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레이몬드 루슬로는 원래 제 2 황위권자였다가 군을 일으켜 혁명에 성공하여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기존 황제인 카일 루슬로는 심각한 부정부패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았고, 결국 그들의 울부짖음이 닿아 제국의 태양이 교체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그런 만큼 카일에 대한 처리에 귀추가 주목된 것은 당연했다.
“전 황제인 카일 루슬로는 나라의 살림을 성실히 돌보지 않고 백성들을 괴롭힌 대역 죄인으로 원래라면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신분의 고귀함과 더불어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실로폰으로 귀양을 보낼 것을 결정한다.”
시종장 멜라스의 공표에 광장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어떤 이들은 벌이 너무 약하다며 혀를 내둘렀고,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 반성하고 뉘우쳐야 한다며 찬성했다. 의견이 정반대로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공통적으로 레이몬드의 너그러운 인품을 칭찬했다.
레이몬드가 귀양을 결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니얀과 아멜리아 두 사람 때문이었다.
공신들을 모아놓고 포상에 관해 의논하는 자리가 마련됐는데, 거기서 아멜리아의 발언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상석에 앉은 레이몬드는 한 사람씩 둘러보면서 원하는 바를 물었다. 의견을 듣고서 반영하기 위한 그의 배려였다.
그리고 곧 아멜리아의 차례가 되었다.
“소프 남작은 원하는 것이 있소?”
“네.”
“그것이 무엇이오?”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약조해 주십시오, 폐하.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겠다고요.”
아멜리아가 뜨거운 눈빛으로 아뢰자, 멜라스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지적했다.
“소프 남작. 그건 폐하께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군.”
“죄송합니다.”
순순히 인정하며 사과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깃들어져 있었다. 레이몬드는 턱을 매만지더니 곧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리하지.”
“폐하. 성급한 약속이십니다.”
“나는 소프 남작을 믿네.”
“감사합니다. 폐하.”
아멜리아는 감사의 의미로 깎듯이 고개를 숙였다.
“제 소원은 카일을 사형에 처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형을 말아달라?”
“네.”
“폐하! 그것은 월권이 아닙니까.”
멜라스가 다시 한번 지적하며 나섰으나 레이몬드는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괜찮다. 나도 사형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렇다면 묻겠다. 사형만 아니면 상관이 없는가?”
“예. 그것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더 이상은 시종장 님의 말씀대로 월권행위니까요.”
“좋아. 그리하도록 하지.”
아멜리아와 굳게 약속한 레이몬드가 멜라스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카일의 처분에 대해 고민 중인데.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이 어떻소?”
레이몬드의 발언에 아멜리아의 안색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귀양이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반역을 도모할 수도 있을 텐데요.”
“흐음. 나도 그 점이 걸리긴 하는데.”
“그런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은 니얀이었다.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발언을 허락받자 니얀이 설명을 시작했다.
“맹세의 언약을 맺으면 됩니다. 마법으로 카일의 목에 고리를 거는 것이지요. 그리하면 금지된 행위를 할 시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 방법이 가능하다니. 어떻소, 시종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멜라스는 동의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연 마법의 힘이란 알면 알수록 신비스러웠다.
“제가 추천하는 건 일정 지역을 벗어날 시에 발동되도록 하는 겁니다.”
“좋다. 그러면 대마법사가 마법을 걸어 카일은 귀양을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소프 남작을 카일의 감시자로 보내겠다.”
남녀주인공은 결국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온 세계가 카일과 아멜리아 두 사람을 연결해주려고 몸부림치는 게 느껴졌다.
형벌이 집행되는 날. 카일이 떠나는 길을 레이몬드가 배웅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황제 자리에 있을 적의 고급스러움과 반짝임이 대부분 바래져 있었다.
“나를 요양까지 보내주다니 폐하의 성은에 감탄스럽습니다.”
카일은 진심인지 비꼬는 건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마차에 오르기 전에 레이몬드의 곁에 선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에일린. 어쩌면 그대가 선택한 자가 황제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레이몬드가 황제가 되고 나는 폐위가 된 것이지.”
그는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사랑을 받는 레이몬드가 부럽소. 잘 지내시오.”
“잘 가세요.”
나는 마지막 예를 다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일린을 정말로 좋아했나?”
그런데 레이몬드의 물음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굳이 그런 게 왜 궁금했던 걸까.
“글쎄. 저도 모르겠군요.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토끼 같은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으니까요.”
“토끼라니. 에일린은 다람쥐다.”
“다람쥐는 너무 작지 않습니까. 내 품에서 벌벌 떠는 모습이 딱 토끼 같던데.”
카일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거 완전 위험한 멘트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웃고 있는 카일을 보는 레이몬드의 눈에서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손을 허리춤으로 옮겨가더니 스스릉 하고 검을 빼 들었다.
