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하아.”
나는 이불 속으로 스며들도록 깊은 한숨을 내었다. 그러나 최고급 원단은 이를 비웃듯이 습기를 차단했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값비싼 액세서리, 좋은 이부자리 등등….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여인이 꿈꾸는 예비 황후의 자리가 나에게만큼은 지옥처럼 느껴졌다. 아멜리아는 자신 역시 카일의 옆자리를 원하는 여인 중 하나임에도 나를 위로했다.
“내가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공녀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고개를 든 나는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붉은 머리칼이 탐스럽게 일렁거렸다. 또렷한 호박색의 눈동자는 총기를 띠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눈앞에 두고서 깨닫지를 못하다니, 바보 같은 황제 놈….
“이 자리가 나 말고 아멜리아의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네?! 설마요. 아니에요.”
아멜리아는 내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 역시 여주로서 남주에게 운명과 끌림을 느끼는 중일 테니까. 그럼에도 나를 생각해서 손사래를 쳤다.
“공녀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또 기회가 생길 거예요. 절망하지 말아요.”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받아들여야겠지.”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까.
“제가 예비 황후 폐하의 결혼식을 준비할게요.”
아멜리아는 팔을 걷어붙이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씁쓸함을 자아내었다.
원래는 자신의 자리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녀나 나나 안타까운 처지였다.
결혼식은 빠르게 준비되어갔다. 황제는 당장 날짜를 잡고 온 제국에 이를 발표했다. 내전 중에 치르는 결혼식이라 이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결혼을 하고 안정되면 황제가 나아질 거라고 낙관했다.
예식장과 나를 꾸미는 것에는 아멜리아가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이 또한 카일에게 묻고 쉽게 허락을 받아낸 것이었다. 그녀마저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더라면, 어느 날 갑자기 뛰쳐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카일과 아멜리아가 종종 마주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운명의 그 날이 오기를. 어서 인연이 발동하여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기를. 원작소설을 알기에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다. 다만 그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을 뿐이었다.
레이몬드, 나의 최애를 위해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어냈다.
하지만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건 불가항력인 일이었다. 내 상황에 대한 비참함보다 그를 보지 못하는 슬픔 때문이었다.
“에일린.”
이날도 어김없이 훌쩍이는 밤, 황제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대. 우는가?”
소파에 기댄 채 슬픔을 삭이고 있을 때 카일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불을 켜지 않아 어스름한 중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폐하.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카일이 내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내 옆자리에 앉더니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내 눈물을 훔쳤다.
구슬같이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또르륵 굴렀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장본인은 아니나 다를까 나를 위로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내 눈물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혀로 날름 핥아 내었다.
“오호. 이럴 수가.”
카일의 눈이 커졌다. 눈동자에는 이채가 어려 놀라움이 새겨졌다.
“그대의 감정이 응축된 눈물은 효과가 더 뛰어나군. 개안한 느낌이야. 시야가 뚜렷해졌어.”
그는 효과가 뛰어난 약을 복용한 사람처럼 감탄했다. 그 사실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게 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네 존재가 내게 도움이 되니 너는 기뻐해야 한다. 그것이 카일의 이기성이었다.
그저 난 치료제의 의미일 뿐이구나. 그래. 저게 저자의 본성이지.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치를 떨어야 했다.
“결혼식 때 그대에게 줄 선물이 있소.”
턱을 괸 카일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갑자기 선물이라니, 전혀 궁금하지도, 기대되지도 않았는데 그의 말이 허락 없이 이어졌다.
“반란군 수장의 목.”
“!!”
화들짝 놀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떨리는 몸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떨리는 눈동자까지는 감출 수 없었는지 카일은 내 표정 변화를 보며 흥미로워했다.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함정을 파두었지. 당연히 에일린을 구하려고 오겠지? 내가 악의 무리들로부터 지켜주겠소. 그러니 그대는 아무 걱정 마시오.”
잔인한 말을 내뱉은 카일이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그 말에는 광기마저 깃들어있었다. 악의 무리라니. 남을 깔아뭉개면서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역겨웠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안쪽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황제가 돌아가자마자 몰래 옥희를 불러냈다. 녀석은 내 작은 소리도 잘 인지하고서 테라스로 날아왔다.
나는 옥희를 잠시 곁에 둔 채로 서둘러 쪽지를 작성했다.
