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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97화 (97/125)

97화

지난번 호위 인터뷰를 할 때도 느꼈지만, 코아가 평소에 과묵해서 그렇지 한 번 입을 열면 말을 참 잘했다. 아멜리아도 똑 부러지는 타입이라 결코 밀리지 않았고 말이다.

“흥. 그 잘나지도 않은 검술을 내게 증명해 보인다면 인정해주지.”

“좋습니다. 제게도 그 자부심 강한 검술을 한 수 가르쳐주시지요.”

말싸움 끝에 도달한 결론은 결투였다.

아니,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는 거지?

같은 편끼리는 싸우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어서 말려야 해요.”

나는 막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들에게로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내 어깨를 잡는 손길에 다리를 멈춰 고개를 돌려보았다. 레이몬드가 어깨에 손을 갖다 대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아드리엔이 서 있었다.

“어서 말려야죠?”

내가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데도 레이몬드와 이드리엔의 표정들은 태연했다. 심지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게 아닌가.

그럼 그냥 보고만 있자고? 이 상황, 왠지 기시감이 드는데? 어디에서 겪었더라.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퍼뜩 생각이 난 장면이 있었다.

아! 레이몬드랑 아드리엔이 결투하려고 했을 때도 그랬어.

그때는 말리려고 하는 나를 코아가 붙들었고 말이지.

“뭔데? 검사는 검으로 말한다 그거야?”

“바로 그거지.”

아드리엔이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실실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칼을 맞대야만 친해진다는 논리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온 거야?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은 방식에 답답함이 차올랐지만, 우선은 두 사람의 말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연무장에 선 아멜리아와 코아는 진검 대신에 목검을 들었다. 아군인 이상 서로에게 날붙이를 들이대는 건 군법상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진검이었다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아까운걸.”

“다치게 했다간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죠.”

“그건 내 쪽에서 할 말인데?”

칼을 들고서 대치한 상황임에도 두 사람의 입은 도통 쉬질 않았다.

나는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마음이 난감해졌다.

누가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를 뿐이니까. 세상의 어떤 단체라도 기존 세력과 신규세력이 화합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다만, 그 방식이 결투라는 점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대되는 마음도 들었다. 무려 여주의 결투가 아니겠는가? 실력이 뛰어난 코아와의 승부에서 누가 이길지도 궁금하고.

나는 말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치고는 한껏 들뜬 마음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내 눈빛을 보며 아드리엔이 못 말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해버렸다.

네가 뭘 알아? 저 사람은 무려 여주라고, 여주!

대공의 부하들은 누가 이길지 서로 판돈을 걸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으로 인지하기보다는 즐거운 유희 거리를 구경하는 분위기였다. 병사들은 모처럼 하하호호 웃으며 구경꾼이 되어있었다. 의외로 전시 상황으로 딱딱하게 굳었을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먼저 공격한 것은 아멜리아였다.

아멜리아는 목검을 꽉 쥐고서 상체를 낮춰 코아에게로 달려나갔다. “이얍!”하는 기합과 함께 빠르고 거센 공격을 연속해서 퍼부었다.

“우와.”

목검이 춤을 추듯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야말로 쏟아진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속공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코아였다. 그녀는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하면서 팔을 빠르게 놀려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헙. 대단한데?”

“정말 엄청나!!”

두 여인의 검술 대결은 예상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했다. 관객이 된 병사들은 각자가 선택한 쪽에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재밋거리로 생각했던 구경에 모두가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쳇. 제법 하는군.”

“이 정도는 기본이죠.”

아멜리아가 뒤로 물러나면서 혀를 찼다. 이에 코아가 콧방귀를 뀌며 응수를 했고 말이다.

도로 거리를 띄운 아멜리아는 가만히 서서 양손으로 목검을 붙잡았다. 그 기이한 자세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아멜리아의 병사들만이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질러댔다.

보고 있던 나 역시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원작소설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내용이니까. 지금 아멜리아는 몇 년 동안 어렵게 훈련하며 익혀둔 필승 비기를 선보이려는 거였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는 능력 여주의 걸크러쉬 사이다물로, 여주에게 많은 능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저 비기도 여주가 가진 강력한 스킬 중의 하나였다. 이름하여 제1 비기 ‘바람 가르기’.

아멜리아가 또다시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차고 나갔다. 신형이 화살처럼 빠르게 쏘아지자 코아는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바람 가르기는 그렇게 대응해서는 안 된다.

