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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110화 (110/125)

110화

흘러내린 나의 분홍색 머리칼이 얼굴 한쪽 부분을 커튼처럼 덮었다. 우리는 헤어졌던 시간 동안의 그리움만큼 서로를 느꼈다. 레이몬드의 입술은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집요했으나 강요하진 않았다. 나 역시 그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영혼을 충전했다.

한참 후에 입술이 떨어지자 레이몬드의 웃는 낯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의 침은 꿀 같아.”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는 요염한 미소로 사람을 홀렸다. 그 모습이 안심이 되면서도 얄미워져 톡 하고 쏘아붙였다.

“지금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아요?”

“그렇겠지. 하지만 좀 더 재회의 기쁨을 누려도 되지 않겠어? 우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네요.”

설득력 있는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도 그를 간절히 원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부끄러움에 두 볼이 붉어진 탓에 시선을 살짝 돌려야 했다.

“한 번 더 해.”

그는 직진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또다시 내 얼굴을 가까이 잡아당겼다. 부드럽고 물컹한 감각이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덮쳐왔다. 머리카락 커튼 속에서 우리는 아늑하고 녹진한 시간을 쌓았다.

한 가지 자세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레이몬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한 몸이기에 안정이 필요했다. 순간 어지러워졌는지 그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어엇.”

“레이몬드. 괜찮아요?”

나는 잽싸게 상체를 부축해 머리를 동굴에다가 기대게 해주었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끙 앓았다.

“고마워 에일린. 나 왜 이러지.”

“안정이 필요한 거예요. 우선 쉬어야겠어요.”

“재회의 인사가 아직 모자라는데….”

“나중에 해요. 나중에.”

이 와중에도 레이몬드는 장난스레 입맛을 다셨다. 혀로 입술을 핥는 모습이 관능적이었으나, 눈앞에 있는 건 환자라고 새기며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잠시만 있어 봐요.”

그에게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레이몬드에게 물을 주기 위해 폭포수에 다녀왔다.

“저기에 폭포가 있거든요. 마실 물을 떠 왔어요.”

그의 코앞에 병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 생각은 하지 않고 병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치유액인가?”

“치유액으로 만들어서 드릴까요?”

그렇게 물으면서 병을 입에다 갖다 대자 레이몬드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래. 그리고 내 입으로 바로 넣어줘.”

부탁이나 권유가 아닌 통보였다. 그는 내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물이 흘러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꾹 닫고 있던 입술을 열고 물을 받아마셨다. 꿀꺽꿀꺽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빵빵하여 힘겹던 내 볼도 점차 줄어들었다.

“푸핫. 이 자세는 제가 힘들어요.”

“미안. 아직 내가 치유가 필요해서 그래.”

그가 힘없이 등을 벽에다 기댔다. 키스하기 위해 엄살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낯빛이 좋지 않은 걸 보니 또 걱정스러웠다. 그의 바람대로 몇 번을 반복하고 나자 그제야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치유액의 힘인지 욕구 충족의 힘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레이몬드도 회복했겠다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문득 바깥이 소란해진 것이 느껴졌다. 적군일까, 아군일까? 우리는 대화 내용을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하아. 두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이 근방을 다 포위해.”

“예.”

일사불란한 대답 후에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목소리는 근처에 폭포수가 있어서 저쪽에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백호가 소개해준 동굴은 숨어있기에 딱 적합한 장소였으니까.

그나저나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라니, 이제부터가 고민이었다.

“어찌하면 좋죠? 저희가 한발 늦었나 봐요.”

“대마법사는?”

“니얀은 아까부터 계속 부르고 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어요.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요?”

“흐음.”

우리는 침음을 흘렸다. 동굴 안에 머물러 있는 이상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에 있으면 들키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언제까지 한 장소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식사였다. 잠만 자도 배고픔은 몰려오게 마련이니까.

“좀 더 기다려보지. 아군이 올 수도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찬성했다. 정확히는 찬성이라기보다는 같은 소원을 염원하는 마음이었다. 절망해 봐야 눈앞만 더욱 캄캄해질 뿐이니까. 우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며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

마법의 탑.

어두운 회색빛 돌을 쌓아 올린 원통형의 건물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강한 바람이라도 불면 휘청거릴 것처럼 높았으나, 수십 개의 결계로 둘러 있어 오랜 세월에도 끄떡없었다.

마탑주의 방은 마탑의 꼭대기 층. 그곳에서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니얀. 내가 나서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회색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나이 지긋한 마법사는 마탑주 샹달프다. 어두운색 로브 차림에 길고 뾰족한 모자를 쓴 그는 누가 보아도 마법사의 외형 그 자체였다. 그는 니얀을 마주 보고 선 채로 그를 엄하게 꾸짖었다.

