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몇 달간의 내전 끝에 프라레스 제국은 새 황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내전으로 인해 황폐해진 곳들을 수습하고 나자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이 황제 즉위식이었다. 혁명이 성공한 것이라 선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때가 때인 만큼 행사를 간단히 치를 것을 종용했다. 역대 황제들 중에 가장 조촐한 즉위식 행사를 가졌으나, 위상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가 망토를 펄럭이며 붉은색 카펫 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대신관이 기다리고 있는 단상으로 당당히 나아갈 때, 주변이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음에도 새로운 황제를 맞이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모두가 숨을 죽였다.
레이몬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대신관이 그의 머리 위에 황관을 씌워주었다.
“이로써 레이몬드 루슬로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대신관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쥐 죽은 듯이 조용했던 황성 안이 함성으로 채워졌다. 황성뿐만 아니라 바깥에 모여 있던 백성들도 우렁찬 목소리로 새 황제를 환영했다.
“황제 폐하 만세!”
“경하드립니다, 폐하.”
주위에서 쏟아지는 축하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몬드는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새로운 제국의 태양이 떠오르자, 프라레스 제국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았다.
백성들은 새 황제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렜다. 루슬로 대공 가는 선 대공 때부터 평판이 좋았고, 대공 가의 영지민들은 제국의 영지들 중에서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그들의 기대에 걸맞게 낡고 부패한 제도들을 개혁해나가기 시작했다. 황가의 창고를 개방해 굶주린 자들을 굽어살피고, 귀족들이 강제로 빼앗아 갔던 백성들의 땅을 돌려주었으며, 가난하여 억울하게 갇히거나 노예가 된 자들을 해방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백성들의 염원이 일으킨 일이지요.”
멜라스는 두 손을 가슴에 얹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몬드의 오른팔로 오랜 세월 동안 보좌해온 그는 시종장으로 임명되었다.
여태 고생했으니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 쉬겠다는 멜라스의 청을 거절한 것은 레이몬드였다.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멜라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넌 시종장이다!”라고 외쳤다. 자기만 일 구덩이로 잡아넣고 어디 도망갈 생각이냐며 붙잡았다고 한다.
멜라스는 말로는 피곤하다고 하면서 입꼬리는 광대에 닿을 듯이 올라가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레이몬드가 잡아주기를 바랐던 모양이었다.
네버레스트를 비롯한 레이몬드의 부하들은 대부분이 영지로 돌아갔다. 자기의 애인이나 가족들이 그곳에 있으니 귀향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레이몬드는 아쉬운 대로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에반을 수석 보좌관에, 이든, 드류, 클로이를 보좌관에 임명했다.
수석 보좌관은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에반이 적임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든이 자신과 같은 보좌관이라는 사실에 드류는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보좌관님. 인간적으로다가 이든은 빼야 되지 않아요?”
“아, 또 그런다. 내가 무예를 못 하지 서류를 못 보냐?”
이든이 발끈하여 반박했지만, 오히려 근거만 찾아주는 꼴이 되었다.
“자주 틀리지.”
“아까도 실수했고 말이야.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지?”
“뭣? 내가 그…랬나? 하하하하.”
이든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민망한 웃음을 날렸다. 웃음으로 무마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분위기는 얼어붙고 말았다.
***
“허허허허. 오늘은 마음껏 취해보자고!”
“으하하하하.”
제트렌과 나드가 맥주잔을 높이 들고서 외쳤다.
혁명이 성공하고 난 후 나이트 워치 단원들은 매일 같이 술을 퍼마시며 자기들끼리 축제를 벌였다.
복수의 숙원을 이룬 나이트 워치는 아예 퍼먼트에 대놓고 터를 잡았다. 이전까지는 정보상으로서 어두운 지하에서만 움직였다면, 이제는 활동무대를 밝은 지상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정보상임을 드러내며 용병단과 동시에 운영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공개된 정보상이 얼마나 메리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용병으로서 마음껏 활개 치고 다닐 예정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카일을 처리해달라는 의뢰에 대한 단독 성공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계약금 10프로인 백 데나이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워했다.
***
“잘 다녀올게요!”
“부디 몸조심하렴. 나비엔.”
런 가의 후작 부인이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마차 위로 오르는 딸을 배웅했다.
나비엔은 레이몬드와의 약조에 따라 디자인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가 가고자 하는 왕국은 다행히 이번 내전과 상관이 없는 곳이었기에 안전하게 떠날 수 있었다.
레이몬드의 명령 같은 설득에 의해 후작과 후작 부인은 딸의 의사를 반강제로 지지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새 황제로 등극한 그의 전폭적인 후원과 공부에 대한 나비엔의 결연한 의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만 것이다.
“오빠. 사고 치지 말어라. 알았지?”
“너는 떠나는 마당까지 잔소리냐?”
아드리엔이 못 말린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건강히 잘 다녀와. 자주 편지하고.”
“알았어.”