“코아. 막지 말고 피해요!”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구의 편을 들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코아가 다치는 것만은 견딜 수 없었으니까. 내가 치료해줄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코아는 다행히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방어 자세를 풀며 몸을 비스듬히 꺾었다. 아멜리아의 목검이 닿기 직전에 빠르게 움직여 그녀가 경로를 변경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곁을 지나치던 아멜리아의 등에서 빈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손으로 칼날을 만들어 뒷목을 내리쳤다.

“크윽.”

비기에 실패하고 급소를 맞은 아멜리아는 몸의 균형이 무너져 비틀거렸다. 이게 실전이었다면 코아는 분명 손에 단검을 쥔 채 뒷목에 꽂아 넣었겠지. 고로 이 결투의 승자는 명백히 코아였다.

“내가 졌어.”

아멜리아는 털털한 성격답게 승복을 쉽게 인정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자 코아가 손을 내밀었다. 아멜리아는 손을 맞잡아 몸을 일으켰다.

“좋아. 내가 졌으니까 네 생각을 인정하고 따르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의견이 있다면 미리 에반에게 건의하시고 의논하시면 될 겁니다.”

“그렇게 하지.”

“덩달아 제 무례도 사과드립니다.”

멋진 결투였고 멋진 여인들이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자 관중석에 있던 부하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 하나 선택할 것 없이 두 사람의 이름을 번갈아 가며 외치고 있었다.

진짜로 검으로 말했고 그게 통했구나.

자칫 골이 깊어질 뻔한 병사들 사이는 이 일로 오히려 깊은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 이쯤 되니 나도 검사의 방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축제를 즐기다가 헤어지는 것처럼 모두가 왁자지껄 떠들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 역시 한시름 덜었다며 기분 좋은 여운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멜리아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코웻 공녀님. 잠깐 저 좀 보시죠.”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레이저처럼 나를 향해 쏘아졌다. 그녀는 나와 일대일로 대화 나누기를 원했다. 왜 갑자기 나를 불러내는 거지?

내가 맹수 앞의 사슴처럼 마음이 쪼그라들어 우물쭈물하고 있자, 곁에 있던 레이몬드가 대신 나서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여기서 얘기하지.”

“공녀님과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요. 대공 전하.”

“내가 못 들을 말은 없는 것 같은데?”

아멜리아는 잠시간 레이몬드를 보며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체념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다른 제안을 건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을 물려주시죠. 대공 전하께서 함께 자리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셔야죠.”

“좋다.”

레이몬드는 그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부하들에게 모두 연무장에서 나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시끌벅적하던 곳이 고요해지고, 이곳에는 우리 세 사람만이 남았다.

“됐나?”

“네.”

아멜리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코웻 공녀님.”

“네.”

“아까 제 공격을 피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혹시 검술을 익히셨나요?”

아. 그게 궁금해서 그랬구나.

나를 왜 부르나 했더니 자신의 비기가 무용지물이 된 이유를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바람 가르기는 아멜리아의 세력만이 알고 있는 비밀병기였다. 그걸 한눈에 간파당하고 말았으니 초조해진 거겠지.

아멜리아의 관심을 산 것은 내게 있어 좋은 기회였다.

그녀의 흥미를 단숨에 사로잡아버렸으니 이를 이용하는 게 좋겠다고 여겨졌다. 찰나에 판단을 끝내자, 나는 팔짱을 끼며 조금은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예언가예요. 잠을 자면서 예지몽을 꿀 수 있죠.”

내 당당한 선언에 놀란 것은 아멜리아보다도 레이몬드 쪽이었다. 그가 어깨를 움찔하며 나를 슬쩍 쳐다봤으니 확실했다. 오히려 아멜리아는 납득이 됐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뭔가 다른 게 있으실 줄 알았습니다.”

예언가라는 말에 그녀는 내가 믿음직하게 여겨졌나 보다. 태도가 훨씬 예의 바르고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대공 전하의 세력이 근래 들어 급성장한 건 공녀님의 공이겠군요.”

“맞아요.”

나는 태연하게 긍정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거기까지 간파하다니 과연 여주는 명철했다.

“그렇다면 이 전시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가지고 계시겠네요.”

“물론이죠.”

이번에는 대공이 대놓고 고개를 홱 돌렸다. 커다래진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을 담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호. 그 방법이 무엇이죠?”

아멜리아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대단히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그건….”

내가 얼른 말을 잇지 않자, 내 입술에 주목하는 두 시선이 뚫어질 듯이 강렬했다. 대답을 기대하는 초조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둘이서 따로 이야기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 중 하나의 기대를 무참히 깨어버려야 했다. 레이몬드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은 옆얼굴이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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