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니얀 아드리엔 옥희 삼촌>
육아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황후인 나는 시녀도 있고 유모도 있을 텐데 뭐가 힘드냐고?
그건 바로 아들한테 질투하는 아빠 때문에!
출산을 하고 나면 모성애가 불끈 솟는다고 했던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기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인데 자꾸만 레이몬드가 와서 훼방을 놓았다.
출산으로 인해 석 달의 회복 기간을 가지고 난 후에는 그가 또다시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기 시작했다.
“폐… 폐하.”
“임신 기간까지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아시오?”
“하지만 아직 어린 루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루카는 다른 사람한테 있을 때는 황성이 떠나가라 울다가, 내 품에 안겨 심장 소리를 들려주면 뚝 그치곤 했다.
“루카는 어째서 황후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거지?”
“원래 아기들이 그렇답니다.”
“빨리 자라야겠군.”
레이몬드가 하는 걸 보면 아빠의 피를 이어받은 것 같은데. 조금 자란다고 달라질까?
하지만 속으로 생각할 뿐 굳이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도 아들을 위해서 상당히 많이 참는 듯했다.
더 정확히는 아들을 위하는 내 말을 듣고서 많이 참았다.
루카와 있을 때면 질투가 담긴 말을 내뱉곤 했다.
“루카. 넌 에일린에게 때마다 안길 수 있어서 좋겠구나.”
“어머. 폐하. 후후후.”
그럴 때면 옆에 서 있던 유모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한번은 젖을 물리고 있을 때 넌지시 다가와 이런 말도 했다.
“후. 저것은 내 것인데.”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유모가 멀리서 손수건을 챙기고 있을 때라 듣지 못했을 것 같았다.
“폐하! 그런 낯 뜨거운 말씀은 삼가셔야…!”
“사실인데 뭘 그러오. 루카. 어서 커서 자리를 비켜주렴.”
“….”
나는 민망함에 레이몬드의 팔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모든 제국민들과 레이몬드의 염원대로 쑥쑥 자란 루카는 어느덧 여섯 살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두 번째, 세 번째 출산까지 마쳤다.
입덧이 심했던 내가 다산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에는 냉면의 힘이 컸다. 레이몬드와 황성 주방장이 입덧 시기마다 노력해준 덕분이었다. 게다가 내가 하도 냉면을 맛있게 먹는 바람에 황성 내에서 입소문이 타서 수도에 가게를 내기도 했다. 주방장의 노고를 치하하여 그의 소유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위대한 냉면….
잠시 젓가락을 쉬고 있을 때 옆에 앉은 루카가 후루룩거리며 냉면을 흡입했다. 엄마가 먹는 것을 따라 먹다가 저 어린 나이에 벌써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젓가락질을 저리도 능숙하게 하는 서양인이라니. 마치 외국인이랑 결혼해서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아이를 보는 것 같달까?
“루카. 맛있니?”
“네. 정말 맛있어요.”
그는 놀리던 젓가락질을 잠시 멈춘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카는 엄마 껌딱지였다. 그래서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하는 걸 해보려고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자기도 좋아했다.
원래는 레이몬드의 역할이었는데. 레이몬드의 자리가 어느새 아들 자리로 바뀌어있는 걸 보니 인생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것도 똑 닮은 얼굴로 말이다.
물론 신비롭고 아름다운 건 내 감상일 뿐 레이몬드는 아니었다.
제국의 일로 요즘 한창 바쁜 레이몬드는 밤이 되어서야 겨우 내게로 왔다. 아이 때문이라도 전처럼 시시때때로 불러낼 수 없어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가면 아주 조급해 보였다.
“어서 방으로 가지. 황후.”
“자… 잠시만요 폐하.”
갑자기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당황하여 버둥거리는데, 갑자기 루카가 튀어나오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아버지. 오늘은 내가 어머니랑 잘 거예요.”
“루카. 너는 엄마랑 낮에 항상 같이 있잖니. 게다가 이제는 혼자 자야 할 나이야.”
“싫어요. 만날 아버지랑만 자고. 나도 같이 자고 싶다고요!”
레이몬드와 루카는 내 손을 잡고 양쪽에서 잡아당겼다.
이거 왠지 기시감이 드는데?
날 차지하기 위해 두 남자가 싸우다니.
나는 허수아비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인가.
“저기….”
급격히 피로해졌지만 둘 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들이었기에 누구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뒤에 태어난 우리 둘째와 셋째가 얌전히 유모 품에 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셋이 같이 잘까?”
“싫소.”
“싫어요.”
독점욕은 어찌나 똑같은지…. 똑같으면 싸운다더니 두 부자는 꼭 닮아 있었다.
***
시간은 흘러 아이들은 자랐다.
루카가 열 살, 제니가 여섯 살, 레호가 다섯 살이었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면 놀아주는 게 큰일이 된다. 그것이 꼭 부모가 아니어도 된다는 점이 그나마 나와 레이몬드에게는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니얀 삼촌!”
“아드리엔 삼촌!”
아이들은 오랜만에 황성으로 놀러 온 두 사람을 격하게 반겼다. 니얀과 아드리엔이라면 체력을 걱정할 일이 전혀 없으니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하필 오는 날이 같은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기는 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놀아주는 사람이란 많을수록 좋았다.
