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에필로그 2화>
드디어 카일 차례가 왔다.
내가 시종장의 집사에게 호통을 친 덕분인지, 카일은 나를 황성으로 부르는 대신에 공작 저로 직접 찾아왔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카일이 마차에서 내리자 저택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올렸다. 나는 시종장의 집사 때와는 다르게 최선을 다해 꾸민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섰다.
도착할 때부터 그의 얼굴에는 긴가민가 하는 기색이 어려있었다. 시종장의 집사로부터 이야기를 제대로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자기가 알던 에일린이 할 만한 언행이 아니었으니 의아한 거겠지. 아무리 딱딱한 원작의 에일린이라도 황제한테 오라가라 할 인물은 아니니까 말이야.
우리는 응접실로 이동했고, 황제는 하녀의 안내에 따라 상석에 자리했다. 그는 거만한 자세로 기대어 앉으며 물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군. 잘 지냈소?”
이번에는 상냥하게 대하지 말고 할 말을 제대로 또박또박하자. 이것이 내가 굳게 결심한 바였다.
“잘 지내긴요. 납치되어 다녀왔으니 고생스러웠지요. 원래 집 떠나면 고생이잖아요?”
나는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일부러 말투와는 정반대되는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했더니 그게 충격이었는지 카일은 잠시 넋이 나갔다.
“그…렇지? 그래도 집으로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오.”
“그야 납치범이 저를 놓아줬기에 가능했지요. 납치범이 진짜 나쁜 놈이었으면 이미 이 세상 목숨이 아니지 않을까요?”
“….”
카일은 또다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입까지 헤 벌리고서 말이다. 황제를 따라와 옆에 서 있던 시종장마저도 지적할 생각을 못 하고서 입만 벌어져 있었다.
“다음에는 황성으로 초대하겠소.”
카일은 이 말만 남기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저택을 떠났다. 원래 상대방을 파악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계산하는 그인데, 예상을 한참 벗어난 나의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
“오랜만이야, 에일린.”
아드리엔이었다. 그는 첫 등장 때처럼 갑자기 찾아와 공작 저 정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면을 벗고 연기를 싹 거두어보기로 했다.
“안녕 아드리엔? 널 보니까 오랜만에 하리네 디저트가 먹고 싶은걸?”
“어…어?”
“어머니께 허락 맡고 같이 나가자.”
“그… 그럴까?”
아드리엔은 얼떨결에 내 손에 이끌려 시내로 나갔다. 하리네 디저트는 언제나처럼 심부름을 온 하녀 하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먹고 싶으니까 네가 다 사 줘.”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턱을 괸 채로 싱글벙글 웃었다. 한 번쯤은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하는 호사를 누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엔은 내 주문에 당황하더니 머뭇거리며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테이블 위에는 디저트들이 빈틈없이 올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디저트가 산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감상하고 있었다. 주변 테이블뿐만 아니라 줄을 선 사람들까지 모조리 시선을 집중했다.
“이거 다 먹을 수 있겠어?”
“남으면 싸가지 뭐.”
나는 쥐고 있던 포크를 현란하게 흔들어대며 디저트로 돌진했다. 현실이라면 아까워서 하지 못했을 일인데 꿈이라서 냉큼 저질러 본 것이다.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먹는 게 최고지!
***
내가 마지막으로 벼르고 있던 인물은 니얀이었다. 나는 현실에서 그랬듯이 클레어의 말을 듣고서 코아와 함께 점쟁이를 찾아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반기는 점쟁이는 얼굴이 망토로 설핏 가려져 있었지만, 분명히 니얀이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대화를 주도할 자신이 있었다.
“코아. 잠시만 나가서 기다려줄래?”
“네. 알겠습니다.”
코아를 밖으로 내보내자 니얀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곁에 두실 줄 알았는데. 제법 혜안이 있으시네요.”
“물론이죠. 니얀 올리버츠.”
“…!!”
내가 이름을 입에 담자, 화들짝 놀란 니얀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래졌다.
“어떻게 저의 이름을….”
“나는 빙의 자잖아요. 다 꿰뚫어 볼 수 있어요.”
어때? 네가 당하는 기분이.
나를 놀려대던 그가 당황하여 허둥대는 모습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까불지 말고 나를 모셔요.”
“제가 왜 그래야 하지요?”
꼴에 대마법사라고 자존심을 챙기려는지 니얀이 반항기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척해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왜냐면 나에게는 치유력이 있으니까요.”
“치유력이요?”
“나는 마탑에서 거는 어마어마한 저주를 다 풀 수 있답니다.”
“네?”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겠지.
그러자 의심이 많은 마법사는 확인을 위해 손을 들었다. 핏방울을 닮은 붉은빛이 내 쪽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그만 도로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니얀이 한층 더 높이 어깨를 들썩였다.
“저… 정말이군요!”
오호. 당장 확인이 된다니 그거 다행이네.
“에일린 님의 충성스러운 종이 되겠습니다.”
그가 즉시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현실에서 내가 걸음을 조심히 디뎌온 것과는 반대로,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구 했더니 이야기의 진행도 빠르고 편리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건 카일이 여전히 내 주위를 배회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실은 카일 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몬드는 말할 것도 없고 아드리엔과 니얀까지 모조리 다였다.
