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99화 (99/125)

99화

“황제가 카트리아에서 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회의를 연 첫마디. 이는 아멜리아의 카고미슬이 입수해온 특급 정보였다. 카트리아는 프라레스 제국의 변방에 있는 도시로, 다른 왕국들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연회를 연다고?”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반응이 같았다. 이 시국에 연회를 열다니 황제가 제대로 미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카트리아라….”

그러나 레이몬드는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카일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가 아는 카일은 막연히 미친놈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치밀하고 계산적이었다.

“왜 퍼먼트가 아닌 카트리아일까?”

“대공 전하께서 예측하신 대로입니다. 주변 왕국들에게 파병을 받기 위한 전초 작업인 거죠.”

“아.”

진짜 미친놈이었다면 수도에서 연회를 개최했겠지?

하지만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장소에 대한 특수성이 있는 거였다.

그나저나 이것이 이용할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기에, 아멜리아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연회는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겠죠?”

“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 연회가 가면 연회라는 겁니다.”

“가면 연회…!”

아멜리아가 전한 소식은 정말로 희소식이었다.

“파병하는 왕국들이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기 꺼릴까 봐 준비한 배려죠.”

“그렇군요.”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빛냈다.

카일은 카트리아에 가면 연회를 열어 이웃 왕국의 왕족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이유야 뻔했다. 파병에 대한 경제적인 대가 외에 사회적인 대가를 지불하려는 것일 테지.

병사를 내어주면 황제와의 직통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파병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왕이 있다면 이번 일로 마음을 돌리려는 수작일 테고.

여러모로 놀라운 행보였다. 레이몬드의 생각대로 카일은 철저한 계산 하에 행동하고 있었다.

“좋은 기회임은 분명합니다만, 저희가 가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흐음.”

턱을 매만지며 가만히 생각해 보던 멜라스가 운을 떼었다. 같이 고심하는 레이몬드를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왕족들을 다른 장소로 빼돌리면 어떨까요? 설령 일부라도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파병에 대한 마음을 접는 것에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오호.”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요?”

나의 의견에 레이몬드와 멜라스가 흥미를 드러내자 마음이 흐뭇해졌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최대한 뇌를 쥐어 짜낸 결과였다. 왜냐면 나는 반드시 저 연회에 참석해야만 하니까!

대공의 세력이 내부에서 단체로 움직인다면 나와 아멜리아가 거기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안 그래도 황제의 곁을 노리고 있던 터라 이 기회를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퍼먼트에서 카트리아까지는 엄청나게 멀었지만, 황제는 보나 마나 니얀이 텔레포트로 데려다줄 것이 뻔했다.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더라도 이런 보조적인 도움은 어쩔 수 없이 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고로 우리도 니얀의 도움을 받는다!

레이몬드는 연회에 참석할 일행을 꾸렸다.

거기에는 일을 지시할 레이몬드와 멜라스, 에반, 아멜리아와 그녀의 직속 부하 몇 명이 차출되었다. 카고미슬의 멤버들이 동행하는 것은 카트리아 내의 지리에 대해 설명하고 안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꼽사리로 끼었다.

레이몬드가 안된다며 결사반대했지만, 나의 고집과 아멜리아의 권유로 겨우 통과했다. 연회를 잘 아는 레이디가 필요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알았다. 단, 일행 중 누구라도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도록 해.”

“약속할게요.”

속마음과는 반대되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태연하게 굴었다.

곧 카트리아에서의 연회 날이 밝았다.

***

연회라고 해도 잠입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옷차림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믿었는데…….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멜라스는 러스 안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디자이너를 불렀다. 그녀가 방문하여 드레스부터 구두,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꾸며주었다. 전시 상황이라도 물자가 끊긴 것이 아니었고, 황제 쪽에서 러스를 고립시키기에는 아직 인력이 부족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와.”

“공녀님.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변신한 내 모습에 디자이너와 따라온 몇몇 하녀들이 감탄을 흘렸다. 나는 이웃 나라 왕족 중 하나로 꾸몄기에 특별히 더 화려했다.

“당장 결혼하러 가셔도 되겠어요.”

“그런가요. 하하.”

결혼이라는 말에 괜히 머쓱하여 뒤통수를 매만졌다.

감탄 속에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녀 하나가 문을 열자, “다 됐습니까?”하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대공 전하.”

하녀가 목소리 뒤에 선 레이몬드를 발견하고서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제복 차림의 레이몬드가 방으로 들어섰다.

