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깃발로 보아하니 도우러 온 왕국은 총 다섯 군데였다. 한 곳에 200명만 잡아도 최소 천 명. 수적으로 열세인 대공 세력이 밀리기에 충분한 양의 병력이었다.
이에 아멜리아는 인질로 포박한 카일을 곁으로 당겼다.
“나에게는 황제가 있다. 모두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으시지.”
하지만 황제와 왕국 사이의 거래는 카일의 안전이나 목숨 따위가 아니었다. 파병하여 대공 쪽을 치라는 게 주요한 일. 고로 인질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파도가 치듯이 밀려오는 병사들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여 허둥댔으나 그에 못지않게 카일의 낯빛 또한 좋지 않았다.
파병이라고 하나 제대로 된 합동훈련이 들어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일사불란함을 기대하기란 힘들었다. 각자 우두머리가 따로 있으니 따로 놀았다. 그러나 이미 전장에는 황제의 병력은 거의 쓰러지고 없었기 때문에 대공의 병력이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르르 쏟아지는 병사들은 적을 빠르게 간파했다. 그리고 적어도 한 사람당 다섯 명이 달라붙어 전투를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레이몬드처럼 강한 검호는 거뜬했고 대부분 실력이 뛰어나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전투에 능통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든 같이 다소 서투른 기사도 있었다. 5대 1부터가 평범한 사람은 해낼 수 없는 숫자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금세 밀려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펼쳐졌다.
‘정말 큰 일이야. 어쩌면 좋지?’
더 이상 나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포세이돈이 잘 피해 주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말의 회피력에 기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포세이돈에게서 내려와 쓰러져있는 적들을 살폈다. 혹시 내가 쓸만한 무기가 있을까 둘러보았다.
장검은 패스. 스킬이 부족한 내가 쓰면 적 대신에 나 스스로를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단검은 너무 짧아서 안 되고, 아, 저게 좋겠네! 두껍고 긴 막대기 끝에 뭉툭한 날이 달린 해머를 들었다. 나의 센 힘을 이용하면 최소한 방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슈욱.
“에일린 님.”
그때 바람이 일더니 니얀이 내 옆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조급한 감정이 새겨져 있었다.
“전장을 둘러보고 왔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많이 좋지 않나요?”
“현재로서는 잘 싸워주고 있습니다만 고작 버텨내는 정도지요. 결국은 수적 열세로 인해 체력이 먼저 떨어질 겁니다.”
오합지졸에 비해 대공 쪽은 확실히 실력이 좋았다. 하지만 니얀의 말대로 물량 공세는 답이 없었다. 초조해진 나는 레이몬드를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덤벼오는 적들을 수월하게 쓰러뜨리고 있었으나, 그만큼 적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정 안되면 제가 나서야겠습니다.”
니얀은 전장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투입된다면 제국, 왕국들, 마탑까지 뒤섞여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가 열릴 터였다. 그렇다고 대공 세력이 당하는 것을 넋 놓고 구경만 할 순 없으니 고민 천만이었다.
“그런데 에일린 님.”
“네?”
“그건 뭔가요.”
“이거요? 해머…일걸요?”
나는 뻔히 보이는 걸 그가 질문하자 자신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질문의 핵심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왜 들고 계세요?”
“제 몸은 제가 지키려고요.”
“아하.”
굉장히 위협적이네요. 니얀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니얀은 내가 힘이 센 걸 잘 모르나 본데? 휘둘러서 맞으면 엄청 아플 텐데.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담이라니 그의 성격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맑은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땅에 거대한 그늘이 지기에 비구름이라도 몰려오나 싶어 올려다보니 뜻밖의 존재들이 있었다. 하늘을 구름처럼 뒤덮은 건, 수만 마리의 새떼들이었다.
“저것은 새 아닌가요?!”
니얀이 깜짝 놀라 내게 물었다. 내 눈에도 새들로 보이니 눈이 잘못된 건 아닌 것 같고,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안이 벙벙하여 보고 있으려니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옥옥.”
“옥희야!”
이런 대낮에 올빼미를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인데? 그러고 보니 옥희가 새떼들의 선두에서 날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이름을 부르자 비행 방향을 바꿔 내 쪽으로 하강했다.
다른 녀석들도 지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옥희처럼 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용도가 아니었다. 새들은 정확히 대공 세력을 제외한 제국군과 왕국 군의 연합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대체 뭐야!”
“웬 새떼들이…. 악! 내 머리카락, 그만해!”
연합세력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거나, 정수리를 뾰족한 부리 끝으로 찌르는 공격을 당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와 니얀이 놀라 입을 떡 벌리자 옥희가 팔짱을 낀 채 가슴을 쫙 펴며 어깨를 흔들었다. 녀석은 누가 봐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으악!”
“사람 살려!”
이번에는 저쪽 먼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니얀이 양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눈에 대더니 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동물들이 난입해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어요.”
“네? 동물이요?”
