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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106화 (106/125)

106화

승마 수업은 카일이 삐뚤어지는 발단이 되었다.

그동안 흑화 버튼을 누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조심했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레이몬드와 맞추었던 입을 그와 도저히 맞추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리고 내게 상처받은 황제는 무모한 행동을 해대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폐하께서요?”

예절 수업이 끝나자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와서 내게 알렸다.

전에는 자기가 직접 찾아오더니 웬일로 불러내는 걸까?

선생과 헤어진 나는 의문을 가지고 안내받은 방으로 향했다. 시종이 열어주는 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카일이 로브를 풀어헤친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양옆에는 반쯤 헐벗은 여인들이 그의 어깨와 허리에 매달려있었다.

“에일린. 왔군.”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일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일단 인사를 올렸다.

“그래. 수업은 어땠소?”

“괜찮아요.”

“오늘은 어떤 수업을 받았지?”

“예절 수업이요.”

“그렇군. 항상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법을 잘 익히도록.”

그건 당신이 들어야 할 말 같은데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지만, 꾹 삼켰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여인들은 카일의 팔과 어깨를 주물러댔다. 그들은 황제의 맨몸을 만지면서 은근히 나를 깔보는 표정과 시선을 흘려보냈다.

그러니까 약혼녀는 침대에서 멀찍이 세워두고, 다른 여자들이랑 침대 위에서 뒹군다 이거지? 어이가 없네. 굳이 보여주는 저의가 뭐야.

내 감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내 눈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아 짜증이 날 뿐.

카일은 할 말이 다 끝났는지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처음부터 할 말이 있다기보다는 다른 의도가 있는 듯했지만.

“그만 나가보시오. 난 여인들과 즐겨야겠으니.”

“네.”

카일은 옆의 여인에게 팔을 두르면서 말했다. 그가 껴안자 여인이 기쁜 듯이 꺄르륵 거리며 웃었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후에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쾅.

“꺅.”

에일린이 나가자마자 카일은 주먹으로 침대의 헤드보드를 세게 내리쳤다. 깜짝 놀란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제길.”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는 팔에 들러붙어 있던 여인을 밀쳐내 버렸다. 반라의 여인이 방어도 못 하고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지만 다치든 말든 자기 알 바가 아니었다.

‘그토록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이라니….’

카일은 에일린을 일부러 불렀다. 자신이 여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밑바닥에 얕게 깔려있어 인지하지 못했던 미약한 질투심이라도 깨달을 줄 알았는데.

기대가 철저히 배신당하자 짜증이 치솟았다.

“이리 와.”

“꺅. 폐하.”

카일은 옆에 앉은 다른 여인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당장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는 에일린 대신에 여인의 몸을 공격적으로 탐하기 시작했다.

***

방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세수를 했다. 못 볼 걸 본 눈을 한시바삐 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황제와 여인들이 얽혀있는 모습이 잔상처럼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후….”

물이 묻은 얼굴을 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닦아내었다. 거울로 얼굴 상태를 확인하면서 엉뚱한 행동을 보인 황제의 의중을 가늠해보았다.

내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그러는 걸까?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도 질투가 드나?

그러나 질투는커녕 역효과만 났다. 나라를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여인에게만 목을 매고 있다는 게 그저 한심하게만 보였다.

자연스레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내 최애가 떠올랐다.

레이몬드는 잘 지내고 있을까?

내 걱정을 많이 하고 있겠지?

그가 보고 싶었다.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체취, 매끈한 콧대, 눈을 감을 때마다 보이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 나를 보는 다정한 눈빛 이런 것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조금만 참자. 대공 세력이 준비를 모두 끝마친다면 황성으로 쳐들어올 테니까. 그날이 오면 저 지긋지긋한 황제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렇게 굳게 믿으며 또 다른 수업을 받기 위해 움직였다.

***

다정한 전략도, 질투심 유발 작전도 다 도루묵이 되자, 카일에게 남은 선택사항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러나저러나 통하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해야지. 어차피 잡은 물고기. 주인은 나 자신이니 뭐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으니까.

