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레… 레이몬드!”
내가 부딪힌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이몬드였다.
꿈에서도 그리웠던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되자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내가 그냥 두지 않는다고 했지?”
그는 감격에 젖은 나를 보며 믿음직한 미소를 흘렸다. 이런 소란한 와중에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를 넋 놓고 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서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여기 오면 안 돼요. 제가 옥희를 통해서 말씀드렸잖아요. 결혼식을 빙자한 함정이라고요!”
카일은 레이몬드가 세력을 이끌고 나타날 것을 예상했다. 오히려 이날까지 버틴 걸 신기해했으니까. 나와 레이몬드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했던 이유가 레이몬드를 도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으니 당연했다. 버젓이 파둔 함정에 나타난 그가 얼마나 반가울까.
“아니.”
그러나 레이몬드는 내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의 경고마저 무시하고 나타났으니 말 한두 마디를 더 얹는다고 해서 꺾일 의지가 아니었다.
“함정은 벌써 부수었어.”
“네?”
“모두 처리하고 오는 길이지.”
레이몬드는 결혼식장 반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쪽을 돌아보자 레이몬드의 부하들이 매복해있던 제국군을 모두 색출해내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준비는 카일 쪽에서만 하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난 말이야.”
레이몬드는 한쪽 팔로 나를 품 안에 끌어당기며 다른 쪽 팔로 칼을 뽑아내었다. 의도치 않게 확인한 단단한 가슴팍이 넓고 설레었다.
“그대의 희생 위에 올려진 평화는 원치 않아.”
레이몬드의 멘트에 그만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얼마나 그리웠던 품이던가. 나는 그간 힘겹고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결심을 집어던지고서 두 팔로 레이몬드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내 감정을 가두며 덮어둔 허울이 와장창 깨어지면서 가슴이 뻥 뚫린 듯이 시원해졌다.
그런데 위쪽에서부터 감동이 무너지는 신음이 들렸다.
“윽. 에…일린.”
“네?”
“숨이 막히는걸. 살살 안아줘.”
“앗. 미안해요.”
감정이 격해져 그만 온 힘을 다했나 보다. 깜짝 놀란 내가 얼른 팔을 풀자, 그가 내 팔을 도로 자기 허리에다가 감았다. 나는 코알라처럼 그에게 파묻힌 채로 물었다.
“레이몬드. 저희 부모님은요?”
“미리 안전한 곳에 모셔다 두었지. 아까 데려간 기사들이 우리 편이야.”
어쩐지 안면 있는 얼굴들이다, 싶었다. 부모님의 안전을 먼저 확보하여 움직임에 제약이 없도록 한 거였다니, 그 치밀한 수에 감탄했다.
“에일린.”
“네?”
레이몬드가 진지한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는 흔들림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의 행사는 황제의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식 혁명으로 명명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돌아갈 거다.”
그가 단단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래 기다렸고 간절히 바랐으며 그랬기에 눈물이 핑 돌만큼 감격스러웠다. 레이몬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손이 주먹을 꾹 쥐었다. ‘나의 최애,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의 소리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주위가 또 한 번 소란해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단체로 외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코웻 공녀님!”
“에일린 님!”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품에서 나와 고개를 돌려보니 대공의 부하들, 즉 멜라스를 비롯한 에반, 소설 멤버인 이든, 드류, 클로이와 공장에서 알게 된 닉스 그리고 네비레스트의 온과 판, 그 외 낯익은 자들까지 모조리 나를 향해 외쳐대고 있었다.
“모두들. 어째서 여기에 온 거야!”
다급한 마음에 목이 찢어지라 외쳤지만, 그들은 면면에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를 보아 반가운 기색이었다.
“다 함께 돌아가요!”
“우린 한 식구잖아요. 대공 비가 되셔야 해요!”
“공녀님은 나의 은인이시라고요!”
“모두들….”
나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동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만치에는 아드리엔과 나비엔, 런 가의 기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특히 아드리엔은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에일린! 나 아드리엔 왔어!”
“얼른 싸우기나 해.”
오라버니가 손을 흔드느라 미처 막지 못한 공격을 쳐내던 나비엔은, 결국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뒤에는 나이트 워치의 모습도 보였다. 때마침 카일의 명령에 따라 병력이 정원 쪽으로 투입되고 있었는데, 제트렌과 나드, 그리고 부하들이 철퇴를 들고 우악스럽게 그들을 내리쳤다.
“이얏호!”
“매운맛 좀 봐라, 이놈들!”
얼굴에 만연히 웃음을 띠고 있는 걸로 보아, 그동안 정보상으로 지내느라 절제하며 참았던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았다. 드디어 숙원사업을 이룩할 기회를 맞아 신이 난 듯했다.
아군 세력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 레이몬드가 내게 낮은 목소리로 넌지시 알렸다.
“에일린. 대마법사와 함께 있어. 잠시 싸우고 올 테니까.”
