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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125화 (외전 완결) (125/125)

외전 5화

<루카의 일기>

나는 루카 루슬로. 나이는 열 살로, 커서 프라레스 제국을 다스릴 황제가 될 몸이다. 내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지만 내게 덤비거나 까불지만 않는다면 잘 보듬어줄 생각이다.

요즘은 나의 관심사가 많이 달라졌다. 나는 많이 컸기 때문에 더는 엄마한테 목매지 않는다. 어릴 때는 엄마 껌딱지였다고 하는데 그건 아기 때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고. 이제는 아니니까 됐지. 이 사실을 가장 반긴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제국민들에게 성군으로 추앙받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아버지를 쏙 닮았다며 축복과 칭찬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아버지는 황성 안과 밖이 전혀 다르시다.

밖에서는 알려진 대로 엄숙하면서도 인자한 황제인데 황성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내내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군다. 나도 그랬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나는 나이가 들어 졸업했지만 아버지는 어른인데도 계속 그런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한 번은 시종장님께 툴툴거렸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좀 너무한 것 같다고 했더니 그게 행복한 거라며 날 위로해줬다. 부모님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것보다야 만날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게 낫겠지? 생각해보니 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장차 성군이 되어야 할 황태자니까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지.

황제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특히 성군이 되려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동생들도 자상하게 돌봐야 한단다. 하지만 동생들을 돌보는 건 너무 힘들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들은 내가 봐주고 있다는 걸 도무지 모른다. 자기들이 원하는 게 있으면 끝까지 얻어내려고 떼를 썼다.

한번은 책을 읽어주려고 했는데 제니와 레호가 각자 고른 동화책이 달랐다.

“제니가 누나니까 누나 거 먼저 읽어줄게.”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레호가 동생이니까 동생 거 먼저 읽을까?”

“아, 싫어!”

어차피 짤막한 동화책 한 권 읽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텐데 누구 것을 먼저 읽으면 어때서 그러는지. 그런데도 제니와 레호는 목숨이 걸린 양 자존심을 세우며 으르렁댔다. 그새 5분 다 지났다, 이 녀석들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혼을 내봐야 아무런 득이 안 되니 가만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럼 선착순으로 하자. 앞으로 먼저 가져온 사람 걸 먼저 읽어줄게. 오늘은 제니가 먼저 왔으니까 제니 거부터 읽자.”

“오예!”

“칫. 알았어. 다음엔 내가 일등할 거야.”

결국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방향을 도출해내고서야 안심했다. 이래서 경쟁시스템을 차용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니까. 성군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동생들의 책을 다 읽어준 후에는 내가 읽고 싶은 책도 읽었다.

‘노랑의 모험’. 내가 고른 책의 제목이다.

노랑이라는 아이는 노란색 염색 물감이다. 노랑은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색깔이 어두침침한 곳을 노란색으로 색칠하여 아름답게 꾸민다. 자신의 흔적을 남김과 동시에 세상을 화사하게 하고 사람들의 눈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내용이다.

나는 노랑의 행보를 아주 인상 깊게 보았다. 상당히 비유적으로 표현해놓았는데, 내게는 녀석이 나아간 길이 성군이 되는 길과 닮아 보였다. 그래서 나 또한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곧장 어머니께로 달려가 결심한 것에 대해 알렸다.

“모험?”

“네. 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보려고요.”

“바깥은 어린이에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흠.”

어머니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기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황성 안에서만 돌아다닐게요.”

“호위기사와 함께하는 건 어떠니?”

“그럴게요.”

“엄마 말을 들어주어서 참 고맙구나.”

어머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의 마음도 노랑으로 물들인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가자.”

“네, 황자님.”나는 어머니와 협의한 대로 황성 안을 돌아다니기로 했기 때문에 호위는 한 명만 대동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가까운 곳을 먼저 정복하고 나서 먼 곳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황성은 엄청나게 커서 하루 만에 모험을 다 끝낼 수 있을지도 사실 미지수였다.

나는 이곳저곳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이미 익숙한 곳보다는 잘 가지 않는 낯선 곳 위주로 탐방했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황자님을 뵙습니다.”

사용인들이나 황성을 방문한 귀족들이 나를 볼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해댔기에 나중에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아다녔다. 일터에서 상사를 만나는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수풀을 헤치고 나무 사이를 걷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 호수 근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였는데 나처럼 호위기사를 한 명 대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예쁜 아이였다. 바람에 날리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거두자 드러난 새싹 같은 초록색 눈동자가 따스한 분위기까지 자아내었다. 처음 보는데…. 누구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자, 옆에 선 자가 그 아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마도 내가 누군지 알려주는 듯했다. 그 애는 깜짝 놀라더니 다급히 허리를 숙이는 모양새였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아이는 목소리까지 고왔다.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바로 이런 소리구나. 내가 입을 벌린 채 보고 있으려니 그 애는 또다시 당황하는 듯했다. 옆에 선 자가 또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해주자, 정답을 들은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닐 공작 가문의 여식 테리입니다.”

“테리 닐….”

