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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접점-1화 (프롤로그) (1/76)

[1화]

#프롤로그

손 아래에서 맥박이 제 심장처럼 선명하게 뛰고 있었고, 그걸 알아차린 눈동자가 처연하게 올려다봤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작고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한참 고민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림은 못 찾았지만, 덕분에 여기 온 거 후회 안 해요.”

“마지막 인사말 같네. 그러지 말고 다음에 봤을 때 맛있는 거 사 줘요.”

“그럼 좋을 텐데…… 우리가 또 볼 수 있을까요?”

“돌아가면 나랑 안 볼 건가?”

진심인지, 떠보는 건지 모를 질문에 혜수는 식물의 줄기처럼 뻗어 있는 혈관에 무심코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불을 지폈다.

“뉴욕이랑 한국이…… 꽤 머니까.”

그 한마디와 손짓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증발했다.

결국 욕망에 지고 있는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다정한 안광은 사라졌고, 입매는 단단하게 다물렸다. 서준은 순식간에 혜수의 귀 뒤와 턱끝을 붙잡았고, 이번엔 코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졌다.

“시작이 이러면 안 되는데.”

음습한 말에 입안은 점점 메말라 갔다.

“다음이…… 없으면요?”

다소 비관적이고, 현실적인 물음이었지만 내포된 뜻은 달랐다. 눈치 빠른 서준은 ‘당장 하자’는 말로 잘 번역해서 들었다.

“취한 건가.”

“아직 그 정도는 아녜요.”

“후회하지 말아요.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나 집착이 좀 심해요. 그쪽이 도망간다고 해도 찾아낼 거야.”

낮아진 음성에 목뒤로 소름이 돋았고, 급했다. 자연스레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시작하면 못 멈춰.”

혜수가 대답 대신 먼저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춰 왔다.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의 연한 부딪힘이었지만 확실한 도화선이었다.

#1. 도망은 사막으로

“혜수야, 터치가 좀 과한 듯싶다. 은재는 늘 가늘게, 있는 듯 없는 듯 덧칠하지 않았던.”

“네.”

제 이름이 호명되자 혜수는 이미 수백 번도 더 본 그림을 보며 영혼 없이 대답했다.

하얀 머리의 노년 여성이 그리는 풍경은 그 표정과 어울리지 않게 꽤 밝은 풍경이었다.

“뭐가 문제 같으냐.”

“……네.”

허공을 향한 멍한 눈빛과 엉뚱한 대답에 윤 회장이 붓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대뜸 머리통을 내려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혜수의 고개가 푹 쓰러졌다.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매서운 목소리에 겉으로 쌍꺼풀진 여자의 맑은 눈이 움직였다. 붉고 도톰한 입술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바르르 떨렸지만 이내 닫히고 말았다.

풍기는 분위기 역시 단아하고, 청초하나 이런 고통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제법 익숙해 보였다.

“네가 은재 대신하기로 하고 시작한 일 아니냐? 이럴 거면 다 때려치워라! 감히 누구 앞에서 그리 성의 없이 해!”

“죄송합니다.”

“쯧쯧. 하기야, 이맘때쯤 되면 나 역시 뼈부터 시리고, 마음이 먹먹하다마는. 은하 말로는 너 요새 그림도 못 그린다지.”

“……준비 중입니다.”

“그럼 설 선물 패키지 그림부터 서둘러라. 일본에 있는 장 사장 댁에 보내기로 한 그림도 깜깜무소식 아니냐.”

“죄송합니다.”

“손마저 쓸모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하, 꼴 보기 싫다. 나가 봐라!”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마에 닿는 시선이 뜨거워졌다.

혜수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맞잡고 앉자, 윤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직접 기도를 읊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도 혼자 살아남은 죄 많은 이 아이를 구원해 주소서. 부디 그림 그리는 이 손이 은총받아 죽은 이들의 몫까지 살아 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주님의 보혈로 이 아이를 씻기고 덮어 주옵소서. 아멘.”

“아멘.”

돌아서는 작은 등 뒤로 잊지 않고 말 한마디를 던졌다.

“잊지 마라. 네 목숨은 구걸받아 챙긴 목숨이야. 네가 은재 하던 거 못 하겠으면 회사라도 들어와 일해라.”

“회장님…….”

“뭘 그리 놀라? 내 딸, 내 손녀였으면 응당 당연한 것을.”

“그런 능력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제 주제를 아는 건 좋다만, 패기라도 있어야지. 죽은 이들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단 생각은 않고!”

대답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서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반항이었다.

