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카일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다 커버린 지금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탓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걸까. 유년기의 경험이 언제까지고 잘못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는 법. 과거를 직시하는 것은 그것을 핑계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딛고 일어서기 위함인걸.
성숙한 어른 대신에 안에 있는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카일의 몸과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가엽지 않소?”
“….”
“그러니 그대가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딸깍.
황제의 손에 있는 자그마한 보석함이 열렸다. 그 안에는 구하기 힘들다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대에게 주려고 준비했어. 나의 황후가 되어주시오.”
청혼하려고 풍경 좋은 곳에 나를 데려온 거구나.
또다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청혼을 받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라도 그를 향해 허락을 입에 담았을 것이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고 보석은 빛났으며 배경은 완벽했으니까. 거기다가 완벽한 서사마저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멜리아여야 했어.
나는 다시금 단단해지도록 마음을 담금질했다.
“폐하. 저는 폐하의 황후가 되지 않을 거예요.”
안타까운 감정 뒤에 내가 입에 담은 건 거절이었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청혼은 청혼이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서사가 이해된다고 해서 마음을 무작정 받아 줄 수는 없잖아?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해나 동정심과는 결 자체가 다르니까.
내 대답은 환상에 빠져 있는 그에게 내린 일침이었다.
스스로 가둬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세요. 자기 연민을 멈추세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개를 들고 현실을 똑바로 보세요. 내가 하고픈 말들이었고 거절 속에 담아둔 숨은 뜻이었다.
카일이 주먹을 쥐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내 거절을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너는 내 약혼녀고 미래의 황후다.”
그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있었다.
자기 입맛대로 완벽한 시나리오를 짜놓고, 내가 내 역할에 맞는 대본을 읽어 내려가기만을 기대했다. 틀어진 대답 따위는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만 기억해. 앞으로 결코 변동은 없을 테니까.”
카일이 답을 내렸다. 다른 여지는 없었다.
***
카일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내가 제일 불쌍해!
기껏 최애가 있는 소설에 빙의해놓고서 그와 생이별을 하게 됐으니 말이야.
“하아.”
나는 테이블 위에 상체를 기대며 허물어졌다. 내 깊은 한숨에 곁에 있던 니얀이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는 적진 속에 있는 내가 걱정되는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방으로 찾아와주었다.
“보고 싶다….”
나를 내려다보던 니얀은 나의 웅얼거림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못마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이 와중에 대공 전하가 보고 싶어요?”
“이 와중이니까 보고 싶죠. 옆에 없으니까.”
“나 참. 찐사랑이네, 찐사랑이야.”
“그걸 이제 알았나 봐?”
둘이서 아웅다웅하고 있을 그때였다. 창가에서 콕콕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무척이나 익숙하기도 했다.
나는 상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손님이 찾아온 모양인데요.”
뇌에 내재 되어있는 정겨움이 올라와 재빠르게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자 거기에는 눈이 크고 동글동글한 올빼미 한 마리가 나를 빼꼼히 쳐다보고 있었다.
“옥희야!”
“옥.”
반가운 외침과 함께 얼른 창문을 열었다. 옥희는 내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익숙하게 날아들어 왔다.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정말 보고 싶었어!”
나는 속사포같이 말을 뱉어내면서 옥희를 안아 든 채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니얀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대체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지?”
그는 짐짓 심각하게 읊조렸다.
“왜 그래요?”
푸드덕. 내가 니얀에게로 다가가자 옥희는 날갯짓을 하더니,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황성에는 결계가 쳐져 있거든요. 특히 에일린 님의 방에는 제가 따로 강력하게 걸어두었기 때문에 아무나 통과할 수가 없어요.”
그의 말대로 내 방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황제와 시종장, 시녀장 및 시녀들, 그리고 니얀 정도였다.
“니얀이 들여보내 준 거 아니었어요?”
“전 아닙니다.”
“그래요?”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옥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기하네. 넌 여기에 어떻게 온 거니?”
“옥옥.”
넌지시 묻는 물음에 옥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모습이었다.
니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옥희에게로 다가갔다.
“안 되겠다. 제가 이 부엉이한테 마법을 걸어보겠습니다.”
“네? 웬 마법이요?”
“역추적 마법이요. 누군가가 이 녀석한테 마법을 걸어놓고서 에일린 님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안전상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손을 뻗어오자 옥희는 깜짝 놀랐는지 날아올라 내 뒤로 숨었다. 겁에 질린 녀석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물씬 일었다.
“그거 아픈 거 아니에요?”
“약간 따끔할 수는 있어요.”
“그럼 안 돼요. 놀랄 거라고요.”