각 잡아 선을 세운 까만 제복 안에 순백의 셔츠, 그 아래에 곱게 매듭지어진 넥타이가 보였다. 어깨 장식과 벨트, 단추는 금빛으로 적절한 포인트를 주었다.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칼은 6대 4 정도의 가르마를 타 한쪽으로 넘겨 반 깐 머리를 완성하고 있었다. 제복은 길게 뻗은 그의 팔다리를 도드라지게 해주었고, 듬직한 체격 위에 어울리는 잘생긴 얼굴이 나를 보며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 심쿵! 나의 최애, 제복의 레이몬드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심장 격동에 가슴께에 주먹을 올렸다. 그의 말끔한 차림은 바람이라도 부는 듯 가슴속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레이몬드.”

“에일린. 정말 아름다워.”

나의 진득한 눈빛을 눈치챘을까? 레이몬드 역시 흘러내릴 것 같은 뜨거운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다 나가라.”

그러고는 당장에 아랫사람들을 물렸다.

레이몬드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둘이 춤이라도 출까?”

“응?”

“연회에 참석하지만 거기서는 추지 못할 테니까.”

“네. 좋아요.”

그의 남은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아무런 음악도 없었지만 우리는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레이몬드가 입에서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내디디고 뒤로 물러났다.

예전에 함께 참석했던 연회에서처럼, 그는 춤이 미숙한 나를 잘 이끌어주었다.

“춤을 추는 것도 오랜만이로군.”

능숙한 리드를 따라 좌우로 움직이자 어느새 숨이 차올랐다. 기분 좋은 호흡이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면서 자신의 몸쪽으로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쪽, 하고 맞췄다.

“에일린. 가서 위험하지 않게 조심해야 해.”

“알았어요.”

내가 미소로 화답하자, 그가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귀엽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

니얀은 우리 일행을 카트리아에 있는 카고미슬의 아지트로 옮겨주었다. 한꺼번에 열 명 가까이의 인원을 텔레포트로 이동시킨 것이다. 아멜리아는 이때 또 한 번 승차감에 감탄하여 찬사를 쏟아내었다. 그녀와 같이 텔레포트 경험이 있던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쳤어. 이게 텔레포트라니! 그동안 내가 탔던 건 쓰레기인가.”

“거리가 대체 얼마야? 게다가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이동시킨다고?”

이어지는 칭찬 타임에 니얀의 어깨가 또 한 번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서 카트리아의 풍경을 구경했다. 정원을 채우고 있는 대다수의 나뭇잎들이 대체로 작고 얇았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본 것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카트리아는 프라레스 제국의 북쪽 영토로, 남쪽에 있는 퍼먼트와는 기후가 달랐다. 요즘이 따뜻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어서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우리는 아멜리아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은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그래도 귀족이 머무는 곳이라 있을 건 다 갖춰져 있었다. 건물은 따뜻해 보이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외관이나 정원이 정갈하게 잘 관리된 상태였다.

“저택이 깔끔하네요.”

“고맙습니다. 뭐가 없어서 그래요.”

나의 칭찬에 아멜리아는 가볍게 대꾸했다.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간 곳은 손님 응접실이었다.

“여기에 앉으세요.”

레이몬드와 멜라스, 에반, 내가 소파에 둘러앉으니 아멜리아가 하인과 하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하인들이 장작을 넣고 화롯가에 불을 피우자 곧 온기가 퍼져 방 안이 훈훈해졌다. 방에서 나갔던 하녀들은 따뜻한 차를 테이블 위에 세팅하고, 겉옷을 가져와서 어깨에 걸쳐 주었다.불을 때고 옷도 입자 이제야 팔에 돋아있던 소름이 가라앉았다. 따뜻해지니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순식간에 와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남았네요. 몸을 덥히고 나서 출발하죠.”

“그러는 게 좋겠군.”

맞은편에 앉은 아멜리아의 말에 레이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일행이 세운 계획은 이랬다.

이웃 나라 왕족들의 경로를 파악하여 연회로 가는 길 중간에 황제 측의 안내원인 척하며 등장한다. 그러고는 그들을 황제의 것이 아닌 다른 연회장으로 안내한다. 이 연회장은 아멜리아가 미리 카고미슬에 명령하여 만들라고 지시해두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대공은 황제인 척, 나는 참석한 이웃 나라 왕족인 척하며 분위기를 조성한다. 어차피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복장만 보일 테니까.그리고 내게는 단독계획이 따로 있었다.

왕족들 사이에서 바람을 좀 잡아주다가 슬쩍 빠져나와 진짜 황제의 연회에 참석한다. 아멜리아를 데리고서 말이다. 거기서 두 사람만이 함께할 공간을 만들고 실수인 척 그녀의 가면을 벗기는 거지. 그러면 카일이 아름다운 아멜리아를 보고서 사랑에 빠진다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이번에야말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

나는 주먹을 쥐고서 홀로 굳게 다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