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황제는 시종장에게 나를 모시라고 한 후 어떤 방에다가 가두어두었다.
가두었다는 표현이 맞는 건, 니얀에게 시켜서 방 바깥에다가 본인만이 통과할 수 있는 결계 마법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옥이라기엔 고급지고 호사스러운 것이 약혼녀로서의 대우를 해 주는 듯했다. 보는 눈들이 많아 내게 함부로 하지 않는 거겠지.
그래도 족쇄를 채우지 않아 불편하지는 않았다.
깊은 밤이 되자 니얀이 몰래 방으로 찾아왔다.
결계 마법을 친 것이 본인이니 얼마든지 통과가 가능했다. 그는 내게로 와서는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에일린 님. 어쩌다 붙잡히신 겁니까?”
“으. 그러게요.”
그의 한숨에 내 심장이 조여들었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을 잘 해결해보려 했는데 실패해서 붙잡혀 버렸어요.”
“지난번의 그 일 말씀이시군요. 실패 시의 플랜이 없었나요?”
“네….”
“그럼 혹 대공 전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십니까?”
“아…니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당연히 그가 허락할 리가 없건만, 그 당연한 걸 어긴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니얀은 대책이 없는 나를 혼내려는 듯했으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자 마음을 접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야단치는 것을 대신했다.
“후. 그럼 대공 전하께는 제가 알리겠습니다.”
“미안해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있으니까 위험하시진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니얀.”
적진에 끌려들어 왔는데 그 속에 아군이 있다는 건 굉장히 힘이 되는 일이었다.
“위급한 상황이나 필요한 일이 있을 땐 언제든 부르십시오. 당장 올 테니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머리 위에 제 커다란 손을 얹었다. 니얀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
한순간의 판단 실수로 나의 거처는 대공의 곁에서 황제의 곁으로 바뀌었다.
후회로 젖어 든 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밝자, 카일은 나를 식사 자리에 불렀다. 그에게로 가기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시녀장은 아침부터 시녀들을 데리고서 내 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폐하께서 아침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가기 전에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저들은 나를 뜨뜻한 물이 담긴 목욕통에 담가 보글보글 거품을 잔뜩 내었다. 그러고는 묵은 때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내 몸을 박박 문질렀다. 때를 벗기는 문화에서 살지 않았다면 신종고문으로 생각했을 강도였다.
때 빼고 광내고 난 후에는 꽃향기가 가득한 향유를 내 몸과 머리카락에 발랐다. 피부가 더는 흡수할 공간이 없을 만큼 묻히고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아예 인간 향수로 만들려는 속셈 같았다.
다음 단계는 옷이었다. 아침 식사에 입고 가기에는 조금 과한 연보라색 드레스였다. 장식이 많기보다는 몸 선이 드러나도록 디자인된 관능적인 스타일이었다.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탱크톱에 어깨와 쇄골이 다 드러나고, 보라색 보석들로 빼곡히 박혀있었다. 잘록한 허리선 아래에는 그보다 좀 더 연한 보라색 드레스가 여러 겹의 레이스 형식으로 넓게 퍼져있었다. 구두는 짙은 보라색이었고, 목과 귀에 걸리는 액세서리는 그리 크지 않은 투명한 방울 보석으로 은은한 포인트를 주었다.
내가 황성으로 출두할 때면 공작 저에서 온 힘을 다해 꾸며주고는 했는데, 그것보다 한층 더 훌륭한 솜씨였다. 보면 확실히 황성이 우세했다. 황성에는 이런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떨기의 꽃처럼 분한 나는 시녀장의 안내를 따라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고, 하녀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음식을 세팅하는 중이었다. 상석에는 먼저 온 황제가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왔군. 에일린.”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제는 나를 발견하더니 얼굴색이 밝아졌다. 나는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떨떠름한 인사를 건네고는 멀리 떨어진 맞은편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황제가 굳이 나를 불러세웠다.
“거기가 아니오. 여기로 오시오.”
그는 자신이 앉은 곳에서 기역 자로 꺾인 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나는 우뚝 선 채로 말없이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가까이에는 죽어도 앉기 싫었으나 결국 억지로 발걸음을 떼었다.
따지고 보면 난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그것은 우리만이 아는 속사정이었다. 겉으로는 약혼녀를 되찾아낸 황제가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그런 이미지를 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 또한 집안의 안녕을 위해 그러는 편이 좋았으니 얌전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하니 기쁘오.”
“저도 기쁘네요. 폐하.”
“별 탈 없이 돌아오니 이런 날도 오는군. 허허.”
대화는 완전히 겉핥기식이었지만 언뜻 들으면 화기애애하게 들리도록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의 웃는 가면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 속에 얼마나 시커멓고 음습한 본성이 숨어있을지, 내면을 확인하는 일은 영원히 없었으면 했다.
