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잠시만요.”
저택으로 돌아오자 아멜리아는 내 손을 잡아끌더니 아무도 없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레이몬드도 나를 원했지만 순서를 놓쳐버렸다. 단둘이 되자 아멜리아는 나를 보며 다짜고짜 물었다.
“공녀님. 황제의 약점을 잡으려고 하는 거 아니시죠?”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할 말을 고르다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웃어버렸다.
“그럴 리가요? 하하.”
“거짓말을 참 못하시네요. 얼굴에 다 드러나요.”
“….”
전에 니얀한테도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질문이 아니라 떠보는 말이었구나?
씁쓸한 낯빛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미 확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서 뭐할까.
들켜버린 김에 진심이 반쯤 담긴 핑계를 댔다.
“실은 미인계를 쓸려고 그랬어요.”
“역시 그거였구나. 하지만 미인계라니 전 자신이 없는걸요.”
“어째서요?”
“전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으니까?”
“…네?”
저기요, 지금 뭐라고요?
저 말은 내가 빙의되고 나서 들은 말 중에 가장 망발이었다.
게다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면서 아멜리아가 의기소침하게 입술을 내미는 모습조차 얼마나 고혹적인지. 말과 상태의 간격이 나를 더 황당함 속에 몰아넣었다.
“말도 안 돼요. 아멜리아는 눈부시게 예쁘다고요!”
“그리 말해주다니 고맙네요.”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농담이 아닌데 믿지를 않는 것 같았다.
“정말인데. 평소에도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아요?”
“아. 그렇기는 한데. 아까 보니까 황제가 정말 잘생겼더라고요.”
잘생겼다고 말하는 아멜리아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외모에서 끌리긴 끌리나 보다.
여자주인공도 남자주인공을 사랑하는 거니까.
과연 두 사람은 운명이구나 싶어 신기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혁명에 대한 마음이 꺾이는 건 아닙니다만. 크흠.”
나의 시선의 뜻을 오해했는지 아멜리아는 헛기침을 하더니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 지었다. 그녀는 민망해했지만, 사실 황제와의 사이를 아는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멜리아는 좋아하는데 황제는 왜 반응이 없을까?
원작소설 속에서 카일은 아멜리아에게 첫눈에 반한다. 보자마자 물에 젖은 종이처럼 정신이 나가버려서는, 모든 것을 내어줄 것처럼 그녀만 졸졸 쫓아다닌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테라스에서 미련 없이 떠나버리다니, 소설 속 반응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빠져들지 않는 건 만남의 시기가 멀었기 때문일까, 혹은 장소의 문제일까?
원작소설과 비교해보면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후’ ‘황금 정원’에서 첫만남을 가지니까.
하지만 당장 전쟁이 일어날 상황에서 시기를 기다려줄 수는 없었다. 적용해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최후의 대안은 장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거까지 안 되면 진짜로 포기해야 했다.
한편, 연회장에서 아멜리아가 레이몬드에게 춤을 신청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레이몬드가 황제로 분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여주는 카일에게 반했고, 일시적으로 그를 채워줄 대리가 필요했던 거야.
그만큼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아멜리아는 미인계라는 핑계를 밝히고 나자, 내 작전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봐요. 황제의 개인 정원인 황금 정원에 잠입하죠.”
“알겠습니다.”
그녀는 내 의견에 군말 없이 동의했다.
카일에게 반해서 최선을 다하려는 거겠지. 자기도 나름 오기가 생긴 듯했다.
***
나이트 워치에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카일은 최근에 부쩍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경향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해 질 무렵이면 자신의 정원에 들른다고 한다. 이번에도 레이몬드의 눈을 피해서 얻어낸 정보였다.
아멜리아와 내가 향하는 곳은 예전에 황제의 비밀 창고를 털었던 황금 정원이었다. 손쉽게 비밀 쪽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와서는 미리 구해둔 시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황제가 해 질 녘 정원에 머무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밤이라 어두우면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 테니까. 아마 그는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즐기려는 생각이겠지. 우리도 곧 안까지 무사히 도착한다면 황금 정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풍경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밤이 아닌지라 황성 안에는 돌아다니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전시상황이었기에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병력으로 돌려 훈련 중일 것이다. 우리는 다른 시녀들이 그렇듯이 바쁜 척하며 종종걸음으로 목적지까지 나아갔다.
“저쪽이에요.”