내가 너무 강하게 리드하는 바람에 억지로 끌려오는 걸까. 어쩌다 보니 그들을 원하는 대로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그래. 역하렘의 구축 같은걸.
나는 곧 죽어도 원앤온리의 추구자다. 오직 레이몬드 밖에 없는데 다들 왜 이래?
“폐하. 그만 좀 부르세요. 황성에 들락날락하기도 지쳐요.”
“결혼을 하면 그 수고를 덜 수 있겠군.”
“….”
대놓고 툴툴거렸는데 카일은 자존심을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번쩍이는 금발을 나부끼며 다정하게 달랬다. 그리 말하는 낯짝이 퍽이나 두꺼워 보여 하마터면 손가락으로 꾹 눌러볼 뻔했다.
“아드리엔. 그만 찾아와. 나한텐 레이몬드 뿐이라니까?”
“폐하랑 약혼할 땐 언제고 대공 전하야! 그렇게 다 가질 거면 나도 끼워 줘!”
단호하게 거절했는데도 아드리엔은 막무가내로 징징거렸다.
“나는 네가 알던 에일린이 아니야. 집착하지 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차리리 빙의했다는 사실을 대놓고 확 말해버려? 그런 충동이 일었지만, 아드리엔의 상태로 보아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니얀한테도 마찬가지였다.
“니얀.”
“네. 에일린 님.”
“밤마다 대륙여행은 왜 시켜주는 건데요?”
“세상에 그 누가 대륙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 에일린 님을 생각해서 여 호강시켜드리는 것이지요.”
니얀은 여행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찾아와 텔레포트를 이용해 대륙 곳곳으로 이동시켜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륙을 횡단하여 먼 곳을 가볼 수 있으니, 가성비로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 그건 인정한단 말이야. 그런데 왜 그걸 너랑 해야 하냐고?
레이몬드랑 함께 시켜준다면 내가 진심으로 칭찬해줄 텐데.
내 못마땅한 표정에도 그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내 속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이 네 사람은 돌아가면서 공작 저를 찾아왔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동선과 시간대가 전혀 겹치지 않았다는 거다. 오늘 카일이 낮에 부르면 다음 날 낮에 아드리엔이 오고, 오늘 밤에 레이몬드가 찾아오면 그다음 날 밤에는 니얀이 나타나는 식이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네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히 세 사람 모두와 엇비슷한 시간의 양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네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때는 저녁에서 밤으로 흐르는 어느 시점에다가 장소는 내 방 테라스였다. 카일, 레이몬드, 아드리엔, 니얀 그리고 나까지 합쳐서 이른바 오자 대면이었다.
“레이몬드. 네가 여긴 웬일이지?”
방을 통해 들어온 카일은 나와 함께 서 있는 레이몬드를 향해 경계하는 눈빛을 흘렸다.
“폐하야말로 웬일이십니까. 이런 오밤중에 영애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이닥치다니요.”
“나는 에일린이 안전이 걱정되어 왔을 뿐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폐하 아닙니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테라스 빈 공간에 바람이 일더니 니얀이 나타났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등장했다가 카일과 레이몬드를 발견하자마자 당황해했다.
“올리버츠 경. 여기는 무슨 일이지?”
“아, 저는….”
“하아. 아무나 다 찾아오는군. 여기가 무슨 광장이라도 되는가.”
레이몬드는 두 사람을 보며 대놓고 비꼬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카일이 들어오면서 열어둔 문으로 마지막 인물마저 등장한 것이다.
“에일린. 헉!”
아드리엔이었다.
네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며 잔뜩 노려보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각자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상이 완벽히 겹친다는 사실까지도.
골치가 아파진 나는 이마를 짚었으나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내 마음을 공표한다면,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겠지?
“자, 모두들 잘 들어요. 이미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알려드릴게요. 나에게는 레이몬드 뿐이에요!”
크고 당당한 선언과 동시에 레이몬드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레이몬드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고, 그와 정반대로 나머지 세 사람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에일린. 그대는 나의 것이다.”
“에일린 님. 전 포기 못 합니다.”
“에일린! 내가 너랑 가장 오랜 시간 알아 왔잖아. 이러기야?”
카일, 니얀, 아드리엔은 으르렁거리며 우리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실망하며 포기할 줄 알았는데 아니야?
그러더니 각자가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었다. 스르릉. 달빛에도 번쩍 빛나는 진짜 칼이었다.
“안 돼에에!”
나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서 레이몬드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나는 내 최애 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그런데 문득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부드러움에 기분이 좋아져 서서히 눈이 떠졌다.
조금 전까지 어둑어둑하던 배경은 어느덧 내리쬐는 빛으로 찬란히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들어온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조금 전까지 테라스에 서 있었던 나는 지금 하얀 침대보 위에 누워있었고, 내 곁에는 레이몬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나의 황후.”
그의 다정한 인사가 내 가슴을 간지럽혔다. 햇살 속에 있는 그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래. 나는 결국 황후가 되었지. 내 최애이자 사랑인 레이몬드의 옆자리로 말이야.
아무리 많은 남자에게 사랑을 받아도 기쁘지 않아. 내게 필요한 건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니까.
“레이몬드.”
꿈에서 깨어나서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우리를 향해 비추어 내리는 햇살보다 더 밝은 미소로 말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