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마법 공격은 경로를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빠르고 강력했기에 레이몬드는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재빠르게 말을 옆으로 몰았지만 불 폭탄의 반경을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이었다.
“커헉.”
“대공 전하!!!”
멜라스의 고함이 전장의 대기를 갈랐다.
수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에일린은 숙이고 있던 상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레… 레이몬드?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과 함께 날아간 레이몬드가 바닥에 쓰러지고 멜라스가 달려와 부축하는 장면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폭발음 때문에 귀가 먹먹해진 건지 아니면 충격으로 인해 듣는 것을 거부하는 건지, 사방에 휘몰아치는 시끄러운 소리가 진공상태처럼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앗.”
그러나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아수라장 속 소음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달팽이관을 덮쳤다. 한 발짝 늦게 현실을 인지한 에일린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아… 안 돼!!”
마법사들의 난입은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켜버렸다. 카일은 이를 먼 곳에서 내려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마법이 최고야!”
“감사합니다.”
그가 박수를 치며 칭찬하자 마법사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친 레이몬드를 데려가면서 후퇴를 하겠지? 그럼 게임 끝이로군. 이거 너무 싱거운걸.’
카일은 마법이라는 능력이 더욱 탐이 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밀리고 있었는데 이토록 쉬워도 되는 걸까? 이런 강력한 힘을 가진 마탑이 제국을 탐내는 것도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인질 같은 건 쓸모도 없다는 생각이 막 들 즈음이었다. 전장을 지켜보던 카일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의 시나리오와는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의 부상으로 아수라장이 된 장소에 어떤 자가 멧돼지처럼 돌진해왔다. 돌연 튀어나온 그 존재는 레이몬드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숲 쪽으로 달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 덕에 반란 세력은 지휘관의 명령으로 질서를 찾아 다시 공격선과 방어선을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이게 대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긋방긋 웃던 황제가 주먹을 떨면서 분노하자, 마법사들은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마법 공격에 당황하던 반란 세력도 차츰 적응하더니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작전을 방해한 자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폐하. 저자는 코웻 공녀님입니다!”
“뭣?”
그 말에 서둘러 숲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언뜻 공중에 흩날리는 분홍색 머리칼이 보인 것도 같았다.
카일은 어안이 벙벙했다. 가녀린 귀족 가의 영애가 키도 덩치도 큰 장정을 번쩍 들어 올리다니, 저 상식적이지 않은 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맞아. 그러고 보니 전에 러스에 쳐들어갔을 때도 그랬지!’
그때도 깜짝 놀랐지만 다른 일들로 바빠서 쉬이 넘겨버렸는데. 저런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원통스러웠다.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사이 시종장은 병사들을 재촉했다.
“서둘러 공녀님의 뒤를 쫓아라! 숲을 샅샅이 뒤져.”
“예!!”
그리하여 제국군은 에일린과 레이몬드를 쫓기 시작했다.
***
레이몬드를 안아 올린 나는 곧장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내 난입에 깜짝 놀란 멜라스에게 대공은 나에게 맡기고 끝까지 군을 이끌어달라는 멋진 부탁을 했다.
하지만 당당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처음 와보는 숲이라 도무지 길을 알 수가 없었다. 적들이 쫓아올 것을 생각해서 몸을 숨길만 한 장소가 필요했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적당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저쪽 덤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뭇잎들이 격하게 춤추는 걸로 보아 산짐승이 있는 것 같았다.
‘큰일이다. 어쩌지?’
혹시 멧돼지 같은 게 튀어나올까 봐 그곳을 주시했다. 긴장하여 손가락 끝이 뻣뻣해졌다. 그런데 한참을 바스락대던 수풀에서 튀어나온 것은 온몸에 털이 새하얀 여우 한 마리였다.
‘여우잖아?’
녀석은 빛 여우 광호랑 몹시 닮아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몸집이 작은 새끼라는 것과 광호와 다르게 빛을 뿜지 않는다는 것. 하얀 여우는 우연히 내 앞을 지나가는 중인 건 아닌 듯했다. 녀석은 새까만 두 눈동자로 나를 빤히 보더니 귀를 쫑긋거렸다.
“백호야. 무슨 일이니?”
나는 즉석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얀 여우니까 백호. 이름이 너무 용맹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뭐 어때? 용감하게 자라라고 하지 뭐. 그런데 백호는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기분이 좋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오 역시! 내 네이밍 센스란. 후후.
백호가 내 작명 센스를 알아주는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움직임을 멈춘 녀석은 내게 등을 보이더니 그 상태로 고개만 뒤로 빼꼼 돌려 보았다. 저 동작은 마치 자신이 길을 안내할 테니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사람이랑 동물이 소통이 잘되나 보다. 나는 신기한 마음으로 서둘러 백호의 뒤를 따랐다.