뜬금없이 웬 동물?
그러나 니얀의 놀라운 답변이 이어졌다.
“네. 곰, 호랑이, 늑대에 타조, 원숭이, 사슴 등등 다양하네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예시를 들으니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새는 옥희 때문에 돕는다 치고, 동물들은 뭐지?
“아마 저 녀석이 수장 같습니다.”
“누군데요?”
“마탑에서 놓친 빛 여우네요.”
“아, 광호!”
나는 니얀의 주먹 망원경을 뺏어서 내 눈앞에다가 갖다 대었다.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기꺼이 손 망원경을 빌려주었다. 니얀의 말대로 광호가 동물들의 중심이 되어서 연합군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와. 이런 세상에!”
“아무래도 은혜를 갚는 건가 봅니다.”
니얀은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는 몰라도 싱글벙글댔다.
그래. 우리도 지원병력을 받았으니 됐지!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 같이 싱글거렸다.
“제가 작은 군사들에게 힘을 보태줘야겠습니다.”
니얀이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새들과 동물들의 몸 주위를 빛이 휘리릭 감싸더니 반짝거리다가 사라졌다.
“뭐 한 거예요?”
“버프입니다. 사람한테 썼다가 조사가 들어가면 곤란한데 새나 동물한테는 괜찮거든요. 흩어진 야생의 녀석들을 굳이 다시 모아 조사를 하긴 힘들 테니까요. 참 적당한 군사들이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주었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변화가 일어났다. 버프가 들어간 귀여운 지원군들의 모습이 무시무시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들은 몸집이 커지고 부리가 한층 뾰족해졌으며 동물들은 덩치 큰 근육질로 변하며 이빨이 거대해지고 날카로워졌다. 동물이 아닌 흡사 공룡 같았다.
변화는 생김새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번 쪼아야 겨우 먹히던 새의 공격은 한 번만으로도 정수리에서 피가 터졌다. 늑대가 달려가 깨물면 적이 한 방에 기절하고는 했다. 무서운 외모만큼이나 대단한 힘을 보유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나에게는 희망의 꿈이었고 저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 결은 전혀 달랐지만, 하여튼 꿈은 꿈이다.
‘옥희가 이 결혼식 혁명의 영웅이로구나.’
나는 그야말로 감격 속에 푹 빠졌다. 이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키다니 나야말로 큰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입을 헤 벌린 채로 앞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전장을 구경하느라 어느새 등 뒤로 부쩍 가까워진 시종장 켈른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이야압!” 기합을 넣으며 달려오는 걸 몇 걸음 남기고서야 깨달았으니 말이다.
버프를 주느라 신이 나 있던 니얀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켈른이 휘두르는 둔기에 맞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그때 어떤 신형이 켈른과 나 사이로 뛰어들었다.
“에일린 님. 위험해요!”
그렇게 외치며 나선 건 디엘 리빙스턴이었다. 디엘은 나 대신에 켈른의 둔기에 맞아 옆으로 쓰러졌다.
“헉. 디엘.”
“이런. 젠장! 여기서 방해하다니.”
시종장은 잔뜩 독이 오른 모습이었다. 갓 시종장이 되어 드디어 권력을 손에 넣은 그는, 카일의 제국이 유지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일 것이다. 분명히 카일 본인보다도 더 그랬다. 왜냐면 카일은 이미 아멜리아에게 반쯤 넋이 나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감히 에일린 님을 노려?”
분노에 찬 니얀이 뒤돌아서며 빛을 뿌렸다. 빛은 마치 덩굴처럼 켈른의 몸을 어깨부터 다리까지 돌돌 휘감아 압박했다.
“크악.”
온몸이 바짝 조여든 켈른이 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니얀은 힘을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의 눈은 반쯤 미쳐있었다.
“니얀. 그만 해요!”
나는 소리쳐서 그를 말렸다. 나의 목숨을 노린 켈른이 죽든가 말든가 상관없었지만, 차기 마탑주인 니얀이 사람을 죽이게 되면 곤란해질 테니까. 다행히도 내 외침이 귀에 닿았는지 니얀이 그 순간 힘을 풀었다. 켈른은 압박을 받았던 고통 때문에 빛줄기에서 풀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디엘의 상태를 확인했다. 켈른이 휘두른 무기가 검이 아니길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타박상으로 인해 시커먼 멍이 들었을 뿐 심각한 상처는 없었다. 나는 니얀의 도움을 받아 치유액을 만들어 그의 어깨에다가 부어주었다. 그러자 시간이 역행하듯이 상처가 사르르 회복되었다.
“이 장면은 언제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니얀은 치료장면을 빤히 지켜보다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고통에 끙끙대다가 고통이 가시자 디엘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치료가 끝나자 나는 디엘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디엘. 고마워요. 나를 구하려고 뛰어들다니.”
“아닙니다. 전에 에일린 님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디엘의 새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니얀은 그 장면을 팔짱을 낀 채로 못마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