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황제가 방을 떠나고 나자 곧바로 니얀이 내게 찾아왔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오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몸의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대뜸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반항하지 않은 거야?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냐고!”
“들리겠어. 목소리 낮춰요.”
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흥분한 니얀을 진정시켰다.
“치유력 확인하느라고 입술을 훔친 것까지는 그래도 넘겼는데 목을 조르다니. 내가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알지, 알아. 고생했어요.”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열심히 다독거렸다. 니얀은 나의 당부대로 황제에게 덤비지 않았다. 그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순간, 모든 상황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마탑 소속의 차기 마탑주가 황제를 위협한다면 제국의 미래는 완전히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버릴 테니까.
그나마 내 힘이 아주 세다는 사실이 그를 인내하게 해주었다. 씩씩거리던 니얀은 여러 번의 심호흡 끝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멋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흥분해서.”
“아니에요.”
“그렇지만 당장 러스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저 미친 황제의 곁에 놔둘 순 없어요. 이건 진심입니다.”
“아니에요. 니얀. 대공 쪽에서 먼저 움직일 때까지는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나는 여기에 보호받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도움이 되려고 온 거였어요.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혁명의 성공이니까. 우리의 일이 있잖아요.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요.”
나는 니얀을 말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알겠다고도 하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혁명이 성공하기만 하면 판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에 굴복하려고 노력 중인 듯했다.
“대공 전하께서 에일린 님에 대한 걱정이 많으십니다.”
“그렇겠죠.”
“제게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구나.”
“왜 자기한테 말도 없이 갔냐고 질책도 하셨어요.”
“그랬…겠죠? 하하.”
민망스러워서 뒤통수를 매만졌다. 말했으면 분명히 안 보내줬겠지만, 모든 일을 수장이 알아야 하는 건 맞으니까.
장난식으로 놀리던 니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런데 억지로 데려오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나는 도무지 그게 이해가 안 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뭔데요?”
“곧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순간 속에서 울컥하면서 눈에는 따뜻한 물이 고였다.
레이몬드가 나를 믿어주고 있구나. 그 사실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가득 고인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리지 않게 애쓰고 있는데 니얀이 투덜거렸다.
“둘 다 똑같아.”
혀를 끌끌 차는 그는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나저나 황제는 왜 그러는 거죠?”
“분풀이겠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대체 왜 에일린 님께? 이 연약한 몸에 화풀이할 때가 어디 있다고.”
니얀은 다시 한번 더 내 목 부위를 살피며 속상해했다.
“황후 자리를 거절해서 그런가 봐요.”
“대놓고 거절했어요?”
“네. 두 번이나.”
“하. 그거 대단한데요?”
적진에 잡혀있으면서 당차기도 하다며 한 차례 질책이 이어졌다. 그러더니 뜻 모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하긴. 속이 타들어 가기도 하겠다.”
“…?”
황제의 집착을 알만하다는 둥 자기는 이해할 수 있다는 둥. 그는 작은 목소리로 혼자서 중얼댔다.
응? 웬 태세 전환? 미워할 땐 언제고 갑자기 황제를 이해하다니.
그의 알 길 없는 마음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나와의 대화로 니얀의 속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걸까?
다음 날 그는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였다. 깊어진 밤, 레이몬드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레…이몬드?”
손에서 힘이 풀려버렸다. 책장에서 꺼낸 책이 카펫 위를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바다가 담긴 눈동자와 칠흑 같은 흑발, 늠름한 자태 그리고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는 미소까지 내가 사랑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거 레이몬드가 너무 보고 싶어서 스스로 만들어 낸 환영은 아니겠지?
혹시 내가 깜빡 잠이 든 걸까?
매일 레이몬드의 꿈을 꾸는데 또 꿈인가?
머릿속에 의심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아 몸이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레이몬드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와 바로 앞에 섰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다가 갖다 대었다. 환영이라면 유령처럼 잡히지 않았을 텐데, 내 손끝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에일린.”
그와 동시에 레이몬드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담긴 절절한 음성이었다. 그 순간 팔을 쭉 뻗어 그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그를 와락 안으며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레이몬드!!”
콧속으로 흘러들어온 그의 체취가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이제야 실감이 났다.
꿈이 아니구나, 아니었어.
그가 진짜로 나를 만나러 온 거구나.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두분이서 시간을 보내십시오.”
“고마워요.”
니얀은 그리 말하고서는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우리는 달빛이 내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큰일이 날 것처럼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잘 지냈나.”
“네.”