나는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드디어 황금 정원에 도착했다.
해 질 녘, 태양은 남은 하루의 빛을 찬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가시광선을 받은 나무들이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그 안에서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황금빛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카일의 모습이 보였다.
아멜리아는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고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두 사람이 잘 보일만 한 위치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빠르게 걸어가던 아멜리아는 걸음을 천천히 늦춰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황제의 개인 정원에 침입할 순 없으니 그랬겠지만, 보아하니 진짜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무표정하게 맞고 있던 카일이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넘겼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다가 아멜리아를 발견했다. 때마침 아멜리아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황금빛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장면은 소설 속 묘사가 시각화하여 떠오를 만큼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이자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니 작가가 얼마나 공들여 묘사했을까?
카일의 낯빛에 감정적인 변화가 떠올랐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너는 그때 그….”
“폐하.”
아멜리아는 그를 보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탓에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이 서서히 떠오르자 아련한 표정이 드러났다.
오. 인지한다. 이제 진짜로 되나 보다!
남녀 주인공의 역사적인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에 감정의 변화가 물결치자, 잠시 목적을 잊고 독자 모드가 되었다. 마음속 깊이 감격스러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너무 감동에 젖어 들어 버린 걸까. 발을 한걸음 힘주어 내디뎠는데 그만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발아래에서 부스럭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황제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이런 눈치 없는 엑스트라 같으니.
드라마 같은 데서 이런 장면을 보면 저 작은 소리가 과연 들릴까, 쟤는 왜 저렇게 방해를 할까 온갖 의문을 가지곤 했었는데. 내가 그 대상이 되다니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에일린…?”
황제가 자세히 보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허공을 휘젓는 그의 손짓에,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호위들이 등 뒤에서 나타나 내 몸을 포박했다.
그들은 당장 나를 붙잡아 황제 앞으로 대령하더니 머리에 쓴 시녀 용 두건을 벗겨버렸다. 그 바람에 애써 꼭꼭 숨겨 두었던 분홍빛 머리칼이 출렁이며 밖으로 완벽하게 노출되어 버렸다.
“그대가 맞군.”
카일의 목소리가 가을비가 내린 다음 날처럼 서늘했다. 조금 전까지 말랑말랑한 사랑에 젖어 들어가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칼을 쥔 듯 표독스러운 표정만이 남았다.
“황성에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정말로 환영하오.”
카일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환영을 말한 얼굴엔 너 참 잘 걸렸다고 쓰여있었다.
***
황제는 아멜리아와 나를 바로 분리해 놓았다. 각자 다른 방에 가두어두라고 시종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두는 장소가 감옥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카일의 마음 공략 프로젝트로 최후에 도전했던 일은 결국 우리의 최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붙잡히는 그림은 그려보지 못했는데. 대책 없이 저지른 걸 보니 나는 실패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왜 아무 소용이 없었을까?
황금 정원에서 아멜리아를 본 카일의 얼굴에 떠오른 건 분명 사랑에 물들어가는 감정이었는데. 아직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니얀, 도와줘!
이런 위기 상황에 부르면 뿅 하고 나타나 나와 아멜리아를 데리고 도망가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는 내 부름 대신 황제의 부름을 받고 내게로 왔다. 간자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올리버츠 경. 어서 오시오.”
“부르셨습니까. 폐하.”
밝은 황제의 목소리에 뒤이어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니얀이었다.
그는 붙잡혀있는 나를 보자마자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듯이 마구 흔들렸다. 그러나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다.
“이분은 코웻 공녀님이로군요.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건지….”
“겁도 없이 황성에 침입했더군. 황금 정원 앞에서 발견했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질책하는 눈빛을 띠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경이 말하길 그간 러스 안에서의 결계의 방해로 실드가 불가능하다고 했지. 다시 구슬로 볼 수 있게 마법을 걸어주게.”
“아, 알겠습니다.”
니얀은 전에 했듯이 내게 실드 마법을 걸었다.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손을 어깨에 얹자 빛이 펴져 나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흡수되었다. 이윽고 손을 거두며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 되었습니다.”
“좋군.”
마법 작용을 눈여겨 지켜보던 황제는 시종장을 향해 말했다.
“시종장.”
“예. 폐하.”
“이제 공녀를 새로운 방으로 모시게. 편안하게 계실 수 있도록 말이야.”
명령을 전한 카일이 간악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