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니얀 에필로그>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건 불가항력이었다. 니얀이 태어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얻은 단 하나의 사랑, 그녀와 에일린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으니까. 솜사탕 같은 분홍빛 머리칼과 해맑게 웃는 웃음은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그녀를 떠오르게 했다. 비올라. 지금은 하늘로 가버린 그녀.비올라를 잃은 이야기는 이 프라레스 제국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사연이었다. 단 한 사람이 잘못했다는 이유로 폭군 황제가 한 마을 전체를 쓸어버렸고 그녀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제국에서는 죄없이 죽음을 맞는 이들이 많았다. 비올라를 잃은 니얀은 모든 것을 잃었다. 백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서 울고 울다가 그가 자연스레 향하게 된 곳은 네버레스트였다. 황제에게 원한이 사무친 자들이 모여드는 곳. 그는 이곳에 소속되어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워갔다.복수를 향한 마음은 생각보다 큰 도전 의식을 주었다. 또렷한 목표가 있으니 적어도 삶 전체를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니얀이 정신이 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는 미친 듯이 연구에 몰두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녀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천재 마법사인 자신이라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붙잡았다. 하지만 시간은 완전한 신의 영역. 니얀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절망했지만 끝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결국 전혀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을 살피는 중에 기이한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공간이 이지러지고 타 세계에 있던 영혼 하나가 이쪽 세계로 넘어오는 걸 목도했다. 그 영혼이 들어간 곳이 에일린 코웻이었다.
‘시간은 안 되지만 공간은 가능한 걸까.’
호기심을 느낀 니얀은 그 영혼의 모든 것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녀의 외모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비올라인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무척이나 닮았을 뿐 다른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겉모습이나마 같다는 건 니얀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에일린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마음이 끌려갔다.
‘레이몬드 루슬로 대공을 사랑하는군. 그녀의 사랑이 영혼이 이동하도록 만든 거야.’
비록 시간과 공간은 영역이 전혀 달랐지만, 공간을 뛰어넘을 만큼 강력한 염원을 가진 에일린에게 니얀은 큰 감동을 느꼈다. 자신은 해내질 못했는데 그녀는 결국 해냈으니까. 니얀이 감정을 가지게 된 건 꼭 외모 때문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리고 오래도록 지켜보다 보니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더구나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니얀은 망설임을 접고 준비에 착수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나요?”
“물론입니다.”
가까이서 보는 에일린은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의 모습을 담을 때면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분명 비올라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좋았다. 지켜보다 보니 어느덧 사랑에 빠져버린 걸까.
‘니얀’이라고 불러주는 입술이 예뻤다.
너무 빠져들지 않으려고 일부러 짓궂게 굴기도 했다.
다짜고짜 나타나 당신을 전적으로 돕겠어요, 라고 말한다면 도무지 신뢰가 어려울 테니까. 마음을 알 수 없는 능력 있는 상대는 골치가 아플 뿐이라는 걸, 니얀은 자신이 모시는 마탑주 샹달프로 인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보이려고 애썼다.
깊은 속마음은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밤하늘도 보여주고 불꽃놀이도 보여주었다.
“제가 밤하늘을 구경시켜드릴게요.”
“오늘은 불꽃쇼예요.”
레이몬드를 향한 에일린의 마음이 무려 공간을 뛰어넘을 정도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다. 나를 봐주지는 않을까. 나를 좀 봐줘.
그러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일이 생겼다.
우연히 광호를 치료해주는 에일린을 발견한 것이다.
“세상에. 방금 공녀께서 뭘 한 줄 알아요?”
“광호를 구해주고 치료해줬죠.”
그녀를 멀리서 알아볼 때는 알 수 없었던 사실이었고, 어렴풋이 낌새는 있었어도 별것 아닌 걸로 치부했었다. 하지만 마탑에서 걸어둔 저주를 손길 한 번으로 모두 없애버리는 에일린을 직접 눈으로 보자 깨달았다. 처음부터 저 육체는 그녀를 위해 예정된 자리였음을.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만난 것 또한 운명처럼 정해진 일이었음을.
니얀은 그 길로 에일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사랑의 마음을 내려놓기로 한 것이다. 주인을 향한 섬김의 마음만을 남기기로.
물론 사랑이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쉽게 포기가 되는 감정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을 그렇게 달래보기로 정했다.
***
영원히 굳어버린 것 같던 냐인의 마음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비올라에서 에일린으로 옮겨갔듯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높이 묶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검을 쥔 코아를 본 순간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마법과는 확연히 다른 계통이었다. 특히 성곽 위에서 에일린을 지키려고 검을 휘두르던 코아의 모습은 춤을 추듯이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별빛이 내린 듯 실루엣이 반짝거려 보였다.
‘다른 여인이 눈에 들어오다니 이게 무슨 일일까.’
