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제가 여길 차지하면 다른 분들이 못 하잖아요. 카페에서 일주일에 세 번만 일해도 꽤 짭짤해요.”
“다 필요 없고, 말 나온 김에 하자. 너 카페랑 레스토랑에서도 다 잘렸다며. 집도 빼야 한다며! 언제까지 그렇게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살 건데? 반항하니?”
“정우주가 그래요?”
“누가 얘기했는지가 중요해?!”
날카로워지는 목소리에 혜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반항 아니고 슬럼프라 그래요. 근데 언니, 창고에 있던 제 그림들…… 몇 개 없어졌던데.”
“그게 왜 네 그림이야? 윤 회장님이 샀으니 윤 회장님 그림이지. 얼마 전에 중국 컬렉터한테 두 점, 하나는 대원 그룹에 팔았어.”
이혜수의 작품 40% 이상을 윤 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
윤 회장과 그 외손녀인 정은하는 혜수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림들을 싼값에 강탈하다시피 사들였다. 5호짜리 첫 작품이 25만 원이었지만, 지금 혜수의 5호짜리 그림은 열 배, 가끔 그 이상을 호가한다. 투자는 가히 성공적이었고, 앞으로 더 오를 것이다.
그들은 직접 전시회를 주최했고, 해외에 거품이 낀 비싼 값에 팔기도 했다.
심지어 미디어에 이혜수를 내보내며 몸값을 부풀렸고, 회사에 필요한 그림을 착취하기도 했다.
그토록 바라던 화가가 됐지만, 그 방식엔 제 의지는 없었다.
작품성은 제외하고 약간의 탈세와 수익 내기, 심지어 로비에까지 이용됐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팔았다는 세 점 역시 아마 그런 곳에 이용당했을 거라는 걸, 혜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아는데 전시회 끝나고 남았던 그림들도 안 보여서요.”
“그런 게 어디 남아 있어? 갖고 싶다는 사람, 필요하다는 화랑에 넘긴 지가 언젠데. 매달 네 통장으로 입금되는 월급에 그거 다 포함된 거야.”
매달 다른 금액이 입금되긴 했다. 윤 회장의 미술 과외비, 언덕의 전속 계약 및 작품 판매에서 오는 수익이라고 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보진 못했다.
“‘파도’는요?”
“……아아, 그거. 그건 내가 해외 공모전에 출품했어.”
“언니.”
혜수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뭔데, 그 훔치기라도 했다는 얼굴은? 먼지만 쌓이게 하고 썩힐 거냐?”
“제가 싫다고 했잖아요. 왜 이렇게 마음대로…….”
“야! 너 지금 네가 작가로 활동하면서 먹고살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해? 전시회 할 돈도 없고, 받아 주는 갤러리도 없는 거 거둬 줬더니 감사한 거 모르는 것도 유분수지.”
‘파도’는 혜수가 3년 전에 그린 마지막 그림이었다.
부산에서 열렸던 아트 페어에 참가하고 돌아온 날, 큰 캔버스에 연습하던 그림을 다시 작게 압축한다는 느낌으로 그려 냈다.
“그건 절대 쓰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잖아요. 언제 돌아와요?”
“글쎄.”
은하가 냉소하는 조로 무시하더니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오면 제가 가져갈게요.”
“눕기도 힘들고 습기 가득 찬 방구석에다가 두겠다고? 나대지 마라. 너, 정 못 그리겠으면 창고에서 썩고 있는 습작들 포스터나 휴대폰 케이스, 다이어리 같은 거로 상품 제작 하자. 하나같이 심플하고, 모던해서 시대 잘 탔다는 말은 누누이 듣잖아.”
“그걸 어떻게 돈 받고 팔아요?”
“후우, 재수 없어. 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잔말 마. 너 여기 외국 호텔에서 토지 매입한 이후로 월세가 얼마나 올랐는지 아냐? 우린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소속된 아티스트에게 실적과 수익을 강요하는 이 황당한 짓은 이혜수 한정이었다.
은하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과거 공장들이 늘어서 있던,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는 본격적인 재개발 궤도에 올랐다.
작은 강 하나만 건너면 교육열이 치열하고,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출신’으로 위상을 떨치는 동네였고, 위로는 휘황찬란한 한강 변의 아파트들이 그득그득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갈 곳은 끝끝내 사라지고 말거라고, 혜수는 속으로 비관적 미래를 결론지었다. 퍽 밝은 얼굴로.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언제까지? 아니면 윤 회장님 밑에 들어가서 일이나 배워. 비서라도 시키겠다고 그러시더라.”
“그런 능력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안 되는 거 되게 하는 게 우리 외할머니 특기야. 그 회사에 들어가 있는 우리 친척 중에 능력 있어서 앉아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
“언니.”
“그런 게 아니면 설 선물 패키지 배경부터 완성시켜! 언제 할 거야, 대체!”
잠깐 붓을 쥐었다고 아파 오는 무력한 손을 주무르니 우울함이 더 짙어졌다.
극한의 상황이었다.
집안의 빚 때문에 보증금을 빼야 했고, 그림은 그릴 수 없는데 모든 아르바이트마저 동시에 끊겼다. 이 비극에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미천한 재능이 금방 바닥을 드러낸 것처럼 제 인생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도 살려면, 그리기 위해 영위하고 있던 삶을 끝내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말라비틀어져 바닥을 드러내는 사이, 윤 회장과 정은하는 이혜수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판을 그려 놓았다.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 같은 건 거세당한 상황. 혜수는 평생 그들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쾅!!
