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과연 진짜로 되는 걸까?
의구심에 사로잡혀서 기다리고 있는데, 니얀이 빛이 새어 나오는 손을 옥희의 한쪽 날개에 살짝 갖다 대더니 입을 옹알거렸다.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고 입만 움직여댔다. 옥희는 그의 말을 경청하듯이 빤히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오. 고개를 끄덕이는 건 허락한다는 뜻일까.
설명을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니얀이 살짝 몸을 돌려 옥희의 의사를 전해주었다.“하겠다고 하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두근두근.
저 귀여운 얼굴로 사람 말을 하면 얼마나 깜찍할까? 목소리는 또 어떻고?
‘에일린 님’이나 ‘코웻 공녀님’이라고 부르면 녹아들겠지? 볼따구를 마구 비비적거려줘야지. 나는 기대감으로 벅차 격한 반응을 장전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레이몬드도 나와 마찬가지로 잔뜩 고대하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니얀의 손에서는 조금 전보다 더욱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옥희의 주위를 빙글 휘감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산란하던 빛이 옥희의 몸으로 흡수되듯이 스며들었다. 녀석은 마법 기운을 받아들이듯이 눈을 감으며 기다리더니 잠시 후 눈을 번쩍 떴다. 호박색 눈동자가 순간 보석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더니 부리가 옴짝달싹했다.
우리는 언제 말하려나 녀석의 부리만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옥희의 부리가 서서히 열렸다.
“내 이름 바꿔줘.”
그것이 옥희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하지만 그 내용보다도 우리를 더욱 깜짝 놀라게 한 건 녀석의 목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굵직하고 걸걸한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모… 목소리가 이상하게 설정됐잖아요!”
이건 니얀 탓이구나 싶어서 당장 그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니얀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제가 설정한 게 아니에요. 본인이 선택한 거라고요.”
“그래. 내가 선택한 것이다.”
“…진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나와 레이몬드는 두 눈만 말똥말똥하게 떴다.
목소리도 이상하고 말투도 반말이라니?!
음.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의미가 없나? 그렇지만 레이몬드가 옥희를 키워주고 훈련한 거면 주인이니까 높임말을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옥희 네가 그 목소리를 선택한 거라고?”
“그렇다.”
“그럼 이름을 바꿔 달라니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수컷인데 이름이 이따위니까.”
“어?”
옥희가 수컷이었어?
화들짝 놀란 나는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원래부터 수컷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뻔해 보였지만 굳이 확인사살에 들어갔다.
“레이몬드는 수컷인 줄 알았어요?”
“응.”
“근데 왜 엘리자베스라고 지었어요?”
“이름이 예뻐서.”
“….”
우리 레이몬드. 은근히 엉뚱하고 지조 있구나.
그렇게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뒤로 한 채 다시 옥희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난 수컷인 줄 몰랐어.”
“이제라도 알았으니 이름을 바꿔줘.”
“뭐라고 바꿔줄까?”
“글쎄.”
옥희는 고민하는 듯 고개를 반쯤 숙이더니 다리를 끄떡거리며 바닥을 탁탁 쳤다. 원래도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던 녀석이었지만, 말하는 걸 듣고 나니 저 동작이 유난히 불량스러워 보이는 건 왜일까.
“흠. 멋있고 까리해 보이려면 아무래도 드래곤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게 좋겠지? 올빼미니까 미드래곤 어때?”
“미드래곤….”
작명 센스가 심히 K국스러워서 또 한 번 놀랐지만, 본인의 의사는 존중해주는 게 맞겠지.
“옥희 네가 좋다면….”
“미드래곤.”
“그래. 미드래곤, 네가 좋다면 그리 불러줄게.”
“좋아.”
미드래곤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생각해보니 한 가지 더 짚고 가야 할 사항이 있었다.
“그런데 미드래곤아. 혹시 넌 왜 반말을 쓰니?”
“너도 반말 쓰잖아?”
“아….”
진짜로 그런 단순한 논리였어?
나도 그렇지만 레이몬드도 저렇게 노골적인 반말을 듣는 건 부모님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카일조차도 신분에 대한 예우로 반 존대 어투를 썼으니까.
이거 참, 논리에 맞는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충격과 혼란스러움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데, 옆에서 니얀 혼자서 배를 잡고 끅끅대며 웃고 있었다.
뭐야. 이거 모든 것이 니얀의 농간 아니야?
그런 의심이 솟구치고 있을 때 레이몬드가 미드래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거 말고는 원하는 게 더 없나?”
“없습니다.”
녀석은 갑자기 공손해진 태도와 말투로 대답했다.
레이몬드한테는 높임말을 쓰네? 아, 나라서 그런 거였구나.
안심이 되는 한편 왠지 모르게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이제 됐으니 당장 원래대로 돌려놔요.”