만날 투덕거리는 두 남매는 손을 잡았다. 딱 3초 정도만 유지하다가 도로 떨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표현하지 않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이 묻어나왔다.
“나비엔. 열심히 공부하고 와.”
“언니. 잘 다녀올게.”
나비엔은 힘차게 손을 흔들며 마차에 올랐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머지않아 런 가는 혁명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후작에서 공작으로 직위가 상승할 예정이었다. 후에 아드리엔이 가주가 되었을 때 작위를 내려주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
위엄있게 우뚝 선 마법의 탑.
하늘을 뚫은 원통형의 탑체에 새하얀 구름이 걸려 있다. 그 꼭대기 층에서는 방 주인의 목소리가 다정스럽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니얀. 이제는 내가 자리에서 물러날까 한다.”
뒷짐을 지고 선 샹달프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의 조용한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니얀의 큰소리가 외침으로 터져 나왔다.
“탑주님. 저는 마탑을 이끌어가기에는 아직 젊습니다.”
“그리고 나는 늙었지. 이번 일을 통해서 깨달았어. 니얀 네가 옳은 뜻을 따라갈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을 말이야.”
“탑주님.”
“니얀. 네게 마탑을 맡기겠다.”
이미 결심을 마친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특히 그것이 줏대와 고집이 유난스럽다는 마법사 종족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반박 없이 가만히 있는 니얀을 보며 샹달프는 이를 긍정의 신호로 여겼다. 마지막 카운트 펀치를 날리기 위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걱정 말거라. 네가 마탑주가 되면 나는 원로 마탑주가 되어서 너를 도울 테니까 말이야.”
“그러면 지금이랑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원로가 되면 3년만 하고 은퇴해야지. 나도 골치 아픈 일들에서 벗어나 여생을 여유롭게 누리고 싶구나.”
샹달프가 회색 수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니얀이 발끈하며 항의했다.
“하. 지금 혼자만 편하게 빠져나가시겠다는 겁니까?”
“인마. 너도 30년 쌔빠지게 일해봐. 자유가 그립나, 안 그립나. 엉?”
“저는 지금도 자유가 더 좋단 말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일해야지, 놀긴 뭘 놀아?”
니얀이 기운을 끌어올리자 샹달프가 맞대응으로 함께 기를 올렸다.
구르르릉.
두 사람의 기세가 올라가자 마탑 전체에 한 차례 진동이 일었다. 그러자 아래층이 술렁거렸다.
“또 시작이네, 또.”
“저 두 사람은 입으로는 사이좋다고 하면서 만날 싸운단 말이야.”
연구에 매진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혀를 쯧쯧 차거나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한편, 나는 일을 간단히 마무리하고 나서 집에 들렀다.
“에일린!”
부모님은 내가 공작 가의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달려와 나를 껴안았다.
“많이 걱정하셨죠? 죄송해요.”
“아니다, 이렇게 건강히 돌아왔으니 되었어.”
어머니가 내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이 그간의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을 마친 우리는 응접실로 올라가 담소를 나누었다. 부모님은 그동안의 일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내가 사라지고 나자, 카일은 납치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공작 저를 완전히 포위했다고 했다. 사용인들이 물건을 사려고 오갈 때조차도 일일이 조사하며 간섭을 해대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단다. 나와 연락을 나누는지 주시했다가 꼬투리를 잡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너무 고생하셨어요.”
“그렇지 않아. 가만히 있느라 오히려 죄스러웠단다.”
성정이 바른 부모님은 애초에 카일의 편이 아니었다. 선 황제 시절에 황태자인 카일의 편에 선 것도 폭정을 반대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감시로 인해 결국 혁명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못내 속상해하셨다.
아버지는 대화 중에 주먹을 꽉 쥐더니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고 여태 감추었던 흥분을 남김없이 드러내었다.
“그나저나 두 남자의 마음을 다 훔치다니, 우리 딸의 매력이 정말로 대단하지 않소?”
“그러게나 말이에요. 결국 황후가 되고야 말겠네. 호호호.”
아버지의 칭찬에 어머니가 우아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역시 나를 닮아서 장난 아니지요?”
“뭐라는 거요. 나를 닮은 거지.”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자기를 닮았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고양되자, 나는 할 수 없이 중재에 나섰다.
“저기요. 아버지 어머니?”
“오, 그래 에일린.”
“네 생각은 어떠니?”
내가 입을 열자, 이번에는 바통이 내게로 넘겨졌다. 차라리 잘 되었다. 이때다 싶어 진실을 이야기했다.
“전 두 분 다 닮았는걸요. 제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보세요.”
“어머, 그렇지?”
“그럼 그럼. 나의 귀여운 분홍색 머리카락과 부인의 차분한 녹안을 다 닮았어.”
“내 딸 참 명철하기까지 하단 말이야. 호호호.”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부모님이 웃음을 터트리자 나도 그사이에 끼어서 같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