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초대된 왕족들은 내륙을 통해서 오는 이들도 있고,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서 오는 이들도 있었다. 아멜리아의 부하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안내원 역할을 도맡았다.
“어서 오시지요. 대제국 프라레스의 지고하신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아 손님을 모시러 온 심부름꾼입니다. 길을 헤매지 않으실 수 있도록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오. 카일 황제께서 이런 배려를 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따라오시지요.”
완벽한 연기를 해낸 부하들은 미리 꾸며둔 연회장으로 왕족들을 모았다. 카트리아는 가난한 지역이라 연회장을 꾸미는 일체의 비용을 레이몬드가 제공하였다. 일전에 황제의 창고를 털어 넘쳐나는 재산으로 돈을 댄 것이다.
많은 돈을 쏟아부은 연회장은 아주 고급스러웠다. 대제국 황제의 면을 세우는 동시에 왕족들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폐하. 그간 강경하셨습니까?”
“이거 오랜만이로군.”
“폐하의 배려로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가면무도회에 있어 가면의 의미란 손님들끼리 서로를 못 알아보게 하려는 것이다. 파병을 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심적 부담을 줄여주려는 카일의 의도였다.
니얀의 말에 따르면 황제도 진짜 연회장에서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고 했다. 상석인 황좌에 앉아 있으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셈인데, 아마도 연회의 의미에 발맞추려는 것일 테지.
초대되어 걸음한 왕족들은 기본적으로 카일에게 혹은 파병의 대가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작전은 파병 장소를 거짓으로 알리는 것에 있었다.
“보안상 문제로 추후 장소를 다르게 언급하더라도, 오늘 전달한 이 장소로 와주면 된다오.”
“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카일을 잘 아는 레이몬드는 그의 연기를 곧잘 해냈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그가 황제가 아닐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특히 니얀이 변신시켜준 저 황금빛 머리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럼 당연하지, 변신시켜준 게 누군데 그래? 무려 차기 마탑주라고!
어쩐지 나까지 점점 차기 마탑주라는 이름이 주는 힘에 세뇌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분위기 메이커로 투입된 나와 멜라스, 에반은 홀을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떠들어댔다. 소수를 초대한 조촐한 파티긴 했으나 너무 조용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부지런히 움직여댔다.
“여기 음식이 참 맛있군요.”
“그러게요. 아주 고급져요. 황제께서 신경 쓰신 티가 역력합니다.”
이곳의 황제에 대한 신뢰를 주기 위해 입발림 소리를 일부러 흘리기도 했다. 우리의 반응에 현혹된 왕족들은 슬그머니 뒤로 따라와 같은 음식을 맛보기도 했다.
왕족들에게서 받은 초대장은 그대로 내가 빼돌렸다. 이걸로 황제의 연회장에 잠입할 예정이었다.
“저 잠시 실례 좀 할게요.”
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자리를 비웠다. 마침 새 왕족이 도착하는 바람에 레이몬드가 바빠 보이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손님들이 제법 자리를 채우기도 했고 또 멜라스와 에반이 열 일을 해주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홀에서 몰래 빠져나온 나는 아멜리아와 만나 목적지로 향했다. 황제의 연회장의 위치는 니얀이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가 우리를 실어 날라주었다.
“고마워요. 니얀.”
“뭘. 이 정도 가지고요.”
내 가벼운 인사에도 니얀은 볼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내게 인정을 받아서 기쁜 것 같았다.
그간 칭찬에 인색했나? 앞으로 칭찬을 자주 해줘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회장 문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를 발견한 문지기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지요.”
“여기 있소.”
문지기는 초대장과 명단을 확인하고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소.”
열린 문틈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미처 빼돌리지 못한 왕족들 3분의 1가량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쪽으로 3분의 1이 왔으니, 남은 3분의 1은 아예 참석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다행이야.
파병할 숫자를 많이 줄였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아멜리아와 나는 카일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황좌 앞으로 갔다. 그저 직진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데도, 다가가는 발걸음이 긴장으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협박을 받았던 때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폐하.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어서 오시오. 먼 길을 오느라 수고했소.”
최대한 태연함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손이 달달 떨려왔다. 얼마 전 아멜리아와 방문한 사냥터에서도 카일과의 거리가 가깝긴 했지만 지금과는 엄연히 상황이 달랐다. 그가 나를 바라본다는 게 무척이나 두려웠다. 가면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얼굴을 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황제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간략하게 화답하고 끝냈다. 정확히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기며 얼른 그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해내야 할 일들은 지금부터였다. 아멜리아의 작전의 시작이었다.