이게 다 마음 밭을 만들어준 에일린 효과였다. 그녀를 연인으로서 포기하고 주인으로 맞이하면서 대신 얻게 된 새 인연이었다. 모든 것이 운명처럼 여겨졌다.
그 후로는 한동안 황위 찬탈을 위한 전쟁과 마탑주의 소환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호감만 가지고서 시간이 흘렀다. 프라레스 제국에 평화가 깃들고 난 후에도 곧바로 마탑주가 되는 바람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성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볼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코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쳤다.
코아가 여전히 혼자라는 사실이 기뻤다. 그럴 리가 없지만 꼭 기다려준 것만 같은 기분에 혼자 설렜다. 오랜만에 마주친 그녀를 향해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코아.”
“안녕하십니까. 마탑주님.”
코아는 니얀을 보며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녀의 성품상 그리 행동했다.
“그런 딱딱한 인사라니요. 섭섭해지려고 하는데요?”
“그런가요.”
민망해서 뒤통수를 매만지는 모습에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보았다.
“함께 차 한 잔 어떠세요?”
“좋습니다.”
니얀과 코아는 황성의 정원을 돌다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단둘이서 테이블에 둘러앉아 정식으로 마시기에는 조금 어색했기에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기로 했다. 하지만 나란히 앉은 덕에 묘한 분위기를 형성한 건 나름의 덤이었다.
“둘이서 차 마시는 거예요?”
그때 에일린이 둘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식은땀을 흘리며 엉덩이를 떨어뜨리는 두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번갈아 노려보았다.
“왠지 여기 분위기가 묘한데?”
“크흠. 알면 어서 빠져주시죠.”
“이런.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네. 알겠어요. 좋은 시간 보내요.”
니얀은 코아가 듣고 있는 걸 알고서 부러 말을 흘렸다. 그래야 자신의 마음을 부담 없이 알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오랫동안 니얀의 짝사랑을 받은 에일린은 아쉬운 것도 없는지 홀연히 가버렸다.
다행히 코아는 그런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니얀은 절로 나오는 웃음을 몰래 입에 걸었다. 아마 그녀의 마음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코아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 며칠 뒤 니얀은 에일린을 찾아갔다.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게 된 순간부터 예정된 숙제를 드디어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에일린 님. 저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아, 그러네. 니나를 만들어준 대가!”
“맞습니다.”
“니얀의 소원이 뭔데요?”
그의 방문을 반기던 에일린은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니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게 걸려있는 저주를 풀어주세요.”
“니얀한테 저주가 걸려있어요?”
에일린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
마탑주도 풀지 못하는 저주라니. 혹시 자신에게 걸려있는 건 치유가 어려운 걸까? 에일린이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니얀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강제로 맺은 맹약이라서요.”
“어떤 맹약인데요?”
“그게….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아이를요?”
설명을 듣던 에일린은 내용에 놀라 되물었다.
“고대에 존재한 드래곤 로드가 후대의 모든 마탑주에게 걸어둔 겁니다. 마탑주가 되면 걸리는 저주지요. 재능이 혈통으로 이어지는 걸 막으려는 거예요.”
“잔인하네요. 그런 맹약을 맺다니.”
“원래는 그냥 두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군요?”
“그… 그게…. 네….”
얼굴이 붉어진 니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결국 인정해버렸다. 에일린은 입술에 미소를 걸고서 알만하다며 말없이 끄덕거렸다. 얼마 전에 현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해하는데 한참이나 걸렸을 일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당연히 해줘야죠.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치유의 물로 세례를 하듯이 제 머리 위에 부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당장 하죠!”
에일린은 망설일 틈이 없다고 여기며 니얀과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으며 이렇게 저렇게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뭣들 하는 거지?”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뜨거운 욕실 안을 서늘하게 관통했다. 니얀과 에일린을 발견한 레이몬드가 오해를 하고서 발끈한 것이다.
“레이몬드. 아, 아니 폐하.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라니?”
“니얀이 몸이 아파서 제가 치유액으로 목욕을 시켜주려는 거랍니다. 치유액만 만들어주고 전 나갈 거예요. 마침 다 됐으니 같이 나가면 되겠다. 니얀, 목욕 잘해요.”
에일린은 레이몬드의 뻣뻣한 등을 욕실 밖으로 밀었다. 뒤로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에일린 님.”
니얀은 치유액으로 넘실대는 욕조 안에 옷을 입은 채로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까만 연기 같은 것이 넘실대며 피어올랐다. 저주가 치유액에 녹아 증발하는 중이었다.
‘정말 대단해.’
치유액의 효과를 몸소 체험하자 또다시 놀랐다.
‘저주가 완전히 사라졌구나.’
이로써 마탑주로 이어지던 음흉한 맹약은 영원히 없던 것으로 바뀌었다.
니얀은 욕조에 몸을 기대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