이것도 아집으로 인한 결론일 뿐이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에일린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만 믿었다.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늦은 시간, 카일은 그녀의 방을 찾았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자 에일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장본인임을 확인하자 미간이 구겨졌다.

“폐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질책하고 있었다.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으니까.

카일은 에일린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아앗.”

세게 쥔 힘에 하얀 살갗이 빨개졌다. 아파서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격한 감정이 깃든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우악스럽게 쥔 손안에 잡힌 연약한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세게 쥐면 바스러질 것처럼 한 줌도 되지 않아 보였다.

이렇게 약한 주제에 프라레스 대 제국의 황제인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다니.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 무척이나 가소롭게 느껴졌다.

“에일린.”

에일린은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몸이 떨리느라 고개를 드는 동작이 느렸지만 정확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초록빛 눈동자 속에 깃든 두려움이 보였다. 자신을 거절하던 당당함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늘이 내린 눈이 퍽이나 아련해 보였다. 카일은 이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왜 그대의 치유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

카일은 자신의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몇 방울의 피가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이보리색 카펫에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피를 머금은 붉고 요사스러운 입술이 에일린의 입술을 덮쳤다.

에일린은 눈이 커지면서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쳐내 버렸다. 소름 돋는 감각 탓에 반사적으로 나온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손등을 들어 입술을 닦아내었다. 팔을 놓아준 카일은 한 걸음 뒤로 밀려났지만, 만족스럽게 웃었다. 가벼운 키스만으로도 상처가 낫고 있었으니까.

“정말 신기하군. 진작에 억지로 할 걸 그랬어.”

“….”

저런 짐승 같은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난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거만한 눈동자가 아래를 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며 울분을 머금고 있는 여인을 향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소중한 그대를 함부로 아무에게나 내어주진 않아.”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 그것이 카일의 생각이었다.

“그대는 쓸모가 많지. 평생 나만을 위한 치료제가 되어줘야겠어.”

그는 “후후.”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몸을 뒤로 돌려 방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

카일은 조울증처럼 실시간으로 기분이 좋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살아있는 좋은 치료제를 가졌다는 생각에 기뻐했다가, 이내 자신을 거절하며 가슴을 할퀸 에일린을 저주했다.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에일린에게 폭발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밤에도 또다시 찾아왔다.

카일은 에일린을 벽으로 몰아넣었다. 살기를 담은 기세에 눌려 에일린은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등에 벽이 닿자 절망스러웠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으니까. 카일의 큰 손바닥이 벽을 짚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코끝에 맺힌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레이몬드가 그렇게 좋았나?”

그는 반대편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거친 동작에 “윽.”하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말해봐. 어디가 좋았지? 같이 밤을 보냈나? 둘이서 침대 위를 뒹굴었냔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카일은 턱을 탐하던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가느다란 목이 한 손안에 다 들어왔다. 움켜쥘수록 숨쉬기가 힘들어 얼굴이 일그러지자 속에서 쾌감이 일었다.

그녀는 목이 졸리면서도 힘겹게 말했다.

“폐하께서는…제게 정녕…대답을 듣기를…원하시는 건가요?”

“뭐?”

“겁을 주는 게 목적이라면…성공이시네요. 저는 이제 폐하가…무서우니까요.”

“무섭다고? 내가 무섭다면서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거지?”

그가 조르던 손을 떼자 에일린이 켁켁 거리며 기침을 뱉어냈다. 카일의 손가락 끝이 이번에는 에일린의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칼끝을 겨누는 듯한 느리고 아슬아슬한 동작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집착하세요?”

에일린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두려움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오랫동안 가져왔던 의문을 풀고 싶었다.

“사랑을 원했나. 하! 그런 건 그대에게 과분하지.”

그러나 카일은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감정을 정제하여 설명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확신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욕망에 관한 것뿐이었다.

“두려움의 감정이라도 좋다. 그대가 내 뜻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다.”

결국 지배자의 욕구였다.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두는 자는 자신과 대등한 높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카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해자인 척, 사랑받지 못한 척했으나, 원하는 것은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독재자. 그것으로 자신의 모자란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삐뚤어진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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