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황제는 내게 예비 황후수업의 일환으로 승마랑 마법 수업을 허락했는데 그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말을 타는 법을 알려주면 말을 타고 도망갈 테고, 마법을 깨우치게 되면 공격이 가능하니까 위험할 텐데 말이지.
물론 지난날의 내 마법 선생이 말했듯, 나는 마법에 재능이 없는 모양이지만. 황제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황제는 승마 수업을 하겠다며 나를 말 목장으로 불렀다.
“폐하께서는 먼저 가 계십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알겠네. 시종장.”
건물 밖으로 나온 시종장이 내게 예의 바르게 아뢰었다.
역시나 한껏 아름답게 꾸며진 나는 마차를 타고서 목장으로 이동했다.
사실 말을 타는 법은 이미 코아에게 배워서 기본기를 잘 닦아둔 상태였다. 레이몬드가 알차게 신경 써서 교육해줬기 때문이다. 내가 승마 수업을 제안한 것은 순전히 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관건은 처음인 척 미숙하게 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목장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황제는 내게 말을 선물했다. 지금 자신이 타고 있는 것과 같은 백마였다.
“이 녀석은 하데스와 형제라오.”
“하데스가 누군데요?”
“전쟁 중에 그대가 타고 사라진 나의 애마의 이름이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지? 하데스란 녀석은 이제 켄지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코아의 소유가 되었지만.
“기존 이름이 있지만, 그대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는 게 좋겠군.”
“흐음.”
뭐라고 지을까?
나는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때마침 적절하고 좋은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 포세이돈이라고 할게요.”
“포세이돈이라, 왜지?”
“포세이돈이 바다의 신이잖아요. 푸른 물결이 떠올라서 좋아요.”
“괜찮은 이름이군.”
카일은 턱을 매만지면서 끄덕거렸다.
“내 눈동자 색과 같아.”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완벽한 그의 착각이었다. 레이몬드의 바다 같은 눈동자가 떠올라서 지은 이름이었으니까. 황제의 것은 따지자면 좀 더 초록색 계열에 가까웠다.
“폐하의 말 이름은 뭔데요?”
“내 애마의 이름은 제우스다.”
“허. 제우스라니.”
이게 웬 장난과 같은 운명인가. 이제부터 형제 사이가 되어서 셋이서 치고받고 싸우면 된다 이거지?
황제는 생각보다 말을 다루는 것에 능숙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승마를 마스터했다더니 정말인 듯했다.
“에일린. 이렇게 하는 거요. 그게 아니라 말 고삐를 이렇게 쥐어야 하오.”
“이거요? 맞아요, 폐하?”
“그건 너무 멀어.”
나는 못 타는 연기에 최선을 다했고 그는 가르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효과는 좋았다. 황제가 빠르게 지쳐가는 게 눈에 띄었으니까.
“적당한 길이로 잡지 않으면 서로가 불편하다오.”
“서로라니요. 저랑 폐하랑요?”
“에일린과 포세이돈이지.”
“아하. 말을 사람처럼 말씀하신 거구나. 난 또.”
허둥지둥하느라 못 알아듣는 척하자 나 몰래 고개를 돌리며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나고 있겠지?
그러게 왜 직접 승마를 가르친다고 나섰대.
하지만 황제는 내 예상보다 인내력이 대단했다. 누군가를 가르쳐본 경험이 없을 텐데도 화내지 않고 끝까지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황제보다는 선생 쪽이 적성에 맞는 게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도 문득 들었다.
드디어 말이 걷기 시작했고, 더 큰 난간에 봉착했다. 내가 균형을 못 잡고 휘청대는 통에 한 발짝 내디디기가 무섭게 서야 했으니까.
“에일린. 허리를 곧게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시오.”
“으앗. 떨어질 것 같아서 무서워요.”
나는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말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도 그러니까 나중에는 기사들이 아예 내 말 주위를 빙 둘러쌌다. 내가 떨어지면 받아내려고 따라다니는 것이다. 말이 조금이라도 속력을 낼 때면 그자들의 다리에도 불이 붙어야 했다.
단 한 번 승마 수업을 했을 뿐인데 함께 따라온 기사들은 모조리 녹초가 되었다. 황제 앞이라서 간신히 서 있기는 한데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나의 악명이 높아졌겠지. 후후.
그나저나 포세이돈은 영리한 말이었다. 녀석은 이 난리가 났는데도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다. 과연 명마는 명마인가 보다. 그 변태 같은 하데스 녀석과는 질적으로 달라!
포세이돈과는 끝까지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가득했다. 물론 본인의 의사는 물어봐야겠지만.
나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침부터 승마 수업에 돌입했다.
