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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98화 (98/125)

98화

아멜리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계획들이 쪼로록 세워졌다. 그 계획들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를 향하고 있었다. 바로 황제와 아멜리아가 마주치게 하는 것!

원작소설에서 두 사람은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사랑에 푹 절어진 카일은 세상에 둘도 없는 팔불출이 되어 아멜리아가 하자는 대로 다 한다. 아멜리아는 정의로운 여주였기에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두 사람이 만나도록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열쇠였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릴 순 없었다.

사실 이곳은 소설 속이고 너는 여주라서 남주인 황제를 만나야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설명이 통할 리도 없고, 말한다고 한들 자기를 기만한다고 여길 테지.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예전에 레이몬드한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지몽을 거론하는 것이다.

“공녀님께 예지력이 있으실 줄은 몰랐어요.”

아멜리아와 나는 단둘이서만 티타임을 가졌다. 연무장을 벗어나 함께 내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사이 레이몬드를 억지로 떼어내느라 애를 먹었지만, 얼렁뚱땅 성공이었다.

아멜리아는 앞에 놓인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놀라움과 존경심이 깃들어있는 눈빛이었다.

“생각보다 더 굉장한 능력을 갖고 계시네요. 치유력도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능력이 많으세요.”

“아, 네. 하하하.”

쑥스러움에 나는 뒤통수를 매만졌다.

아멜리아에게는 내게 치유력이 있다는 것만 소개했지, 구체적인 건 언급하지 않았다. 치유의 근원이 침이라는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엄성과 연관이 있기에 비밀로 붙여 둔 거지. 앞으로도 가능한 한 계속 숨길 작정이었다.

방법을 감추었기 때문인지 아멜리아는 나를 정말로 성녀 취급했다.

“저를 따로 보자고 하신 연유가 뭐죠?”

“아까 제게 전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물으셨죠?”

“네.”

“그 방법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예요.”

“오. 그렇군요.”

그녀는 내게 어서 말해달라며 기대하는 눈빛을 쏘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밑밥에 불과했다.

“며칠 전에 제가 꾼 꿈인데요.”

“네.”

“아멜리아가 카일 황제 가까이 가서 그를 관찰하면 약점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네요.”

“헛. 그게 정말인가요?”

아멜리아는 내가 전한 꿈 이야기를 신기해했다. 자신이 간혹 들을 수 있었던 예지몽과는 전혀 결이 다르다고 말했다. 당연한 거였다. 나는 예지몽을 가짜로 지어낸 거니까.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말도 안 된다고 팽했을 텐데. 예언가라고 밝힌 이상 내 말은 최고의 방법으로 둔갑했다. 역시 신력을 핑계 대는 게 최고라니까?

나는 아멜리아와 함께 황제의 곁에 접근할 방법에 관해 의논했다. 그 의논 끝에 카일이 혼자 있는 스케줄을 파악해 움직이기로 약속하고서 헤어졌다. 물론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멜리아와 헤어지고 난 후 나는 곧장 레이몬드에게로 불려갔다.

방 밖에서 부하 하나가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아멜리아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는 명령을 전하며 나를 이끌고 갔다.

“에일린.”

창가에 서 있던 레이몬드는 문이 열리자마자 뒤로 돌아보았다. 초조한 기색이 얼굴에서부터 온몸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무척 궁금해하고 있을 테지.

반란 세력 전체의 수장인 그가 모를 계획이 존재한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레이몬드는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나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품 안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어깨를 꼭 감싼 채로 얼굴을 내 머리칼 사이에 묻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레이몬드의 그윽한 체취가 풍겨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레이몬드?”

“에일린과 떨어지는 게 싫어서 그래. 잠깐만 붙어있자.”

그는 마치 오랜 기간 헤어졌던 연인처럼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계속 곁에 있고 싶어.”

“늘 곁에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러스에도 왔는걸.”

“멀어질까 봐 두려워. 어느 날 갑자기 말없이 사라질까 봐.”

우리 레이몬드, 촉이 좋은데?

그 말을 듣고서 하마터면 놀란 티를 낼 뻔했다. 아예 떠나는 건 아니지만 몰래 나갔다 올 건 맞았으니까.

내가 계획 중인 비장의 방법은 결코 레이몬드가 반길만한 수가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아멜리아와 황제가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니, 그가 알게 되면 위험하다며 반대할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꼭 성공시켜야만 하는 길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좋은 승리는 무혈승리라고 하잖아? 만약에 황제가 아멜리아에게 반해서 이 전쟁을 여기서 끝낼 수만 있다면 이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걱정 마요. 레이몬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등으로 손을 뻗어 그를 살살 쓰다듬었다.