“아니, 지금 안전이 걸린 문제인데 그게 중요합니까?”
“그럼 중요하죠! 됐어요. 옥희는 내가 잘 알아요. 괜한 의심하지 말아요. 그리고 얘는 부엉이가 아니라 올빼미라고요.”
내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서 접근을 막자, 니얀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옥희는 그런 내 등 뒤에 꼭 붙어서 몸을 숨겼다.
“나 참.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는 나의 단단한 의지를 엿보았는지 포기하고서 자리에 도로 앉았다. 조금 토라진 듯했지만 그렇다고 옥희를 내어줄 마음이 들진 않았다. 그래도 니얀도 소중한 사람인데 너무했나 싶어서 슬쩍 다가가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니얀에게 늘 감사하고 있는 거 알죠?”
“몰라요.”
니얀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화들짝 놀라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고개를 향한 쪽에 옥희의 얼굴이 정면으로 있었던 것이다.
“아이, 깜짝이야. 이 올빼미가!”
“옥 옥.”
약이 오른 니얀이 옥희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옥희는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라 이쪽저쪽으로 도망치며 니얀의 손길을 피했다. 옥옥 거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즐겁게 들렸다.
밤이 더 깊어지자 니얀이 먼저 떠나고, 나는 옥희와 단둘이만 남았다. 비록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레이몬드에게 속한 존재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오래 있으면 위험할 거야.”
“옥 옥.”
“너한테 줄 해바라기랑 물이 없어서 안타깝네.”
“옥.”
나중에 돌아가게 되면 꼭 챙겨줄게.
나는 뒷말을 삼키며 슬프게 웃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레이몬드를 향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를 위해 조금은 더 인내할 시간이었다.
***
“내일부터 폐하의 명령에 따라 수업을 진행할 겁니다. 표를 참고해주시지요.”
이른 아침, 시종장이 내게로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웬 엉뚱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이에는 시간대별로 다과 수업, 사교댄스 수업, 예절 수업 등의 스케줄이 짜여 있었다.
“이제 예비 황후 폐하로서 황후가 되시기 위한 수업이니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허.”
기가 막혀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안 한다고 거부했는데 결국 듣지 않겠다 이거지?
“하지 않겠다면요?”
“예비 황후 폐하께 거부권은 없습니다.”
황제의 새 시종장이라는 켈른은 무뚝뚝한 사내였다. 목이 뻣뻣하고 감정이 요동치던 전 시종장 리빙스턴 백작과는 달리, 감정 없는 사람처럼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였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는 종이를 도로 가져가서는 깃펜으로 리스트를 체크하며 내게 물었다.
“혹시 원하시는 수업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예비 황후 폐하.”
나는 팔짱을 끼면서 등받이에다 등을 갖다 댔다. 하기 싫다는데 원하는 걸 말하라니. 하지만 막상 생각해보자 괜찮은 것들이 몇 가지 떠올랐다.
“승마 수업이요.”
“승마는 폐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다고 합니다.”
“에? 폐하께서 왜요?”
“신으로서는 폐하의 깊으신 의중을 알 길이 없군요.”
왜 직접 한다는 거지. 부담스럽게.
일단 가르쳐준다니까 할 말이 없어졌으니 다른 안을 꺼내 들었다.
“그럼 마법 수업도 넣어줘요.”
“마법이요…?”
딱딱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깃들었다. 그것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표정을 바꾸었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일단 폐하께 전달은 하겠습니다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전달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예비 황후 폐하.”
말끝마다 예비 황후 폐하, 예비 황후 폐하 하며 붙이는 게 꼭 나를 약 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족쇄를 채우는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는데 굳이 그렇게 부른다 이거지?
이대로 간과할 수는 없다고 여긴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그런데 말이죠.”
“예. 예비 황후 폐하.”
“내가 예비 황후면 자네에게 말을 놓아도 되겠지? 그렇지 않은가, 시종장?”
“예?”
갑자기 돌변한 내 말투에 시종장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내가 공작 가 영애이긴 해도 직접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니 엄연히 따지면 켈른 백작이 윗사람. 정식 황후가 되기 전이니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곧 황후가 될 거니까 윗사람이 맞긴 맞잖아?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할 수 없는 애매한 일이었다.
시종장은 복잡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만 했다.
“그… 그렇지요.”
그는 눈썹이 꿈틀대면서 간신히 웃어 보였다.
그래. 상사한테는 항상 스마일 해야지. 내가 내일 당장 네 상사가 될 수도 있는데 나한테 까불지 마라? 시원하게 경고를 날려주고 났더니 조금은 개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