황제가 홀을 한 바퀴 돌며 초대한 왕족들에게 인사를 나누고서 황좌로 다시 돌아가려 할 때, 그녀가 카일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한 마리의 백조 같은 우아한 몸짓으로 드레스의 양 끝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내 말에 협조를 잘해주고 있었다.
전에 사냥터에서 황제의 약점을 알아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황제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허락하는 말로 아멜리아의 뒤를 따랐다. 호위까지 물린 걸로 보아 원작의 남주로서 여주에게 끌린 게 틀림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한산한 테라스로 이동하여 문을 닫았다.
이렇게까지 경계심을 풀 줄 알았으면 암살이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얌전히 아멜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내게 무슨 일인가.”
“폐하께 드리고 싶어서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맞아. 선물이 있지. 그건 바로 아멜리아 본인이고.
나는 속으로 깊이 동감하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선물이라면 시종에게 바로 줘도 되지 않은가.”
“특별히 폐하께 직접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멜리아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붉은 벨벳 재질로 된 보석상자가 딸깍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에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파란색 보석이 들어있었다.
“보석?”
“폐하의 눈동자를 꼭 닮은 에메랄드 보석입니다. 받아주세요.”
“내 눈동자는 파란색이지 않은가. 이건 초록색에 가까운데?”
“제게는 그 눈빛이 에메랄드처럼 보인답니다.”
“호오. 그런가.”
대화 내용은 딱히 정해주지 않았는데도 아멜리아는 이야기를 잘도 술술 이어갔다. 카일은 상자를 받아들면서 그녀의 말에 경청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지켜보고 있던 나는 찰나의 틈을 발견하고선 끼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래. 지금이야.
“엇. 벌레가 붙었어요. 제가 떼어줄게요.”
나는 황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하이톤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없는 벌레를 떼어낸다며 아멜리아의 눈 가면을 툭툭 쳤다.
“왜 이렇게 안 떨어지지?”
당연히 일부러 한 연기였다. 벌레 핑계를 대면서 가면을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잘 고정되어 있던 눈 가면이 순간 강한 힘에 의해 날아가 바닥에 안착했다. 깜짝 놀란 아멜리아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떨어진 눈 가면을 쳐다보았다.
그 덕에 호박색 눈동자가 밝은 빛 가운데에 훤히 드러났다. 결 좋은 피부와 선이 곱고 앙큼한 눈매는 그 매력이 말할 것도 근사했다.
눈부신 여주의 미모를 확인한 나는 이번에는 남주의 반응을 곁눈질로 관찰했다.
당황하는 아멜리아를 빤히 지켜보던 황제는 대뜸 자신의 가면도 풀어내었다. 그러더니 아무렇게나 되어있는 머리칼을 정돈하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황금빛 머리칼이 햇빛을 반사하며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얼굴이 공개되어서 무척 놀랐겠군. 혼자만 보여주면 부끄러울 테니 내 얼굴도 보여줘야겠어.”
카일이 입가에 근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숙녀를 향한 신사의 세심한 배려였다.
그 순간 아멜리아의 볼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도도하고 고고한 그녀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수줍은 표정이었다.
오오. 이거야. 드디어 두 남녀주인공이 반한 건가 봐!
독자 모드가 된 나는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겨우 입술을 떼어낸 아멜리아가 자그마하게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카일은 얼굴에 도로 가면을 썼다. 그러더니 몸을 홱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럼 좋은 시간 보내길.”
그러더니 테라스의 문을 열고서 돌연 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엥? 그냥 저렇게 가버린다고?
보통 황제들은 사랑에 뿅 빠지고 나면 여인을 자기 곁에만 두려고 하지 않나?
뭔가가 이상했다. 아니, 다른 이들이랑 비교할 것도 없이 원작소설에서 카일은 아멜리아에게 반한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는데 왜 저렇게 쿨한 반응일까.
뭐지? 이 싸한 느낌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 실은 나는 아멜리아가 무릎을 굽혀 눈 가면을 들어 올리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가면을 쓰는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실수를 해버렸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내 사과에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얼떨떨해 보였다.
우리는 이윽고 황제의 연회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가짜 연회장으로 복귀했다. 돌아왔을 땐 손님들이 둘씩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잠깐 없어졌었다는 걸 눈치챘는지 레이몬드가 나를 발견한 즉시 다가왔다. 그런데 곁에 있던 아멜리아가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손등이 위로 향한 것을 보아 그에게 에스코트를 요청하는 거였다.
“저와 춤을 추시겠어요, 폐하?”
“….”
레이몬드는 잠시 경직되더니 눈동자를 굴려 나를 보았다.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황제를 연기 중인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그만이 알아챌 수 있도록 어깨를 살짝 들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좋소.”
하나도 좋지 않은 음성으로 겨우 대답한 레이몬드가 아멜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 여주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나로선 당최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