레이몬드는 아멜리아와 나눴던 대화 내용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굳이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나눈 대화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여긴 듯했다.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다행스럽기도 했기에 나는 가만히 있는 쪽을 택했다.

이후 나이트 워치로부터 카일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황제는 전쟁 상황에서 압박감이 심한지 요즘은 홀로 사냥터에 간다고 했다. 항상 귀족들을 거느리고 가는 것과는 다른 행태였다.

됐다. 거기서 아멜리아랑 만나게 하면 되겠어.

이 일을 당장 아멜리아와 공유하고서 계획을 짰다.

작전은 둘이서 사냥터로 가 나무나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자는 내용이었다. 아멜리아는 나를 배려해서 저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난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왜냐면 내게는 밝히지 못한 다른 꿍꿍이가 있었으니까.

사냥터를 오가는 것에는 니얀의 텔레포트를 탔다. 황제의 일정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빠져나오는데 큰 부담이 없어 가능하다고 했다.

“와, 승차감 뭐죠? 텔레포트가 이렇게 편안할 수가 있는 거군요.”

대마법사의 텔레포트를 처음 타본 아멜리아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찬사가 쏟아지자 니얀은 어깨가 한껏 올라가 으스댔다.

“크흠. 거봐요. 제가 이 정도라니까요.”

하늘 위로 치솟을 것 같은 어깨를 보며 미간을 좁히다가 아멜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편한 거예요?”

“완전요. 저희 카고미슬에도 마법사가 있어서 텔레포트를 타본 적이 있거든요.”

아멜리아는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았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부하 마법사의 텔레포트를 탔을 땐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우며 10시간 정도 마차를 타고 이동한 것처럼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고 했다. 마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그 정도면 그냥 마차 타고 가는 게 낫겠는데?

“그러니까 엄청난 겁니다. 실력이 아주 좋으신 분인가 봐요.”

“차기 마탑주니까 실력이 좋겠죠?”

“예? 차기 마탑주라고요?”

좀처럼 놀라지 않는 그녀는 내 말에 깜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바닥에서 발이 떨어질 정도였다.

“차기 마탑주가 어째서 텔레포트 셔틀을….”

아멜리아는 충격이 대단했는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마탑주라는 존재가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아멜리아가 되게 놀랐나 봐?”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니얀이 나를 보며 눈을 흘겼다.

나중에 오기로 한 그가 잠시 떠나고, 아멜리아와 나는 일을 준비했다.

황제가 잠시 쉬며 머물만한 절벽 근처에는 한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다. 저기에 올라타 있으면 들키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붙을 수 있겠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나는 자리를 적당히 배치했다. 모습이 절대로 들키지 않을 더 높은 곳에 내가 머물고, 아멜리아는 좀 더 아래였다. 황제의 약점을 꿰뚫어 보기 위함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황제에게 그녀의 모습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었더니 잠시 후 말이 다그닥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이었다. 그는 예상한 그대로 절벽 쪽으로 오더니 아멜리아와 내가 올라탄 나무 바로 아래에 말을 세웠다. 우리의 시선에 황제의 정수리가 보였다.

아멜리아는 내 예언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를 요리조리 살피는 중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이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작은 돌멩이를 품에서 꺼내어 아래쪽으로 던졌다.

“아야.”

돌은 정확히 황제의 머리를 맞췄다. 성공한 것과는 별개로 살짝 통쾌한 마음이 일었다. 얄미운 아이에게 꿀밤 한 대 먹인 기분이랄까.

카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멜리아와 카일의 시선이 정확하게 맞닿았다. 당황한 아멜리아가 순간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 때문일까. 카일은 위쪽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고삐를 흔들어 저쪽으로 말을 몰아 사라졌다.

“휴우. 들키는 줄 알았어요.”

거리가 충분히 벌어지자 아멜리아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죠. 제 눈에 황제의 약점 같은 건 보이지가 않았어요.”

“그… 그래요?”

나는 어리벙벙한 바람에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러버렸다. 분명히 카일이 아멜리아를 본 것 같았는데 어째서 그냥 지나친 걸까?

일부러 무리해서 상황까지 설정했는데 아쉽게도 좋은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첫 번째와는 달리 두 번째는 시도하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아멜리아에게 내세운 핑계도 힘을 잃어가고, 레이몬드가 나와 아멜리아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운 좋게 몰래 다녀왔다고 해도 반복된다면 반드시 꼬리를 잡히고 말 테니까.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니 답답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에 운 좋게도 황금 같은 기회가 굴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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