“크큭. 알겠습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니얀은 아까 했던 동작을 그대로 다시 재현했다. 그러자 옥희에게로 스며들었던 빛이 도로 빠져나와 그의 손안에 빨려 들어갔다.
“옥옥.”
사람의 말을 빼앗긴 옥희는 귀여운 올빼미로 도로 돌아왔다.
동시에 내 마음도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조금 전의 일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물론 앞으로 옥희 대신에 미드래곤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회의장에서 빠져나온 나는 니얀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레이몬드는 멜라스의 요청으로 일을 처리하러 떠난 후였다. 옥희가 사람 말을 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니얀은 아직도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거 엄청 재밌네요.”
“재미없는데요?”
그는 한껏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놀렸다. 나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한껏 쏘아 보았고 말이다.
나의 귀여운 옥희가 양아치 올빼미가 됐는데 웃음이 나와?
“뭐 어때요. 미드래곤도 조류계에서는 황제 같은 존재라던데요. 그리 치면 높은 신분 아니겠어요?”
“그렇대요? 흐음. 그…런가.”
“큭큭큭큭. 그걸 또 듣네.”
“아, 놀리지 마요.”
나는 팔을 휘둘러 니얀의 등짝을 세 번 정도 때려주었다. 니얀은 악악거리며 신음을 뱉더니 고통 때문인지 웃음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훔치며 내게 물었다.
“또 궁금한 동물 없어요?”
“이제 없어요. 아….”
문득 생각난 존재가 하나 더 있었지만, 입을 꾹 닫았다.
“그냥 안 할래요.”
“아, 해봐요. 궁금하잖아요. 누군데요?”
할까 말까…? 사람의 호기심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히 했다며 그리 실망을 해놓고서 또다시 판도라의 상자를 향해 손을 뻗다니.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만 호기심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었다.
“말이요. 하데스랑 포세이돈.”
“아하! 걔들. 재밌겠다. 당장 가죠.”
니얀은 내 팔을 붙잡아 끌었다.
***
달빛이 태양만큼이나 찬란히 빛나는 밤.
레이몬드와 나는 황성의 정원을 함께 산책했다. 서늘한 바람이 한 차례씩 불어왔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누가 떨어뜨릴세라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테라스에서 카일과 디저트 타임을 가질 때마다 내려다보이던 황성의 정원. 이곳에서 레이몬드와 같이 걷기만을 꿈꾸었었는데 그 꿈이 오늘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
나의 신분은 폐위 황제의 약혼녀에서 현 황제의 약혼녀로 탈바꿈했다.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싶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지만, 치유력으로 인해 성녀로 추앙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세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황위와 함께 여자까지 빼앗은 레이몬드 역시 성군으로 추앙받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기 정원이 정말 예쁘죠?”
“그렇군.”
“볼 때마다 레이몬드랑 걷고 싶었어요.”
“….”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나를 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뜨거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며 햇살처럼 내리쬐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에일린.”
“네?”
“오래 참고 기다렸어.”
“….”
“이곳에 널 혼자 보낼 때마다 심장을 칼로 후비듯이 아팠거든.”
“아.”
그래. 레이몬드는 내가 카일을 만나러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가능하면 알리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고 힘들었어.”
“네? 누구를요?”
내가 천진하게 묻자 레이몬드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라간 기이한 표정이었다. 때마침 구름이 걷히며 나온 달빛에 반사되어 그의 벽안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레이몬드 루슬로는 원작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에 나오는 악역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걸까?
두려움이 깃든 몸이 잘게 떨려오는데 그제야 그가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당연히 카일이지.”
“그렇죠?”
나는 괜히 긴장했던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내 머리 위에 얹어지는 거대한 손길이 느껴졌다. 벗어나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동작이었다.
“내 것이니까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말아야지?”
“네넵. 알겠습니다.”
역시 피폐 19금 소설 속의 인물들인가? 하나같이 협박에 이리도 능통하다니. 그러나 반항하고픈 마음속과는 다르게 나는 충성을 맹세하듯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악역이 최애인 소설에 빙의했고, 그를 남주인 폭군 황제로부터 구해 내려고 고군분투했으며, 결국에는 그를 살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의 것이 되었다. 악역이 나의 님이 되었으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레이몬드의 블랙홀 같은 흑발과 푸른 바다를 닮은 벽안을 나는 너무나 사랑했다.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 그리고 전장을 호령하는 카리스마까지도 좋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나를 바라보며 짓는 그윽한 미소였다.
“에일린.”
저거 봐. 내 이름을 부르며 짓는 저 살인미소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언제까지나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원작의 주인공들을 밀어내고 결국 우리가 황제와 황후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봐도 되는 거겠지? 후후. 이제부터는 내가 19금 소설 속 주인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