“레…레이몬드. 진정해요!”
깜짝 놀란 내가 폐하라는 용어도 빼먹고서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벌써 이성의 끈을 놓은 후였다.
살려준다고 해놓고서 겨우 이런 일에 칼을 꺼내 드는 거야?
“어… 어서 가세요!”
나는 레이몬드를 길게 말릴 자신이 없어 카일에게 빨라 가라 손짓했다. 그러자 카일은 서둘러 마차를 타고서 떠났다.
“후. 에일린. 카일이 그간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내게 소상히 다 말해야 할 거야.”
“네…?”
그러니까 사형 말고 직접 처형을 시킬 작정이신 거죠?
나는 카일이 탄 마차의 뒤꽁무니를 힘껏 노려보았다. 내게 똥을 남기고 가다니,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원작 남주였다.
***
카일이 먼저 실로폰에 가고, 며칠 후에 아멜리아도 실로폰으로 향했다. 그녀로서도 새로운 생활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혁명 과정에서 카일은 아멜리아에게 반했다.
아멜리아는 싸움을 잘하는 걸크러쉬 타입이었는데, 결국 그녀가 열정적으로 싸우는 모습이 반하는 포인트가 되었다. 아멜리아는 그를 인질로 생포하려는 거였는데 말이다.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끼다니, 정말이지 위험한 취향이 아닐 수 없었다. 카일이 선호하는 이성 타입이 몸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결국 남주와 여주가 이루어지고야 말았구나.
카일보다 한발 앞서 그에게 반한 아멜리아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말이지.
추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경악했다. 원작의 남녀주인공은 결국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지. 다만 그 시기가 내 생각과는 달라서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그리고 나와 레이몬드는 니얀의 텔레포트를 타고 그들을 보러 가게 되었다. 도착했을 때는 때마침 두 사람이 숲길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남주 여주가 꽁냥거리는 모습은 실제로 보니 소설로 봤던 것보다 더 간지러웠다. 그리고 의외로 아멜리아가 훨씬 박력 넘치고 적극적으로 보였다.
우리가 우연히 염탐하게 된 장면은 이것이었다.
둘은 인적이 드문 길을 걷고 있었는데,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의기소침한 투로 말했다.
“나는 이제 황제가 아니라서….”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걸요.”
아멜리아가 카일의 팔을 확 붙잡아 당겼다. 카일은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끌려가 그녀의 품 안에 폭 안겼다.
“제가 함부로 할 수 있으니까요.”
“아… 아멜리아.”
아멜리아의 거친 멘트가 카일의 가슴을 후려쳤나 보다. 그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받아들이듯이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 세 사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뜻하지 않게 낯뜨거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다니. 사실은 쭉 지켜보고픈 마음이 컸지만 레이몬드와 니얀을 의식하여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작에서 두 사람의 꽁냥꽁냥의 끝판까지 본 사람이니까. 엣헴.
그나저나 원작소설과는 또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왜냐면 카일이 저렇게까지 기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카일은 자신이 내세울 것이 황제라는 자리와 미모, 이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미모는 지금도 뛰어나지만, 권력을 잃어버린 마당이니 매력이 반쯤 소실된 거지. 그래서 연인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할 자신감을 함께 잃어버린 게 아닐까.
이쯤에서 짚어보자. 원래 원작 버전이 어땠냐면,
-정치? 그대가 하자는 대로 다 하지. 마음껏 하게.
-그럼 폐하도 제 마음껏 해도 되겠습니까.
-좋고말고. 크하핫.
이런 멘트로 둘이서 밤새 뒹굴거렸으니까.
어쨌든 두 사람이 지금의 삶에 만족스러워 보이니 그걸로 됐다.
***
“그게 정말이에요?”
“네. 그 정도야 쉽죠.”
내가 깜짝 놀라자, 니얀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우리는 결혼식 혁명 때 옥희와 광호가 지원군을 몰고 온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녀석들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어떤 보상을 해줘야 할지 고민된다고 말하고 있을 때, 니얀이 직접 물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직접 물어보면 당연히 좋죠. 말이 안 통하니까 고민인 거지.”
“사람 말을 할 수 있게 만들면 되죠.”
“어떻게요?”
“마법으로요.”
“그게 된다고요?”
“저 니얀 올리버츠예요. 천재 대마법사랍니다.”니얀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진즉에 해주지 이제야 말하다니. 나는 더 지체할 것 없이 그를 독촉했다. “좋아요. 어서 해줘요!”
“먼저 저 녀석도 동의하는지 물어볼게요.”동물의 권리까지도 존중해주려는구나.
감탄하고 있을 때 니얀은 옥희에게로 척척 다가갔다. 창틀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던 옥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커다란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