갑자기 은하가 테이블을 쳐 내렸다.
“이것 봐! 이것 보라고! 내가 될 줄 알았어, 미친!”
노트북을 붙잡고 벌떡 일어났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커다래진 눈으로 흥분한 은하는 노트북 화면을 돌려 주며 영문으로 된 메일을 보여 줬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데나로(DENARO) 패션에서 주최하는 미술 재단의 시작을 함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지난번에 모로코에 새로 생긴다고 했던 미술관 기억나? 그게 데나로에서 만드는 거야. 거기서 진행하는 자선 전시회에 ‘파도’를 걸겠다잖아!!”
데나로가 뭔지도 모르고, 큰일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혜수와 달리 은하는 펄쩍펄쩍 뛰며 소리까지 질렀다.
“이참에 그냥 네가 직접 다녀와.”
“언젠데요?”
“음, 어디 보자. 내일……모, 모레네.”
그 순간만큼은 억지로 웃는 얼굴도 유지할 수 없었다. 쏙 들어가 있던 보조개가 판판하게 펴졌다.
“하아.”
“이혜수, 우리 스튜디오 홍보도 할 수 있는 기회다. 응?! 너 그냥 놀러 다녀오라는 거 아니야. 가서 외국 명품 브랜드는 어떻게 전시하는지도 보고, 모로코 미술사까지 공부하고 와.”
거창한 이유까지 들먹이는 노력에 포기했다.
우연하게 풀린 목줄,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혜수는 처음으로 허락된 도망을 받아들였다.
***
작열하는 태양이 붉은 광장을 뒤덮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하고자 적갈색의 키 낮은 건물들 위로 색색의 차양 막이나 파라솔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 나름대로 볼거리를 제공했다.
띄엄띄엄 심겨 있는 키 큰 야자수를 보고 누군가는 평화로운 여행지를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공기가 무척 건조했다.
삑― 삐익―
푸른 하늘 아래엔 소음과 매연을 유발하는 낡은 차량과 인파가 모여 소란스럽다.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있는 도로엔 제대로 된 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고 한번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전통 복장과 평범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이좋게 몰려다녔다.
철저히 신의 뜻 아래 통제되고 있었지만, 약간의 자유를 허락한 도시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라케시’, 사하라 사막으로 가는 입구로 불리는 곳. 퇴근한 강서준이 열 시간 만에 도달한 땅은 그런 곳이었다.
남색의 격식 있는 슈트 차림을 한 그가 주변을 살피며 번잡한 골목을 지났다. 넥타이까지 제대로 매고 있는, 영락없는 비즈니스맨이어서 더 눈에 띄었다.
“제레마이.”
그의 부름에 우당탕 뭔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헐레벌떡 일어난 상대방이 대답했다.
― ……어, 어. 그래. 나 여기 있어.
이어폰에 침 닦는 소리까지 적나라케 전달됐다.
서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모로코는 정오 전이지만, 뉴욕은 새벽이었다.
“처자는 걸 보아하니 지하 사무실 난방이 너무 잘되나 보군.”
― 그럴 리가. 눈이 온 뉴욕은 매우 춥고, 척박하고, 무섭고, 찝찝하고 그래. 저기 봐! 꺅! 쥐라도 나온 것 같다고! 미키 마우스 같아! 그렇지, 요한?
그는 껄껄거리며 서준을 놀렸고, 음악까지 틀었다.
“제기랄.”
― 또, 또 한국 욕 한다. 지금 어디야? GPS가 안 뜨네. 요한, 이거 제대로 되는 것 맞아?!
― 준이 켜야 작동되죠.
― 하, 여기 있는 기기들 사들이는 데만 18만 달러는 쓴 것 같아. 잘돼야 할 텐데.
“그러니까 그 18만 달러짜리 기기들로 망할 네 여동생 추적하면 됐을 것 아니야. 왜 호텔 시찰하기로 한 내가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거냐고.”
미술관 앞에 도착한 서준은 그늘진 구석에 서서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켰다. 군중들이 힐끔거리며 지나쳐 갔다. 덩치 큰 이국적인 남자는 그러고 싶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데 나오질 않잖아. 그냥 미술관도 아니고, 뜬금없이 비영리 단체랑 손을 잡고 사막 한가운데에 미술관을 짓겠다는데 오빠 된 도리로서 잘 지켜봐 줘야지. 거기다…… 오, 오하이오?
옆에 있던 요한이 한숨을 쉬며 대신 답했다.
― 오아시스 프로젝트.
― 그래, 그거! 어린아이들 돕겠다고 모든 수익을 기부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데나로(DENARO)의 악동들은 경영권과 지분을 목적으로 뒤에선 진흙탕 싸움 중이었다.
“그러니까 그 구린내 나는 일을 왜 내가 캐야 하는 거냐고.”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찝찝하긴 했다. 그런데도 속아 준 건, 뉴욕에 정말 첫눈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도망치다 보니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 역할을 맡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건네준 가방 안에는 휴대하기 용이한 5세대의 글록(Glock)과 9mm의 파라벨럼 탄약, 거버 나이프, 위성 전화에 엑스 반도까지 들어 있었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달리 전투태세가 본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