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사랑의 결실>
“두 사람 대체 왜 싸웠어요?”
“그건 몰라도 돼.”
깜짝 놀란 내가 물었지만 레이몬드는 얼른 입을 다물어버렸다.
“제국의 태양이랑 마탑의 주인이랑 싸우면 전쟁감 아닌가요?”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보며 기가 막혀서 한마디 했지만, 레이몬드는 그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니얀은 안 다쳤어요?”
“다쳤지. 내가 얼굴을 떡으로 만들어줬거든.”
“….”
레이몬드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으이그 잘 한다, 라고 했다간 삐질 게 분명하니 입을 닫기를 택했다.
니얀이야 자기가 치유마법을 써서 고치고 갔을 테니 걱정 없지 뭐.
“그나저나 나 정말로 아파.”
내 잔소리를 견디던 레이몬드는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입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언뜻 피가 맺힌 게 상처가 생기긴 했나 보다.
“치료해줄 거지?”
“알겠어요. 이리 와요.”
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위에 있던 얼굴이 아래로 불쑥 내밀어졌다. 밤마다 마주치는 입술이건만 뭐가 그리 부족해 낮에까지 불러대는지. 내 팔이 레이몬드의 목을 감자, 그의 팔이 내 허리를 둘렀다. 고개가 사선으로 비스듬해지고 두 입술이 붙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박하긴 했지만, 확실히 밤과는 다른 낮만의 맛이 있었다. 비릿한 게 피 맛 같기도 하지만.
“하아.”
혀를 굴릴 때마다 상처가 아물어가고 체향만이 남아 맴돌았다. 숨이 거칠어지며 나른한 숨을 뱉기를 반복하면서 입속에서 치유와 사랑이 오갔다.
이렇듯 레이몬드는 날이 갈수록 자꾸만 꾀병이 늘어갔다. 특히 훈련을 한 날이면 밤마다 침대에 달라붙기 일쑤였다. 그는 누워있는 내 등으로 와 허리를 감싸 안더니 자신의 몸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황후. 나 아프오.”
“폐하. 왜 아프세요?”
“훈련하다가 상대에게 얻어맞았거든.”
얻어맞았다니. 아까 구경할 때 보니까 상대가 얻어터지고 있더니만.
“아까 훈련하는 거 다 봤는데….”
“쉿.”
레이몬드는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그거 때문에 아프다는 거야. 이기려고 애쓰다가 무리했거든.”
“우왓.”
그는 내 몸을 돌려 바짝 끌어당겼다. 두 몸이 완전히 밀착하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버렸다.
“폐… 폐하.”
“오늘 밤은 잠을 재우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입술이 짙게 밀착했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반짝거렸다. 레이몬드와 나는 같은 침실 안에서 옷 시중을 받고 있었다. 부부가 된 지금은 이런 일이 일상이었다.
“오늘은 몸이 영 피로한 것 같아.”
그의 한숨 섞인 말에 나는 찔려서 어깨를 뜨끔 떨었다. 그러는 내 눈 아래도 다크서클이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머, 왜 그러실까.”
“매일 황후 폐하께서 키스로 치유해주실 텐데요. 호호호.”
이제는 제법 부드러워지고 능글맞아진 레이몬드는 시녀들과 농담 따먹기까지 했다. 나는 얼굴이 불긋불긋해진 채로 애써 그쪽을 외면하고 있었다.
“모르는 소리를. 키스보다 밤일이 더 활력을 돋게 하더군.”
“어머 어머!”
“폐하도 참.”
시녀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좋아했다. 그 시시덕거리는 모습에 나는 경악하여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떻게 부끄럽게 그런 말을!”
나는 얼른 다가가 레이몬드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는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시녀들에게 “다 나가라.”고 명령하며 고갯짓을 했다. 시녀들은 입을 막거나 고개를 숙인 채로 쿡쿡 웃으며 방에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왜 옷 입다가 나가라고….”
내 말은 끝맺어지지 못한 채 레이몬드의 입술에 의해 막혔다.
쪽.
“아무래도 아침 활력이 따로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아침 회의는 어쩌시려고요?”
“괜찮아. 조금 미루면 돼.”
그는 내 허리에 팔을 두른 채로 침대로 잡아끌었다.
우리는 숨결이 느껴질 만큼 코를 가까이 맞댔다. 나는 애써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 물론 레이몬드 역시 힘을 주고 있었기에 몸이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폐하. 밤에 그렇게 해놓고 또 하시려고요?”
“자꾸만 하고 싶은 걸 어쩌지.”
“폐하께서는 활력을 얻으시겠지만 저는 뺏겨요.”
“저런. 아무래도 사제들을 대거 초빙해야겠어. 황후가 활력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
“안 하겠다는 생각은 안 드시고요?”
“물론.”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서로의 가슴이 맞닿았다. 이윽고 거친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
그렇게 밤낮없이 뒹구는 일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건강에 뜬금없이 적신호가 찾아왔다. 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길을 걷다가 어지럽기도 하고 아랫배도 살살 아팠다. 심지어 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빙의 후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맛있는 음식들이 냄새조차도 맡기 싫어져 버렸다.
무슨 큰 병에 걸린 걸까.