폴짝폴짝 뛰며 앞서가던 녀석은 아주 깊은 숲길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서 몇 번 제자리 뛰기를 하고는 풀이 덮여있는 곳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수풀 같은데? 나는 녀석을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냥 풀 무더기인 줄 알았던 곳이 알고 보니 동굴로 연결된 길이었다.
“헛. 이런 곳에 동굴이 있었다니.”
딱 내가 찾던 곳이었다. 아무나 쉽게 찾아내지 못하여 몸을 숨길만 한 적당한 장소. 게다가 콸콸콸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반대편 끝에는 폭포가 있는 듯했다. 식수 확보와 소음차단까지 완벽했다.
“고마워 백호야.”
백호는 고개를 한껏 들어 올린 채 귀를 쫑긋거리더니 왔던 길로 도로 빠져나갔다.
나는 동굴의 바닥을 살핀 후 안고 있던 레이몬드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다행히 부드러운 풀이 많은 곳이라 몸이 배길 걱정은 덜 수 있었다.
그를 눕히고 나서야 상태를 상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불 폭탄을 직격으로 맞지는 않았다. 다만 폭발이 일어난 위치와 가까워서 타고 있던 말과 함께 힘에 밀려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몸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부상을 입으며 기절한 것이다.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질끈 감았던 눈을 도로 크게 떠 몸을 살폈다. 외관상으로는 잔 상처들뿐 큰 부상은 없었다. 하지만 내상이 얼마나 심할지 모르니 서둘러 치료를 해야만 했다.
‘저쪽에 폭포가 있었지.’
다행히 산에 흐르는 폭포수는 마실 수 있는 물이었다. 나는 우선 물을 떠 오기 위해 동굴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물 흐르는 소리가 짙어지고 있었다. 동굴 길이 한 차례 왼쪽으로 꺾이자, 시원한 물줄기가 내는 소리가 귓가를 장악했다. 동굴의 반대편 입구를 물이 완전히 덮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됐다.’
나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빈 병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싶어서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거였다. 손가락 한 개 크기 정도라 작았지만,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이마저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뚜껑을 열고 팔을 길게 쭉 뻗어 안에다가 폭포수를 받았다. 먼저 내 입안에다 털어 넣어 한 모금 들이켰다. 이걸 세 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 네 번째에는 안에다가 내 침을 투여했다. 치유력이 생긴 병 속 물이 반짝거렸다.
볼 일을 마친 나는 곧장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얌전히 누워 자고 있는 레이몬드에게로 다가가서는 상처가 난 부위에다가 치유액을 조금씩 묻혔다. 살이 찢어지고 부은 상처들이 실시간으로 아물어가는 게 보였다. 이제 겉모습만큼은 아주 말짱해졌다.
이번에는 내상을 치료할 차례다. 예전에도 해본 경험이 있어서 괜찮았다.
목 안에 직접 물을 들이붓는 것보다 키스가 더 안전할 거라고 했지. 나는 멜라스의 조언을 떠올리며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레이몬드의 얼굴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잘생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그의 푸른 눈동자지만, 눈꺼풀 속에 보석이 감추어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붉은 기가 도는 잘빠진 입술에다가 내 입술을 갖다 붙였다. 그리고 빨대를 꽂아 넣듯이 내 살덩이를 입술 사이로 침투시켰다. 저항을 덜 받기 위해서 천천히 움직이자 침이 배어 나오면서 아래쪽에 있는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폭포수를 마신 덕분에 양은 충분했다.
레이몬드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목을 움직여 고인 침을 삼켰다. 몇 번 꿀꺽꿀꺽 소리가 이어지고 나자 핏기없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됐다.”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기다릴 차례였다. 나는 레이몬드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리고서 동굴 벽에다가 등을 기댔다. 이곳은 자연 그대로의 장소임에도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머물기에 여러모로 편안하게 되어있었다.
긴장했던 몸을 심호흡으로 이완시키며 한숨 돌리고 있으려니 레이몬드가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몸을 옴지락거리던 그는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장소가 낯설었는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일린.”
그저 아침에 깨어난 사람 같았다. 목소리가 편안했고, 나를 발견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역시 난 죽은 건가. 천사가 눈앞에 있네.”
“….”
“이런 거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군.”
“무슨 그런 말을!”
발끈한 내가 엄하게 말하자 레이몬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의 미소가 너무 보기 좋아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에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턱을 붙잡아 그대로 아래로 당겨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