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드라마 하나를 끝낸 정우주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과한 관심과 악성 댓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심지어 호기롭게 시작한 사업들도 줄줄이 망했다. 힘들어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또 저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친구를 잃은 상실감과 모친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지금보다 더 상태가 심각했던 정우주의 과거를 떠올렸다. 모래를 삼킨 것처럼 텁텁한 죄책감이 이혜수의 속을 긁어내렸다.
밖은 아까보다 더 추웠다. 싫어하는데 성질 급한 겨울이 벌써 오려는 모양이었다. 혜수의 긴 한숨이 하늘 위로 올라가 하얗게 부유했다.
“하아.”
정말 모든 상황이 지겹고, 비참했다. 벗어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제일 짜증 났다.
먹통이 된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져 확인했다. 스피커가 좀 이상했지만, 문자 메시지는 제대로 수신됐다.
[내일 스튜디오 오지? N백화점 들러서 수리 맡긴 시계 좀 갖다주라.]
[집 언제 빼? 현금 여유 있지. 혜균이 교통사고 났어. 300만 원만 엄마 통장으로 보내 봐.]
그것마저도 반가운 것들은 아니라 전원을 꺼 버렸다.
주머니 안을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물이 적셨다. 정말 거지 같았다.
신에게 구원을 바란 적 없었다. 다만 하실 수 있다면 하루빨리 이 생명을 거둬 가 주시길 바랄 뿐이었다.
***
겨울이 오는 게 달갑지 않은 건 뉴욕에 있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리콘 앨리(Silicon Alley_로어 맨해튼과 미드타운 근처, 스타트업 회사들이 밀집된 구역을 일컬음)의 구석,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10월 말치곤 지나치게 추웠고, 흐렸다. 불길하고 서늘한 감각이 가뜩이나 잠을 못 잔 남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창가를 향해 있던 의자를 돌려 다시 노트북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 패션 쪽은 영업 이익만 24.8%. 미술관 개관에 면세 사업까지 해냈습니다. 엘리스는 올해 데나로 파운데이션에 재단까지 설립했고, ‘정통성’ 어쩌고 운운하던데……. 우리 쪽에서 지금 하는 거라곤 다 쓰러져 가는 호텔에 허허벌판만 사들이고 있죠. 당장 실적 보고가 코앞인데 저희도 눈에 보이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 어떻게 바로 보입니까? 호텔은 이제 시작인데.
― 그쪽이 보는 여자들이 하는 사업과 애초에 색이 다릅니다. 마그렌트 부동산 개발과 손잡은 지 고작 반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 성차별 발언? 선 넘네. 애초에 패션과는 가진 본질 자체가…….
점점 막장으로 치닫는 화상 회의에 남자가 미간을 문지르며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악! 내 귀!!”
소파에 누워 같은 회의를 듣고 있던 요한이 펄떡 뛰며 일어나더니 이어폰을 빼냈다.
“자는 줄 알았더니.”
“휴, 그러려고 했죠. ASMR로 적절한 회의가 아니네요. 마음에 안 든다고 소리 지르는 경영자라니.”
“세습되는 재벌 회사에선 흔한 일이지.”
“아무리 혼외 자식이라고 해도 엘리스 얘기만 나오면 너무 예민해지잖아요. 이건 뭐, 독재자도 아니고…….”
쾅!!
문이 열리고, 소리 지르며 회의를 끝낸 독재자 제레마이가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상의는 멀쩡한 슈트 차림이었지만, 하의는 반바지에 슬리퍼였다.
“준, 요한. 둘 다 들었지? 당장 한국에 사들인 부지 개발부터 착수해야겠어. 언론에 발표하고, 분양부터 시작해서…….”
“워우, 보스. 진정해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요한 말이 맞아. 네가 임의로 사들인 동네는 당장 손댄다고 해도 10년 이상 걸려. 거기다 서울은 가뜩이나 호텔 포화 상탠데, 아직 콘셉트나 브랜드화가 덜 된 상태에서 비비기엔 역부족이야. 리스크가 커.”
“당장 보여 줄 한 방이 필요하다고! 이대로 가다간 엘리스 그년한테 발리겠어.”
자존심 강하고, 불같은 성질에 잠깐 고민하던 서준이 새로운 방안을 내밀었다.
“우리한텐 모로코가 있잖아.”
“왜 하필 모로코? 스트립(Strip in Las Vegas)이나 홍콩도 아니고?”
“마침 엘리스도 모로코에 정성 들이고 있었잖아. 미술관 개관식도 있는데 업혀 가지. 준비도 다 된 마당에 오픈 시기 앞당기고, 팀 꾸려서 홍보하는 거 어려운 일 아니니까.”
위험 부담이 큰 파격적인 제안.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제레마이는 ‘업혀 간다’는 표현에 한참 고민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요한이 부추겼다.