바닥에 뒀던 점퍼를 챙기고, 고용인들에게 인사하며 재빨리 나왔다. 청송이 여러 그루 심긴 대단한 정원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왔다.

점퍼 안에 있던 휴대폰을 대문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42통, 발신인은 모두 미친 정우주였다.

― 어디야.

쇠로 긁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듣고, 찬 바람에 언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어디겠어? 수요일이잖아.”

― 아아, 다 끝났으면 나 좀 구하러 와.

“……너, 또 사고 쳤어?”

전화는 대답도 없이 끊어졌다.

구겨 신었던 운동화를 제대로 하고, 택시가 잡히지 않는 동네를 달려 내려갔다.

내부 순환로를 타고 20분 정도 달려 도착한 성수동의 주상 복합 아파트. 얼마나 뛰었는지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폐가 아팠다. 숨을 헉헉거리고 내뱉으며 택배 박스가 잔뜩 쌓여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집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정우주, 정우주!”

박스와 옷이 키만큼 쌓여 있는 복도와 정우주의 사진이 걸려 있는 거실을 지나 안방까지 정신없이 달려갔다. 욕실 앞에 벗은 옷이 떨어져 있었다.

노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분홍 머리카락의 남자가 욕조에 누워 있었다. 죽은 것처럼 창백한 얼굴과 미동조차 없는 그를 가까이서 확인한 혜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식은 어깨를 잡아 흔들자 가슴께까지 차 있던 물이 진동했다. 코끝으로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하얗게 질려 있던 그가 살며시 눈을 떴다. 젖혀져 있던 고개를 슬쩍 돌리곤 피식 웃더니 팔을 뻗었다. 물에서 나온 새하얀 팔은 마네킹의 것 같았다.

“나 어지러워.”

혀가 꼬이는지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도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신경질적인 외침에도 그는 대답 없이 실실 웃기만 했다. 혜수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기다려. 일단, 일단 신고부터…….”

정우주가 휴대폰을 빼앗더니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할부가 남아 있는 휴대폰이 퐁, 소리를 내며 잠수했다.

“구급차 부를 것 같으면 내가 왜 널 불러? 기사 나오게 하려고 작정했어? 그냥 빨리 좀 건져 봐. 추워.”

“저번에도 이러다가 숨 못 쉬어서 실려 간 거 잊었어? 설마 또 수면제랑 같이 먹었어?”

“오버하지 마. 내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욕조를 짚고 일어난 정우주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혜수가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어깨를 두고 겨우 부축했다. 젖은 솜처럼 축 처진 몸을 어찌어찌 끌어다 침대 위에 눕혔다.

“끊겠다며! 안 마시겠다며!!”

“아, 소리 지르기 전에 나 이불부터 덮어 주지? 창피하지도 않아?”

“어차피 너 작아서 보이지도 않거든?”

“……시발.”

정우주는 연신 낄낄거렸지만, 혜수는 아니었다. 기분이 더럽고, 역겨웠다.

따뜻한 물을 먹여 주고, 이불을 덮어 주자 새파랗던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끝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울해서 술을 마시고, 잘 수 없어서 수면제를 먹는 게 우주의 사이클이었다. 중독이었다. 증상이 심할 땐 혼자 허공을 보며 키득거리거나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변했고,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너 진짜…… 앞으로 네가 술에 취해서 빠져 죽든 말든 상관 안 할 거니까, 이딴 일로 사람 부르지 마.”

살면서 그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지켜지지 않는 반복되는 약속에 정우주는 늘 이혜수를 찾았다. 누군가 반드시 구해 줄 거라는 확신이 담긴 행동에 큰 의미는 없었다. 뭔가를 해도, 사랑받아도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일상의 따분함을 잠깐이나마 해소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 예민할까, 응? 회장님이 오늘도 회개시키면서 괴롭혔어?”

가라앉은 목소리에 내심 안도하고 마는 이혜수는 이 못된 습관의 오랜 희생자였다.

“너희 외할머니 기도가 부족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뿐인 손자가 이럴 수가 없지.”

혜수의 일갈에도 킥킥 웃는 꼬락서니가 여러모로 위험해 보였다.

“이제 안 마실게. 사흘 동안 잠을 못자서…… 그래서 그랬어. 마지막이야. 약속.”

“또 이러면 그땐 진짜 끝이야.”

욕조 안에 가라앉은 휴대폰을 챙기고, 우주가 잠든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이제 보니 거실 소파엔 모르는 남자가 잠든 채 누워 있었다. 바닥엔 사용한 콘돔, 용도를 알 수 없는 우표 몇 장과 술병들이 뒹굴었다.

혜수는 그것들의 정체가 뭔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질색하며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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