다른 사람을 치료해주는 성녀가 아프다니, 대체 나는 누가 치료해준단 말인가.
몸보다 마음이 더 좌절하여 침대에 누워있을 때 황실 주치의가 찾아와 가만히 내 손목을 짚었다. 그러더니 아주 환하게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축하합니다. 회임하셨습니다.”
“…네?”
“역시 회임이셨어!”
“축하드립니다, 폐하!!”
곁에 서 있던 시녀 및 시종들이 환호성을 터트리더니 축하 인사를 건넸다. 모두의 얼굴이 환한데 어안이 벙벙해 있는 건 나뿐이었다. 레이몬드는 조금 얼떨떨해할 뿐 만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임신인 거 나 빼고 다 알고 있었던 말이야?
“여… 역시라니? 알고 있었어?”
“그럼요. 아기씨를 가지면 그런 증상들이 나타난답니다.”
“아….”
그래서 내가 심각하게 이렇게 아프다, 저래서 죽겠다 했을 때 모두 반가운 기색으로 의사만 찾아댔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나저나 임신이라니. 내가 레이몬드의 아기를 가졌어…!
나는 복숭앗빛으로 물든 두 볼을 매만졌다.
사랑의 결실로 인한 설렘과 진한 감동이 가슴으로 전해져왔다.
하지만 임신의 기쁨도 잠시, 고통스럽고 기나긴 나날이 펼쳐졌다.
“한 술이라도 뜨시지요. 폐하.”
“우욱. 도저히 못 먹겠어.”
곁에 선 시녀가 난감해하며 내게 숟가락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토기가 올라와 수프고 뭐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입을 막아야 했다.
“냉면이 너무 먹고 싶다. 훌쩍.”
임신하면 특정 음식이 당긴다고 했던가? 정말 곤란하게도 전생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갔고 말이다.
“황후.”
내가 음식을 물리고 나자, 레이몬드는 내게 다가와 손을 꼭 쥐었다.
“그대가 원하는 걸 얘기해주면 무엇이든 구해오지.”
“하지만 구할 수가 없는 것들이에요.”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면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도록 해볼게.”
내 시무룩한 대답에 그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절절히 깃들어있었다. 나는 레이몬드의 의지를 보며 힘을 내었다.
“알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써볼게요.”
고개를 당차게 끄덕이고는 종이와 펜을 건네받아 레시피를 줄줄이 써 내려 갔다.
재료조차 제대로 확보될지도 모르는 상태라 성공 여부는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기가 꼭 먹고픈 음식이었기에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면이라는 것 자체도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변방에 있는 시골 마을에 전통음식으로 면 같은 가닥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거기서 운 좋게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주방장을 시켜서 수십 번의 도전을 했다. 물론 시도는 매번 좌절되었다.
“이 맛이 아니에요.”
“여기서 좀 더 신맛이 나야 해요.”
“면이 너무 질겨요.”
그렇게 눈물겨운 사투 끝에 결국 레이몬드는 냉면과 흡사한 요리를 만들었다.
“와, 바로 이거예요. 이게 냉면이야.”
후루룩 후룩.
차갑고 신 음식은 입덧으로 답답했던 속을 달래는 데 최고였다. 결국 해내고야 말다니. 레이몬드는 잘 먹는 내 모습을 보더니 그간 고생했던 걸 싹 잊었다며 웃었다. 자신의 씨가 건강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애쓰다니 가슴이 찡했다.
심하게 고생하던 몇 주가 지나자 입덧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먹신이 강림했다. 나는 다 먹어 치울 기세로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음식을 물었다. 레이몬드는 나를 위해서 제국뿐만 아니라 이웃 왕국에서 나는 모든 과일 종류를 모아왔다. 신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입덧으로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던 시간들을 한풀이해 주기 위함이었다.
마치 걸신이 들린 것처럼 먹어댔지만 레이몬드는 내 먹는 모습을 보며 한없이 기뻐했다. 입덧 때문에 못 먹고 구역질하며 살이 쏙쏙 빠지던 게 여간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입덧하던 시간은 그토록 느리게 가더니 먹는 시간이 모자랄 만큼 잘 먹게 되자 시간은 잘도 쭉쭉 흘렀다. 그리고 어느덧 출산의 때에 다다랐다.
“응애, 응애!”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황성을 가득 메우던 날. 레이몬드는 난생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기는 분홍빛 머리칼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어여쁜 아들이었다. 몇십 년 만에 생긴 황손의 존재에 온 제국은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이름은 뭐로 지으실 거예요?”
곤히 자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로 묻자, 아기한테서 눈을 떼지 못한 레이몬드가 턱을 느른하게 쥐며 고민했다.
“흐음. 글쎄 뭐가 좋을까?”
“앞으로 황제가 될 아이니, 폐하께서 직접 지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빛을 담았다는 뜻으로 루카 어떨까?”
“루카? 루카. 좋아요. 정말 예쁜 이름이에요.”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눈도 뜨지 못한 갓난아기가 내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에 빠져있었다.
“루카. 건강하게 잘 자라렴.”
가까이 온 레이몬드와 나는 손을 꼭 쥐고서 함께 루카를 바라보았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