“니얀 삼촌.”
“우리 황녀님. 잘 지냈어요?”
“응!”
니얀은 달려오는 제니에게 마법을 부려 동선을 따라 몸이 부드럽게 떠오르게 한 후 품에 안았다.
“삼촌!”
“삼촌!”
“우리 황자님들.”
아드리엔은 루카와 레호를 양팔에 한 명씩 안아 들었다.
“어서 와요.”
“오랜만입니다, 폐하.”
내가 다가가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그러네. 일주일만이면 오랜만이지.”
“일주일만이라고? 마탑은 무척이나 한가한가 보네.”
아드리엔은 니얀에게 톡 쏘듯이 말했다. 여전히 마주치면 두 사람은 경계심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보통 아드리엔이 니얀한테 그러는 거지만.
“우리 마법사들은 효율이 좋아서. 검사들처럼 몸으로 시간을 모조리 때우지 않아도 충분하거든.”
“변명은. 검사들만큼 성실하지 못한 거겠지.”
“자자. 싸우지들 마시고 어서 테이블로 가서 티타임을 즐겨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며 모두를 정원으로 이끌었다.
정원에는 이미 차와 디저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제니는 니얀의 무릎 위에, 루카와 레호는 각각 아드리엔의 옆자리에 앉았다. 삼촌들은 다 좋지만, 각자가 더 선호하는 쪽이 있었다. 특히 제니는 도통 니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있잖아요. 삼촌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걸 아까부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호가 손을 번쩍 들고서 물었다.
“둘 중에 누가 더 세요?”
“당연히 나지.”
“당연히 나지.”
꼬마의 물음에 두 어른의 입에서 동시에 대답이 터져 나왔다.
“검사가 마법사를 이길 수 있다고 보나?”
“그야 붙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자네들 왔나.”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두 사람이 또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할 즈음 때마침 나타난 레이몬드가 저들의 주목을 낚아챘다. 덕분에 끓어오르려던 분위기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레이몬드는 다른 사람들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서 니얀한테 안겨있는 딸에게로 손을 뻗었다.
“우리 제니.”
“아빠 안녕.”
하지만 제니는 시크하게 인사를 한 뒤 니얀의 목덜미를 꼭 껴안을 뿐이었다.
“…아빠 품에 오지 않을래?”
“싫어.”
“왜?”
“니얀 삼촌이 좋아. 난 삼촌이랑 결혼할 거야!”
제니의 저 말은 마치 사형선고와 같다고 할까.
물론 니얀의 사형선고 말이다.
레이몬드는 무시무시한 눈빛을 번득이더니 옆에 선 호위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움켜쥐었다.
“죽고 싶나 보군. 내 딸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마법이라도 걸었나?”
“그럴 리가요.”
“하지 마, 아빠. 우리 삼촌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제… 제니.”
충격을 받은 레이몬드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후….’
저럴 줄 알았으면 첫째부터 딸을 낳았으면 좋았을걸.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루카와 레이몬드가 나를 두고 다퉜던 시간이 떠오르자 허탈감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폐하. 아이들 앞이에요. 검은 안 돼요.”
“흥.”
레이몬드는 내가 말리자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나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딸 대신 아내인가.
하지만 도발이 효과가 있었는지 니얀의 눈에서 기이한 불꽃이 튀었다.
“못 말리는군. 어서 저 마탑주님께 좋은 신붓감을 찾아주는 수밖에 없겠어.”
“안 돼! 삼촌의 신부는 나야.”
“네. 알겠어요, 황녀님.”
아드리엔은 제니에게 어르듯이 말했다. 어차피 조금만 더 크면 늙은 삼촌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테니까. 이 시기만 잘 넘기면 될 일이었다.
나는 아드리엔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마탑주님은 이미 임자가 있는데.’
‘정말? 누군데?’
‘코아.’
“지… 진짜야?”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한 지가 언젠데. 소식이 너무 느리구만.
하긴 아드리엔도 자기의 연애와 결혼으로 바빠서 신경 쓸 틈도 없었겠지.
“옥옥옥.”
그때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또 하나의 반가운 손님이 나타났다.
“옥희야!”
동그란 두 눈을 총명하게 뜬 옥희가 저 멀리 하늘을 가르며 용맹하게 날아오더니 내게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녀석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내 팔을 살짝 쪼았다.
“옥옥.”
“아, 아니지. 미드래곤이지. 하하.”
이름을 바꿔주기로 해놓고서 입에 달라붙지 않으니. 몇 년째 반복하고 있는 레파토리였다.
“와, 옥희다!”
“옥희, 옥희.”
내가 잘못 부르는 통에 아이들 입에는 완전히 달라붙어 버렸고 말이다. 아무렴 미드래곤보다야 옥희가 발음하기도 좋고 기억하기도 쉽지.
역시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고 삼촌이고 뭐고 동물이 최고였다. 올빼미가 등장하자 우르르 몰려와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아 귀여워.”
“같이 놀자!”
“꺄아.”
아이들은 공중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옥희의 다리를 잡으려고 애썼다. 옥희는 일부러 손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놀아주었다. 그 장면을 보니 놀아주는 건지 괴롭힘을 당하는 건지 헷갈리지만….
요즘 옥희가 잘 안 오는구나 싶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