“데나로(DENARO)로 묶여서 홍보되겠네요. 저도 찬성. 보스 말대로 당장 뭐라도 보여 주려면 모로코가 적합해요. 홍보팀에 연락해서 가오픈 행사 준비하라고 할게요. 초조해서 일 그르치지 말죠. 어차피 내년에 정권 바뀌고 세금 감면까지 받아 가면서 본격적으로 삽 뜨면 이사진들도 아무 소리 못 할 거예요.”
턱수염을 만지며 잠깐 고민하던 제레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 네가 먼저 다녀와.”
“……뭐?”
“거절할 생각 하지 마. 오늘 저녁에 첫눈 소식 있으니까.”
***
시린 아침, 사람 하나 없이 빈 새벽 거리를 단발머리 여자가 뛰었다.
“아휴, 추워라.”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크고, 노후된 건물들 가운데 2층으로 된 붉은색 벽돌 건물 앞에서 발이 멈췄다. 문 옆 기둥엔 정사각형의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언덕>
50년은 훌쩍 넘은 것 같은 철문을 위로 밀어 올리자 전자식 도어 록이 달린 유리문이 나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후다닥 들어가니 카페엔 벌써 불이 켜져 있었고, 영업 준비까지 완료된 상태였다.
“어라?”
벌써 누군가 출근한 모양이었다.
‘언덕’은 창작 및 상업 스튜디오로 작가들은 2층에 마련된 작업실을 이용하면서 스케줄을 정해 교대로 1층 카페에서 일했다.
주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판매하는 것은 물론, 파생 상품까지 만들었다. 또 카페와 일반인을 상대로 수업까지 운영하며 다양하게 수익을 추구했다.
물론 직장인이 받는 월급만큼 안정적인 금액을 기대할 수는 없어서 활동 멤버는 자주 바뀌는 편이었지만, 최근 3년 사이 고정되어 가는 추세였다. 서양화나 동양화 같은 회화는 물론이고 종이나 유리 공예, 조각, 도자까지 다양하게 아울렀다.
작업실로 올라가자 예상과 달리 컴컴한 실내에 은하가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거렸다.
“이 인간들이 어제 마감을 안 하고 간 건가?”
구시렁대며 발을 떼는데 구석에서 반복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툭, 툭.
미간을 찌푸리며 구석을 쳐다보자 소름 돋는 인영이 희미하게 보였다.
“꺄악!!”
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큰 공간에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불을 켜자마자 손으로 눈을 가린 여자가 끙 소리를 내며 인사했다.
“왔어요?”
“누구……. 이, 이혜수야?”
이혜수는 오픈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고정 멤버였고, 서양화 천재, 미대 여신, 미대 언니 등 이름도 많은 인재였다. ‘언덕’의 간판 작가이기도 했다.
“이 미친년아! 놀랐잖아! 이 시간에 불도 안 켜고 뭐 하는 거야!”
“어차피 혼자 있는데 전기세 아깝잖아요.”
황당한 대답이 어이없어 웃었다.
“네가 무슨 한석봉이냐? 전기세 너보고 내래?!”
“그냥 손만 풀었어요. 참, 시계 찾아왔어요.”
밝게 웃으며 바닥에 둔 종이 가방을 건넸지만, 엉망인 종이와 혜수의 얼굴을 번갈아 본 은하의 표정은 사뭇 날카로워졌다.
“쓰레기 만들 거면 집에서 만들고, 빨리 그림이나 그려.”
완벽한 무시에도 혜수는 순순한 얼굴로 웃고 만다.
“그만 성내요. 커피 내려 줄게요.”
쪼르르 달려 나간 자리 뒤의 종이엔 목적 없이 찍힌 점들만 남아 있었다.
이혜수는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학부 시절 ‘비늘만 보이는 것 같아도 결국 멀리서 보면 용 한 마리다.’라는 유명 비평가의 극찬까지 받았다.
과거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나 다름없었던 국내 공모전들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홍콩에서도 일찌감치 눈에 띄었다. 실력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외모까지 한몫 더해지며 ‘미대 여신’으로 선망받았다.
그런 이혜수가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않게 된 건, 3년 전부터였다. 인기와 그림값이 정점을 찍었던 때부터 이상해졌다.
정은하는 붓 자국뿐인 종이를 보고 욕을 지껄이더니 혜수를 쫓아 내려갔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을 켜고, 온라인 상품 주문 내역과 메일부터 확인했다.
손이 빠른 혜수는 금방 커피 두 잔을 내려 왔다.
“3년 내내 카페 아르바이트 하더니, 아주 바리스타가 되셨네.”
“이제 카페 경력만 해도 이력서 반은 채울 수 있어요.”
“작가가 그림은 안 그리고 커피 잘 내리는 게 자랑이냐?! 그럼 그냥 여기서 고정으로 해! 야간 아르바이트나 레스토랑에 편의점까지 섭렵하면서 얼굴 팔고, 뼈 삭히지 말고!”
빽 소리를 지르는 신경질적인 말에도 혜수는 느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씩씩하고, 밝은 표정에 정은하는 더 화가 치밀었다.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이런 여주인공 안 나오던데, 아무리 밟아도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