이름을 멍하니 되새김질하다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루카 루슬로 황자다. 장차 커서 황제가 될 몸이지.”

“어머. 정말 멋있으세요.”

나는 한껏 고양된 어조로 말했다. 묻지도 않은 정보를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잘 보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주절댔는데, 테리는 어여쁘게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정말 어여쁘게 말이다.

“황성에는 어쩐 일로 온 거지?”

“아, 저희 어머니 아버지께서 아기를 만드느라 바쁘셔서 호위 분이랑 황성에 나들이를 왔어요.”

“그렇구나. 많이 바쁘시겠네.”

우리 부모님께서도 아기를 만들 때 바쁘셨지.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솟아났다.

“그런데 아기는 어떻게 만드는 거지?”

“글쎄요. 저도 그건 잘….”

나도 모르고 테리도 몰랐기에 이야기는 진전이 없었다. 얼핏 호위기사를 쳐다봤더니 주변을 경계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래. 아무쪼록 테리의 부모님께서 아기를 잘 만드셨으면 좋겠다.”

“고맙습니다 황자님.”

그 길로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어머니에게로 쪼로로 달려갔다.

“어머니.”

“루카. 무슨 일이니?”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요?”

“뭣? 풉.”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던 어머니는 입에서 찻물을 한 줄기 뿜어내었다. 뭔가 굉장히 당황하신 것 같은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그건. 그래. 시종장님께 물어보겠니? 엄마는 지금 좀 바빠서.”

“네, 알겠어요.”

별로 바빠 보이진 않았지만, 말씀대로 시종장님을 찾아갔다.

“시종장님.”

“예. 황자님.”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요?”

“쿨럭쿨럭.”

시종장님은 뭘 마시고 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사레라도 들린 건가. 겨우 기침을 멈추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황자님. 그런 건 유모한테 물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알겠어요.”

내가 등을 돌리고 떠나자 뒤에서 안도하는 듯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분명히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서 유모의 방으로 향했다.

“유모.”

“네, 황자님.”

유모는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나 물어볼 게 있는데.”

“그게 뭔가요?”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

“아기요?”

“벌써 어머니와 시종장님께 물어봤는데 답을 듣지 못했어.”

“그러셨구나. 그게 참, 설명하기가 어려운 거라….”

유모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아기를 만드는 일에 뭔가 설명하기 힘든 대단히 어려운 과정이 요구되는 걸까?

그때 한쪽 공간이 이상하게 넘실대더니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니얀 삼촌이었다.

“니얀 삼촌!”

“엇. 루카 황자님.”

삼촌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며 중얼거리더니 이내 나와 유모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아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하시다고요?”

“응 맞아.”

“그럼 구슬을 한 번 보시죠. 직접 보여드릴게요.”

니얀이 내민 구슬 안에는 다양한 남녀가 나타났다. 그들의 행동은 일관적이었는데 처음엔 서로를 노려보더니 잠시 후 입술을 붙이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머어머. 민망하여라.”

“오호. 이런 거구나.”

같이 보고 있던 유모는 자기 눈을 반쯤 가렸지만, 나는 고개를 더욱 앞으로 내밀었다.

뽀뽀를 하면 아기가 생기는 거였어.

몰랐던 사실을 깨닫자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테리한테 어서 가서 알려줘야지.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안고서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다행히 그 애는 여전히 호숫가에 있었다.

“테리.”

“루카 황자님.”

내가 허겁지겁 달려가자 테리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 아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았어.”

“정말요?”

“물론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대신 만들어줄까? 테리 부모님이 힘드실 테니까.”

“황자님은 정말 마음이 넓으세요!”

테리는 내 말에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아기는 어떻게 만드는 건데요?”

“남자랑 여자가 입술을 마주치면 된대.”

“정말요? 무척 간단하네요.”

“그렇지?”

호위들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랑 조금 떨어져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니 우리처럼 금세 친해진 모양이었다.

“어서 해봐요.”

나는 테리의 채근에 못 이겨 그녀의 양팔을 붙들었다. 맑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심장이 울렁거렸다. 아까 구슬에서 본 남녀가 왜 그렇게 서로를 째려봤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쪽.

우리는 그렇게 입술을 마주쳤다. 그 순간 따뜻한 바람이 불어 우리의 몸을 감쌌다. 떨어져 있던 호위기사 두 사람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언뜻 보인 것도 같다.

몇 초간 머물렀던 얼굴이 떨어지자 닿았던 입술에서 꽃내음이 났다. 그 애의 향기를 훔친 것 같은 기분에 순간 얼굴에 열이 올라 볼이 불긋불긋해졌다. 그런데 테리의 볼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테리가 환하게 웃었다. 나도 그 애를 따라 웃었다.

이렇게 간단한 걸 어른들은 힘들어했구나. 이제 곧 아기가 퐁 하고 생겨나겠지?

그런데 가만, 아기가 생기면 테리랑 결혼해야 하나?

제니도 니얀 삼촌이랑 결혼한댔으니까 까짓거 나도 하지 뭐.

화창한 여름이었다.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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