“네? 니얀이요?”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으려니 옆에서 친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에일린 님.”
“니얀!”
마지막으로 반가운 얼굴이 바로 옆에서 나타났다. 그가 마탑주의 명령으로 강제귀환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 들었었는데, 그래서 더욱 기쁜 마음이 일었다.
“마탑에서 풀려난 거예요?”
“네. 겨우 딱 맞춰올 수 있었네요.”
니얀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손을 위로 서서히 들어 올렸다.
“저는 오늘 황성 소속의 마법사나 차기 마탑주가 아닌, 나이트 워치의 멤버로서 참여한 겁니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저쪽에서 싸우고 있던 한 무리의 제국군들의 검이 돌연 뿅망치로 바뀌었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던 제국군은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직접 공격은 안 되지만 이 정도 꼼수는 가능하답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던 니얀은 문득 고개를 들더니 전장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 저쪽에서 아군 하나가 오고 있군요.”
“네? 어, 포세이돈!”
황제가 나에게 선물해준 말이었다. 녀석은 전장 사이사이를 누비며 곧장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곧 도착한 녀석은 고개를 높이 쳐들며 “히이잉.”하고 부르짖었다.
“포세이돈. 여기는 왜 왔어?”
“히잉.”
“녀석이 에일린 님을 따라가고 싶다는군요. 떠나려는 걸 알고서 쫓아온 모양입니다.”
“그랬구나. 그래! 너도 나랑 같이 가자.”
내가 갈기를 쓰다듬어 주자 포세이돈이 기분 좋은 듯이 고개를 휘적거렸다.
“그럼 이 녀석을 타고 피해 계십시오. 저도 조금 움직이다가 오겠습니다.”
“알겠어요, 니얀.”
“그럼.”
니얀은 내가 말에 올라타는 걸 보자마자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나를 태운 포세이돈은 적군과 아군이 뒤섞인 전투현장에서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쫓아오는 자가 있으면 따돌리기도 하고, 공격해오는 적을 뒷발 차기로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포세이돈의 목을 꼭 둘러안은 채로 잘한다, 잘한다, 응원만 열심히 보냈다.
잠시 후, 아멜리아가 황성의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로 그녀를 따르는 카고미슬 단원들이 몇몇 보였다. 아멜리아는 나를 결혼식 준비만 시키고서 카일에 의해 도로 방에 갇혀 있었는데 그걸 단원들이 풀어준 모양이었다.전장에서 싸우고 있던 카고미슬은 아멜리아가 나타나자 그쪽으로 하나둘씩 몰려갔다.
“전군 카고미슬은 나를 따르라!”
“와아아!!”
검을 치켜든 그녀가 우렁차게 외치자 카고미슬의 커다란 함성이 대기를 울렸다. 덩달아 아군들의 사기도 바짝 올라갔다. 과연 여자주인공다운 카리스마였다.
아멜리아와 카고미슬의 목적은 분명했다. 그들의 위치는 점차 카일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재 열세에 시달리고 있는 황제군은 황제를 방치한 채 적들을 상대하느라 쩔쩔매는 중이었다. 고로 카일의 곁에는 최소한의 호위만 있었다.
아멜리아는 황제를 인질로 삼으려는 게 분명했다. 자신의 부하들은 주변의 제국군들을 상대하게 하고서 그녀 혼자 카일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황제의 호위 두 명이 튀어 나가 그녀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검날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칼이 맞서는 소리가 사방으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아멜리아는 두 명의 황실특임대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특임대 쪽에서는 황제를 지켜야 하기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아멜리아의 솜씨가 발군이었다.
특히나 칼손잡이를 잡고서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리는 스킬이 일품이었다. 그 위력과 속도에 적들이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아멜리아가 품에서 꺼낸 단검을 차례대로 급소에 찔러넣었다.
“으윽.”
그렇게 두 명을 빠르게 처리하고 난 그녀는 황제에게로 걸어갔다. 아멜리아의 시선이 카일을 흔들림 없이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에 카일의 표정이 보였다. 그는 아멜리아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있었다. 그런데 전장 한가운데에서, 그것도 인질로 잡힐 위기에 놓인 자가 지을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반쯤 벌어진 입과 상기된 볼, 침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놀라움에 굳어버린 턱. 저것은 분명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
카일의 표정을 발견한 자들은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나는 카일이 저러는 이유를 안다. 바로 지금 순간, 남주와 여주의 운명이 발동한 것이다.
운명이 이제야 오다니…!
드디어 기다리고 고대하던 순간이 왔건만 답답한 마음이 먼저 동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인질이 된 카일은 아멜리아에게 두 손목을 결박당하면서도 볼이 발그레했다.
누가 보면 잡아가는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겠네.
“걱정 마시오. 우리가 왔으니까.”
그때, 수많은 말발굽 소리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으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진짜 위기가 닥쳐왔다.
이곳 황성의 정원에 다른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해버리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