식사 시간이 끝나자 우리는 바로 티타임을 가졌다. 시간상으로 보면 아침이라기보다는 아침과 점심의 중간쯤이었기에 디저트를 주려는 듯했다. 우리는 전시상황 이전에 종종 가졌던 대로 자주 가던 테라스로 가 자리했다.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 시녀가 케이크와 차를 내어왔다. 그녀가 세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케이크는 내가 잘 먹었던 초코케이크였다. 우아한 몸짓으로 조각을 잘라 접시에 올리고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시녀가 물러나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황제가 내게 말을 걸었다.
“에일린.”
시간을 되돌린 듯이 과거로 돌아온 풍경. 그 속에 포함된 황제는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눈동자에 깃든 쓸쓸함과 집착, 그리고 광기의 빛. 그것은 연기로 감출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둘만이 자리한 이곳에서도 황제는 다정한 연인 연기를 유지했다. 그가 손을 올리더니 내 옆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전히 아름답군. 그대.”
“….”
하지만 내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연인행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위장용일 뿐이니까.
속에 칼을 품은 채로 입으로만 상냥한 황제의 태도가 역겹게 와 닿았다.
“왜 이러세요.”
나는 손을 가볍게 쳐냈다.
상대가 황제인 걸 떠나서라도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급변한 내 태도에 놀란 걸까. 황제는 머리에 얼음을 들이부은 것처럼 눈이 커졌다.
“에일린.”
그의 음성이 부르르 떨려왔다. 시선은 내게로 똑바로 고정된 채였다.
“그대는 황성에 왜 들어온 거지? 무엇을 노린 건가?”
“대답하지 않겠어요.”
“설마 내가 그리워서는 아니겠지.”
“….”
“실은 레이몬드에게 간 것이 내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함이라던가.”
그는 대체 나랑 뭐가 하고 싶은 걸까.
왜 실없는 농담들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답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에 그만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도대체 여주한테 빠져들지 않고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불퉁한 내 표정을 보던 황제는 못마땅한 듯 눈썹을 휘었다.
“지금 그대가 누구의 곁에 있는지 한번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요.”
그래. 내가 스스로의 안위는 챙기지 않고 엉뚱한 일을 벌인 대가를 받고 있는 중이지. 바보같이 말이야.
입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테라스에서 빠져나갔다.
***
“억지로 취하시지요.”
에일린을 떠난 카일은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알현실로 와 황좌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시종장 켈른이 즉시 다가오더니 그에게 의견을 올렸다.
“억지로라….”
“씨를 갖게 되신다면 다른 생각을 포기할 겁니다.”
켈른은 이전 시종장인 리빙스턴 백작과는 달랐다. 아첨하기보다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구석이 있었다. 황제가 평소에 여인들을 품에 안는 것을 보고서 권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종장의 권유가 카일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억지로는 의미가 없다.”
“왜 그렇습니까.”
“레이몬드를 가슴에 담은 채로 나의 씨를 품다니,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카일은 혀를 쯧 찼다.
자신은 온 세상을 호령하는 제국의 황제다. 모든 것을 발아래 둘 수 있는 절대 권력자. 게다가 외모는 또 어떤가. 절세미남이라는 찬사도 부족한 자신을 마다하는 여인은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여인이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혔고, 손끝 하나 더 닿아보려고 애썼다. 그런 자신을 두고서 다른 남자를 원하다니.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짜증 났다.
“스스로가 마음을 꺾도록 만들 것이다.”
카일은 오기가 생겼다. 자신이 아닌 레이몬드를 택한 게 괘씸했기에 에일린이 의지를 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그때 한 가지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런데 황성에는 왜 온 걸까? 도통 입을 열지 않는데.”
“정황으로 보면 그 여인이 미인계를 쓰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인계?”
상황을 들어서 알고 있던 시종장이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미인계라. 그럴듯하군.”
카일은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의 취향이었다. 에일린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외모와 태도에서 풍겨 나오는 매력으로 보아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인은 제 손으로 정복하는 맛이니까. 현재는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카일은 저도 모르게 아멜리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온 여인은….”
“아멜리아.”
“예?”
“이름이 아멜리아라더군. 지방의 소프 남작이다.”
“예. 소프 남작은 어떻게 할까요? 하녀들이 전하는 말로는 남작이 계속해서 폐하를 찾는다고 합니다. 만나고 싶어 한다는 군요.”
“흠. 그래?”
고심하던 카일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들르도록 하지. 우선은 편히 있을 수 있도록 해주게.”
“알겠습니다, 폐하.”
켈른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