“탑주님께서는 제게 중립을 지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황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겁니다.”

“내가 말한 중립은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마탑이 책임질 일을 하나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야. 게다가 황제의 병력이 되기를 거절한 시점에서 이미 불이익을 준 거나 다름이 없으니, 마탑으로서는 양쪽에 비슷하게 대응했다고 볼 수 있지.”

샹달프는 제국에 한 번, 반란 세력에 한 번 번갈아 가며 당근을 줬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겼다. 이렇게 평형대 위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우위를 점하게 되는 곳을 따를 심산이었다.

그 사실에 답답함을 느낀 니얀이 재차 항의했다.

“하지만 이번에 명을 어긴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내가 적절한 벌을 줄 거다. 이번 일이 끝나면 징계를 내려야지.”

“고작 그 정도로요? 당장 제명해야 합니다!”

“시끄럽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이냐. 마탑이 정녕 분리되기를 원한단 말이냐?”

“…….”

니얀이 억울해하며 반박해도 칼같이 반려당할 뿐이었다. 아무리 외쳐봐야 자신의 1순위가 마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확고했으니까.

그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연달아 호통을 치던 마탑주는 목소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

“네가 코웻 공녀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실을 안다.”

“헉. 탑주님께서 그걸 어떻게….”

“내가 그것도 몰랐을 성 싶더냐?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을.”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을 들켜버렸으니 난감했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의미가 없는 짓이었으니까.

그러나 니얀은 실력으로만 차기 마탑주가 된 것이 아니었다. 본인은 잘 몰랐지만, 샹달프는 그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었다.

“너무 염려 말거라, 니얀. 지금 참는다면 나중에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생길 거다.”

나중으로 미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문이 올라왔지만, 더 따져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발이 묶여버린 니얀은 마음이 조급했다.

에일린이 레이몬드를 안고 숲으로 도망쳤다는 것과 그 뒤를 제국군과 반란군이 뒤따랐지만, 제국군의 우세로 숲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소식을 들은 지 꼬박 하루가 지났으니까.

‘내가 가지 않으면 항복을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마탑주가 그를 막은 이상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막막해진 그는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아야 했다.

니얀의 예상대로 에일린과 레이몬드는 이튿날 자진해서 동굴에서 빠져나왔고, 항복을 해야 했다. 나오자마자 포위하고 있던 제국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반란 세력이 수도로 쳐들어온 상황에다가, 처음부터 병력의 수에 많은 차이가 났기에 숲을 지킬 여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

처음에는 황제에게서 벗어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나의 안일한 착각임을 깨달았다. 니얀을 너무 의지한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황성으로 붙잡혀온 우리는 즉시 분리되어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카일은 내 방으로 찾아오자마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게 제의를 했다.

“나의 황후가 되시오.”

그는 내 맞은편 소파에 기대며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프로포즈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거만한 자세였다.

“조만간 결혼식을 올리지.”

“전…!”

내가 반박하려 했으나, 카일은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며 자신의 입에다가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다시 붙으면 반란군이 이길 가망성은 없어. 레이몬드가 멀쩡히 돌아간다고 해도 말이야.”

“어째서죠?”

내 눈빛이 저항심으로 뾰족해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이웃 왕국들이 지원해주는 병력이 곧 도착할 거거든.”

“대체 어떤 대가를 약속했기에 병력까지….”

나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카일의 자신감도 이해가 갔다. 파병이 온다면 반란 세력은 결코 제국군 연합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지원해주는 왕국의 수가 3분의 1로 줄었다 해도, 반란군이 감당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숫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벌써 제국의 안녕부터 생각하다니 정말이지 황후 감이야.”

카일은 요란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쳐 댔다. 그 행동이 칭찬이 아닌 조롱이라는 걸 알기에 어금니가 뿌드득 갈렸다.

이내 손을 멈춘 카일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대만 내게 온다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주겠다. 레이몬드도 살려서 돌려보내 주지. 나와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는 조건으로 말이야.”

“!!”

뜻밖의 제안이었다.

붙잡히면 레이몬드를 죽이겠다며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옥희를 통해 멜라스에게 협조를 구하고, 어떻게든 그가 빠져나가도록 도울 심산이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계획을 변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주지. 생각해보시오.”

카일은 내 마음을 실컷 어지럽히고서 뒤돌아나갔다. 쿵 하고 문 닫히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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