잘나가는 집에 작가님 그림 상납까지 하신다던데. 사실입니까?”
“와, 재밌는 소문이네요.”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철저한 남인 이혜수가 기업 행사에 동행하고, 그 손주들의 뒤처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기업에 필요한 이미지를 그려 내는 건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었다.
“은혜 작가, 쉬운 길 두고 왜 그리 힘든 길을 가려 합니까?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개관식 시간보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사측이 준비한 스케줄에 빠짐없이 동행했는데 이 남자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은 과거에도 더러 있었지만, 김 이사는 끈질긴 편에 속했다.
행사는 둘째 치고, 앞으로 이자와 사흘이나 더 봐야 한다는 사실이 비통했다. 웃으며 입안의 여린 살을 악물었다. 참는 건 자신 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생각해 봐요.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아프면 알려 줘요. 여자들은 예민할 때 많지 않나. 응? 고민 있거나 외로우면 언제든 나한테 털어놓고, 식사라도 하면서 진하게 지내보자고.”
그때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뒤를 드리웠다.
“자기야, 내가 너무 늦었어?”
낯선 호칭이었지만 서준은 앞에 있던 여자가 헷갈리지 않도록 어깨까지 두드렸다.
목소리가 하도 다정해서 의심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자, 무척 키가 큰 남자가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입만 벙긋하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뒤늦게 처음 만나는 이의 친절함을 알아차린 혜수가 얼른 팔을 안으며 매달렸다. 말을 더듬긴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미안, 비행기가 연착됐어. 근데 저 노인네는 누구야?”
서준은 자연스럽게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고, 가녀린 몸을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와중에 시선은 살기를 품고 확실하게 김 이사를 향했다.
“노, 노인네?!”
받아 본 적 없는 취급에 화를 내면서도 김 이사의 발은 자연스레 물러나고 있었다.
“관계자예요.”
혜수가 말하자 그는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인사했다. 눈빛은 변함없었다.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주제도 모르고 추파 던지는 쓰레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서준이라고 합니다.”
생긋 웃으며 살을 바르는 말을 던졌지만, 그는 서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옆에 있던 혜수에게 불똥이 튀었다.
“은혜 작가! 애인까지 전시에 동행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네만?”
“제가 김 이사님한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씀드릴 만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생활인걸요.”
또박또박한 발음에 여유 있는 미소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친절하기까지 했다. 여자의 완벽한 대처를 보고 서준은 나선 보람을 느꼈다. 싫은 소리 못하게 생겼는데 꽤 다부진 태도였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그리……!”
안경을 고쳐 올리는 주름진 손이 부들거렸지만, 혜수는 신경 쓰지 않고 천연하게 말을 빼앗았다.
“제가 좀 고민이 많고, 외로워서 제 애인이랑 놀다 올게요.”
아까 들었던 말을 곧이곧대로 돌려주며 비아냥거리자, 늙은 남자는 충격받은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다가섰다.
“뭘 제멋대로 해?! 아직 남은 일정이 있지 않은가!”
가느다란 호통에 서준은 순식간에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큰 키에 위압적인 덩치, 서늘해진 눈동자가 한마디 없이 김 이사를 찍어 내렸다. 휘청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와 기업에 필요한 인터뷰도 했고, 사진도 충분히 찍었습니다. 작품도 무사히 걸린 것 확인했으니 제 일은 다 끝냈습니다. 어차피 남은 일정은 비공식적인 관광이나 낙타 타기 정도잖아요. 그건 이 사람이랑 하겠습니다. 가요.”
활짝 웃으며 스스럼없이 처음 보는 서준의 팔짱을 끼고, 당겼다.
두 사람은 미리 약속한 듯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았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햇빛이 들어오는 복도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중정을 지나 정반대 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