“별 탈은 없었고? 카일이 괴롭히지 않았어?”
“물론이죠.”
바로 오늘 험한 일이 있었지만 레이몬드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다. 알렸다가는 당장 칼을 빼 들고 황제에게로 쳐들어갈 게 분명하니까.
지금은 아무런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이 공간도 우리의 가슴 속도, 짙어진 그리움을 위로하기 위해 그저 서로를 채우고 싶었다.
나를 보던 레이몬드의 눈빛이 그윽했다. 그는 얼굴을 가까이 내밀더니 입술을 내 이마에 붙였다. 얼굴이 밀릴 만큼 힘 있는 동작이었다.
“나한테 알리지도 않고 가다니. 이건 벌이야.”
“벌이 너무 달콤한데요?”
“그럼 더 많이 혼내야겠군.”
입술이 닿자 이마가 세 차례 더 흔들거렸다. 눈을 마주치며 웃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고 입맞춤을 시작했다.
***
그 시각.
황제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니얀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전쟁 대비를 위해 마탑주와의 연락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포션을 미리 당겨 받을 수 있겠나?”
“탑주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된다면 석 달 치를 먼저 받고 싶군.”
모든 것은 마탑주의 권한이므로 니얀은 그저 말만 전달할 뿐이었다. 자기 선에게 된다, 안 된다를 말하기보다는 전해주는 형식을 취했다. 안 그래도 마탑 내에서 마탑주와 차기 마탑주 간의 세력 견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마탑주가 되기 전까지는 몸가짐을 조심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황제는 서류를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갑자기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대뜸 니얀에게 요구했다.
“구슬을 좀 보여주게.”
“예?”
“에일린의 구슬말이야.”
어떤 촉이 카일의 머릿속을 관통한 걸까?
다른 때 같으면 직접 보기 위해 달려갔을 텐데 지금은 눈앞에 니얀이 있다. 가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왜 하필…?’
에일린이 황성에 잡힌 후로 구슬은 거의 작동할 일이 없었다. 어차피 황성 안의 일이야 뻔하니 황제가 요구할 일도, 니얀이 조작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지금 에일린의 방에는 레이몬드가 와 있지 않은가.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한 니얀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걸려면 짧게나마 시간이 필요했다.
평소와 달리 굼뜬 행동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손을 내밀고 있던 카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문을 박차고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지체 높은 황제가 보일만 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는 황성 안의 복도를 헐레벌떡 달음박질쳤다.
이윽고 눈앞에 에일린의 방이 보였다. 쾅 소리가 날 만큼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황제의 다급한 마음이 늦은 밤중에 굉음을 내었다.
“폐하…?”
에일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홀로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카일은 두리번거리면서 방안을 살펴보았다.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흔적이나 인기척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었다. 놓친 부분이 있을까 하여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긴장으로 바짝 물들었던 마음이 진정되어갔다. 불안감으로 인한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세요?”
에일린이 깜짝 놀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놀라서 커진 두 눈을 천진하게 깜빡거렸다. 카일은 침대 쪽으로 척척 다가가서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누구랑 있었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 말고 누가 있다고요.”
그녀가 당장 답변을 내놓았다. 황당함에 젖은 눈동자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하긴. 여기에 누가 올 수 있다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본 이상 더는 따질만한 이유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불길한 느낌일 뿐이므로 추궁할 수 있는 근거도 없었으니까.
자신의 감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쉬시오.”
에일린을 일별한 카일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었다.
‘최근에 일이 너무 많았나 보군. 안정을 취해야겠어.’
그는 왔던 길을 도로 돌아갔다.
***
“곧 올게. 에일린.”
“기다릴게요.”
얽혀있던 손끝이 간신히 떨어졌다.
서로의 체취와 온기를 충전하고 나자 다시 헤어질 시간이었다. 비록 몸은 떨어지지만, 마음이 같다는 걸 확인하면서 상대에 대한 믿음을 다질 수 있었다.
이 짧은 만남이 남은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겠지. 그거면 됐다.
레이몬드는 나무를 타고 내려가 니얀과 약속된 위치로 이동했다. 만약을 위해 장소를 바꿔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떠난 지 5분쯤 되었을까.
카일이 대뜸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그는 한 발짝 늦게 도착했고 그 덕분에 레이몬드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람이 뭐 저렇게 감이 좋대?
평생을 선황제의 압박 속에서 살아온 터라 눈치가 유난히 발달한 모양이었다.
“휴우.”
그가 떠나고 나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