기사들의 얼굴에는 오늘도 험난한 하루를 예감하는 그늘이 져 있었지만 내 알 바 아니지. 아니, 오히려 좋았다. 아예 황제의 기사들을 모조리 피로와 스트레스에 찌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겠구나 싶었다.
한편 황제는 내게 점점 무언가를 바라는 눈빛이 되어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느낌이 그랬다.
이 정도 배움이면 되었다 싶은 건지, 아니면 가르치기를 포기한 건지. 수업을 해야 할 아침 시간에 황제는 내게 사냥터를 한 바퀴 돌고 오자고 말했다.
“사냥터로요?”
“그래. 실전 연습이 중요하니까.”
“전 아직도 말에서 떨어질 것 같아서 무서운걸요.”
“그래서 에일린을 위해 준비했소.”
황제는 박수를 탁탁 쳤다. 그러자 저쪽에서 두 기사가 어떤 물건을 합심하여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기괴한 모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게 뭔가요?”
“그대를 위해 특별제작한 안장이라오.”
그것은 흡사 자전거에서 어린아이를 태울 때 쓰는 좌석 같았다. 떨어질 일이 없도록 안정성을 극도로 높인 형태였다.
기사들이 안장을 채우고 나서 도움을 받아 그 위에 올랐다. 더는 징징대지 못할 만큼 확실히 편안했다. 안정감이 20 프로에서 80 프로까지 올랐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들이를 내뺄 수 없게 되었다.
“가지. 이럇.”
황제는 힘차게 외쳐놓고서 내 속도에 맞추느라 천천히 말을 몰았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화살을 쏠 만큼 스릴을 즐기는 입장에서는 아주 답답할 텐데도 잘도 참아내고 있었다.
많이 친해졌다고 여긴 걸까. 혹은 이만하면 보답을 받을 만큼 충분히 잘해줬다고 여긴 걸까.
황제는 나와 긴밀한 사이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가 어떻든 간에 내 마음에는 미동도 일지 않고 있었다.
실전 연습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러나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었다. 밝았던 하늘에 점차 먹구름이 끼더니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서는 곧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모양새였다.
툭, 투둑.
아니나 다를까. 무거워진 구름이 눈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폐하. 비가 와요.”
“저쪽으로 피하지.”
황제는 나를 데리고서 숲 근처의 커다란 나무 아래로 숨었다. 따라오던 호위들을 손짓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으라고 명령을 내린 후였다.
솨아아아.
소나기일까.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사방이 빗소리로 가득 차 다른 소리는 모두 차단되었다.
빗속에 갇힌 기분. 마치 내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은 날씨에 공감이 되면서도 슬퍼졌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옆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황제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내 표정과 같지 않았다.
가볍고 활기차고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상기되어 발그레해진 볼이 더욱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눈동자 안에는 우울한 내 표정이 들어있었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황제는 나와는 다른 장르 속에 있었다.
나는 잔잔물에다가 우울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그는 저 혼자 핑크빛 로맨스를 찍고 있었다. 알다시피 일방적인 사랑은 비극이다. 짝사랑의 최후는 상실감만 남길 뿐이니까.
“에일린.”
황제는 달콤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스산한 배경과 상반되어 퍽 이질적으로 와 닿았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지만. 함께 맞춰가며 미래를 지어나갈 수 있지 않겠소? 우리가 며칠간 했던 승마 수업처럼 말이오.”
“승마 수업이요?”
“그렇소. 나는 미숙한 그대를 앞으로도 잘 이끌어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했다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비에 젖은 금발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빛나는 건 희망으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치지도 않나 보다. 그의 끈기만큼은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다.
드라마에서 시청자를 감동시키려고 배경도 준비하고 음악도 깔고 분위기를 한창 달구어놓았는데, 받으라는 감동이 도저히 오지 않으면 어찌해야 할까.
억지스러운 설정은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다. 지금 그가 내게 하는 것이 그랬다.
카일은 천천히 뻗어온 손으로 내 볼을 살며시 붙잡았다. 이 동작이 주는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더니 내 얼굴로 다가왔다.
혼자만의 설정. 혼자만의 로맨스.
내 심장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데, 이런 일들을 벌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걸 인정하려 들지를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부린다고 해서 억지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면서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아닌걸요. 폐하.”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거절의 말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내 목소리이건만 나도 듣고서 움찔 놀랄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내 턱 부근을 서성대던 손이 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내 말보다 한 박자 늦은 움직임이었다.
한 번 더 쐐기를 박아야 했다. 그 마음의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바뀔 마음이 아니에요. 제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아요.”
레이몬드를 향한 내 진심이 그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찾아 헤매는 눈동자와 마음을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었으니까.
나는 카일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것이 고백하는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두 번째 거절이었다.
흔들리는 카일의 동공이 또렷하게 보였다. 눈시울이 벌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