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에필로그 1화>
후욱 후욱.
숨쉬기 답답한 느낌에 눈을 떴다. 눈을 떴지만 감고 있는 것과 매한가지로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무언가 씌워져 있구나.
손으로 빼려고 해봐도 손목이 뒤로 묶여 있었다. 이쯤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지. 뭔가 굉장한 기시감이 드는데?
당장 확인해보고 싶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맞다. 나 힘이 세잖아.
확인사살을 위해 팔에 힘을 줘보았다. 과연 끈이 툭 끊어져 힘없이 스르륵 풀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손목이 해방되자마자 나는 얼굴을 덮고 있던 복면부터 벗겨내었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건 정말로 낯익은 방 안 풍경이었다.
여기는 레이몬드의 시골 영지 저택 맞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소설 속에서 회귀라도 한 건가?
나는 막 빙의했을 때보다도 더 놀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설마 여태 했던 모든 고생이 무로 돌아간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심호흡으로 진정하려 애쓰고 있을 때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것은 레이몬드가 오는 중이다.
긴장 반, 기대 반 상태로 기다리고 있자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늠름한 자태로 안으로 들어왔다.
“어? 코웻 공녀. 어떻게 복면을 벗었지?”
그는 내 상태를 살피더니 상황부터 파악했다.
“포박이 풀어져 있군. 끈이 약하게 묶여있었던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풀어진 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당연하지. 그거 내가 힘으로 끊어낸 거니까. 하지만 연약한 귀족 가의 레이디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 의문을 풀 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레이몬드가 정작 놀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너무나도 의연한 내 태도였다. 나는 여기가 내 집인 마냥 침대 위에 편안하게 앉아있었으니까. 다리도 쭉 뻗은 채로 쭉쭉.
“저기. 코웻 공녀?”
“네?”
“내가 그대를 납치해왔는데 놀라지 않으시오?”
“아.”
너무 안방처럼 굴었나?
그러고 보니 내가 시나리오를 완전히 뭉개버리고 있었구나. 원래도 좀 그랬지만 말이다.
“그럼 제 입술이라도 훔치시렵니까?”
나는 이야기 진행을 위해 반쯤 누워서 요염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레이몬드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실례하지.”
순진한 나의 최애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 짓도 안 하고 뒤돌아 나가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내가 쏜살같이 튀어 나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그를 문 옆 벽에다가 던지며 쾅 벽치기를 했다. 레이몬드의 푸른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어 동공이 흔들거렸다.
순진한 모습이 귀엽기는.
“코…웻 공녀. 내게 왜 이러시오.”
“전하께서 저를 잡아 오셔 놓고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뇨. 제게 이런 걸 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 가져갔다. 키 차이가 있어 내가 올려다봐야 했지만, 까치 발을 들면 닿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레이몬드는 주먹을 꽉 쥐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어라? 뭐지. 다짜고짜 키스를 하려는데 이렇게 순순하다고?
혹시 레이몬드가 원래부터 에일린을 좋아한 거 아니야?
그런 합리적 의심이 솟구치자 기분이 묘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의 입술을 덮치려다 말고 쳐다만 보았다. 그러자 눈을 감고 있던 레이몬드가 도로 눈을 뜨더니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내가 뽀뽀는 하지도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노려보고 있자 그가 움찔하며 놀랐다. 그러고는 얼굴을 붉히더니 그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녀는 나를 놀렸군.”
“배고프니까 밥 주세요. 같이 먹어요.”
“그… 그러지.”
내가 막아둔 팔을 빼자, 레이몬드는 뻣뻣해진 걸음걸이로 후다닥 빠져나갔다.
***
원래도 그랬지만 더욱 적극적인 나의 행동에 레이몬드는 아주 당황해했다. 전에는 팬의 입장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꺅꺅거렸다면, 이제는 아예 처음부터 내 남자로 취급하니까 어쩔 줄을 몰라 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자연스러운 내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오는 듯했다.
그가 단체훈련을 하고 난 후였다. 훈련 도중에 작은 사고가 나서 그의 볼에 상처가 생겨버렸다. 그런데 상처가 경미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약도 바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는데, 식사시간에 발견한 나는 으레 그렇듯이 내가 치료해주려고 그를 불렀다.
“이리 가까이 와보세요. 제가 낫게 해드릴 테니까.”
“약은 되었소. 괜찮소.”
“아니야. 잘생긴 얼굴이 덧나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말해도 레이몬드가 거절하는 통에 차라리 내가 가자 싶었다. 나는 테이블 맞은편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가 그의 양 볼을 손바닥으로 꽉 붙잡았다. 나를 보며 겁먹은 푸른 눈동자에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었지만 미친 자인 줄 알까 봐 참았다. 그러고는 상처에 입술을 가까이 대며 혀로 살짝 핥았다.
“헛.”