[대공님. 결혼식은 황제가 파둔 함정이에요. 절대로 결혼식에 오지 마세요. 그리고 부디 나를 포기하세요.]
글씨를 쓰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꾹꾹 눌러 써 내려갔다. 레이몬드가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으니까.
“옥희야 잘 부탁해.”
쪽지를 다리에 묶자 옥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갯짓하며 푸드덕 날아올랐다.
***
결혼식의 날이 밝았다.
이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다.
황제의 옆자리에 설 여인은 그 무엇보다 빛나야 하기에, 시녀들과 하녀들, 디자이너들은 사활이 걸린 것처럼 나를 꾸몄다.
제국을 향한 순결을 상징하는 순백의 드레스는 투명한 보석으로 빈틈없이 장식되었다. 낮에는 태양이 떠올랐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반짝거렸다.
모든 것이 하얀 가운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나의 분홍빛 머리칼이 포인트가 되었다. 고급원단의 레이스로 만들어진 면사포가 머리에서부터 온몸을 덮자, 신비스럽고 고고한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결혼식 장소는 야외였다. 태양은 빛나고 날은 맑았기에 식을 진행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날이었다. 건물에서 나온 나는 붉은 카펫으로 된 폭신한 웨딩 로드를 사뿐사뿐 걸었다. 깔린 카펫을 따라 주위에는 둥근 테이블과 함께 귀족들이 자리했다.
거기에는 부모님의 모습도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황제는 결혼식 전에 나와 부모님마저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코웻 가문과 결탁해서 도망이라도 칠까 봐 두려워 미리 예방하려 한 모양이었다.
많이 야위어진 얼굴을 보니 가슴이 쓰렸다. 딸 걱정으로 그간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다. 식이 열리고 나서야 얼굴을 보여주다니 천하의 불효녀가 따로 없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지 관심 없는지 다른 귀족들은 내 웨딩드레스 차림을 보며 감탄을 뱉어내느라 바빴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부럽다. 얼마나 행복하실까.”
행복, 행복이라….
몸에 맞지 않은 옷은 불편하기만 하다. 행복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격언이 문득 떠올랐다.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황성의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멋들어졌다. 온갖 꽃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옅은 색감의 꽃을 주로 사용하여 신부의 아름다움을 최상으로 도드라지게 만들어주었다.
길게 이어진 웨딩 로드의 끝에는 황제가 기다리며 서 있었다.
“어서 오시오. 에일린.”
마찬가지로 새하얀 제복을 입은 카일은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태양 빛을 닮은 금발이 빛을 부서뜨릴 만큼 찬란하게 번쩍거렸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곱고 새하얀 손, 스치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저 손을 잡고 싶지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도리없이 팔을 뻗었다. 천천히 나아간 손은 손가락 끝까지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의 운명은 여기까지구나, 그렇게 느낄 바로 그때였다.
“으악!”
챙 채챙.
비명과 함께 쇠붙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저쪽 편에서부터 들려왔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가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당황한 귀족들은 자리에서 하나둘씩 일어났다. 이제 중요한 건 결혼식이 아니었다. 황제도 자기 목숨을 연명하고 나서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왜, 왜 이러시오.”
그런데 칼을 든 몇몇 기사들이 어디선가 우르르 나오더니 코웻 공작과 공작부인을 데리고 갔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원 안은 이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어서 막아!”
화가 난 카일이 허공에다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명령을 내릴 부하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다…!
나는 카일을 붙잡으려던 손을 얼른 거두었다. 그러고는 걸어왔던 길을 벗어나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이 그래야 한다고 경고했다.
“에일린!”
카일이 팔을 뻗으며 이름을 불렀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걸리적거리는 면사포와 무거운 액세서리들을 바닥으로 내다 버리며 있는 힘껏 달렸다. 귀족들은 도통 달릴 일이 없기에 달리기를 잘 못 하지만 내 정체는 K-여대생이 아닌가. 지각할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달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쫓아오는 이들이 있나 파악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다가 도로 앞을 향했을 때였다. 내 앞에 선 누군가에게 가로막혀 코를 부딪쳤다.
“아야.”
익숙한 체취. 상대가 누군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코를 통하여 안정감을 느꼈다. 그자는 손바닥으로 내 팔을 붙잡더니 흔들리던 몸을 단단히 지탱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