개도 아니고, 갑자기 사람한테 핥음을 당하자 레이몬드는 움찔거렸다. 하지만 피하거나 내치지 않고 얌전히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잠시 후 상처 자국과 함께 미세한 통증까지 가시자, 레이몬드가 아주 놀라워했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낫게 해준다니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제 침에는 치유력이 있거든요.”
“침에 치유력이….”
그리 중얼거리던 레이몬드는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저기요, 뭘 생각하고 계신가요? 혹시 내 생각과 같나요?
그는 고개를 몇 번 저으며 헛기침을 하더니,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치료해줘서 고맙소. 코웻 공녀는 성녀였군.”
“고마우면 저한테 반말을 써줘요.”
“반말? 성녀께 그럴 수는 없지.”
“해주면 앞으로 전하의 전용 치료사가 되어줄게요.”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자신 있게 외쳤다.
“좋아.”
거절하던 레이몬드의 입에서 곧바로 반말이 떨어졌다.
***
날이 저물고 혼자 있는 밤이 되자,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고민해 보아야 했다.
나는 정말로 회귀를 한 걸까? 아니면 꿈이라도 꾸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있던 현실이 오늘 아침이 되자 모조리 증발해버렸으니 그 누가 황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선은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레이몬드에게 팽이 하나만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팽이?”
“네. 심심해서요.”
영혼 없는 핑계를 대면서 받은 팽이를 테이블 위에서 회전시켜보았다. 핑그르르. 그러자 팽이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기세로 돌고 또 돌았다.
오호. 과연.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이 꿈속이라는 사실을.
그런 확신과 함께 내 행동이 거칠 것이 없어짐은 물론이었다. 나는 아주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간자로 있던 카르고한테는 대놓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이 간자 놈아. 전하 옆에서 썩 꺼지지 못해!”
이렇게 행동해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레이몬드가 치유력이 있는 나를 성녀 취급했기 때문이지. 꿈속이라도 최소한의 개연성은 필요하잖아? 예지력이나 치유력이나, 사람한테 와 닿는 느낌은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 남자, 내 치유력을 알고 나서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내밀고 눈을 감는다? 그는 조금만 다쳐도 내게로 쪼륵 달려왔다. 그 모습이 꿈이나 현실이나 똑같아서 마냥 웃음이 나왔다.
나는 행복한 납치 생활을 끝맺고서 공작 저로 돌아왔다. 레이몬드가 가지 말라고 붙잡았지만 억지로 뿌리치고서 말이다. 왜냐면 내게는 원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시종장의 집사랑 조사관한테 엿을 먹이는 것이지.
황제가 사람을 보냈다는 소식에 하녀들은 절차대로 나를 힘껏 꾸미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손길을 거부하고서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 채로 그를 만나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시종장의 집사는 내 옷차림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가 말던가 나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턱 앉았다.
“오셨소.”
“예? 예. 공녀님.”
시종장의 집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 목소리까지 살짝 떨리는 걸로 보아 충격이 상당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황제의 약혼녀라 절대로 드러내놓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지. 내가 노린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는데 잘 지냈겠소? 꽃 같은 거 필요 없으니 그리 걱정되면 폐하한테 직접 오라고 고하시오.”
나는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하아. 현실에서의 나는 얼마나 공손했는가.
이렇게 꽥꽥거릴 수 있으니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거지. 이게 바로 사이다 샤워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그는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기가 죽어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보낸 조사관을 그냥 돌려보낼 순 없는지 기어코 조사관을 불러들였다. 사실 그게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조사관이 들어오자 시종장의 집사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더 이상 당황스러운 이 자리에 잠시도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로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눈동자만 굴려 조사관을 쳐다보았다. 조사관은 내 건방진 눈빛에 순간 움찔하더니 맞은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현실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공손한 태도였다.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러 왔습니다만.”
“인사는 안 하나?”
내가 대놓고 지적을 하자, 조사관이 흠칫 놀라더니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코웻 공녀님.”
“그래. 조사를 하러 왔다라. 시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낚아챘어. 그게 내가 기억하는 것의 전부야.”
“예?”
나의 성의 없는 대답에 조사관이 되물었지만, 표독스럽게 노려봐주자 그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조사관이라면 자고로 나의 동선과 납치자의 동선을 직접 파악하여 알아내야 할 것이 아닌가? 내가 납치당한 기억으로 충격을 받았는데, 그걸 어찌 다 소상히 알려주나?”
“죄… 죄송합니다.”
납치극이 일어났는데 피해자한테만 진술받고 끝내고 말이야. 조사관이 제대로 일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속에 묻어두었던 온갖 분을 조사관한테다가 풀었다.
세게 나가니까 예의 바르게 구는 모습이 강약약강 같아서 더욱 화가 치솟은 것이다. 꿈속에서나마 화풀이했더니 체증이 내려가듯이 속이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