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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96화 (96/125)

96화

대공의 군사가 되고 싶다며 누군가가 지원을 해 온 것이다. 멜라스와 먼저 이야기를 끝낸 그 사람은 바로 이번 회의부터 참석한다고 했다.

“멜라스. 그자는 언제 오는가?”

“일정상 조금 늦는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기에 곧바로 간부 회의에 오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며 기다리고 있자니, 그 사람이 다가왔다. 회의장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내가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마치 고고한 장미처럼 검붉은 빛깔의 머리칼은 구불구불 굽이쳐 허리까지 내려오고, 호박색 눈동자는 빠져들듯이 신비스러웠다. 강아지처럼 순한 인상이기보다는 고양이처럼 앙칼지면서도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은, 누가 봐도 시선을 끌 만큼 고혹적이었다.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외형. 바로 원작소설 [미친 황제를 길들였다]의 여자주인공인 아멜리아 소프였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안을 휘둘러보며 간단한 묵례를 올렸다. 큰 세력의 우두머리로서 위엄과 카리스마가 가득 찬 모습이었다.

헉. 드디어 여주가 등장했어!!

나는 글로만 보던 여주가 현신한 것에 감동하여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분은 소프 남작 가의 영애로, 카고미슬의 수장입니다.”

“아멜리아라고 불러주세요.”

멜라스의 소개에 아멜리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웃음에 몇몇 남자들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여자주인공의 위엄이로구나!

나는 소설의 팬으로서 속으로 깊은 감격에 젖어 들었다. 겉으로는 기존 표정을 유지한 채로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군사에 지원하자마자 단박에 간부 자리로 등극한 것이 아멜리아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트 워치가 용병 길드 및 정보상으로 수도에서 주름잡고 있다면, 변두리 영역에는 아멜리아의 ‘카고미슬’이 있다.

나이트 워치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제국 안이라면 황제의 손아귀에 있을 뿐이었다. 반면 카고미슬은 그야말로 잡히지 않는 존재.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까지 세밀하게 얽혀있기에 외교적 영향력이 높았다. 이 때문에 전쟁의 규모가 커질 시 크게 도움이 될만한 점을 높이 산 거겠지.

“현재 변방의 상황은 어떤가?”

“혜택을 받는 수도나 인근은 그나마 괜찮지만, 변방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어쩌면 선황제 때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어요.“

대공의 질문에 아멜리아가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황제를 향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현 황제는 비리 그 자체예요. 저는 황제를 몰아내기 위해 대공 전하께 협조하고 싶습니다. 제 목숨을 다할 것을 맹세하죠.”

그녀는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멜리아의 진심이었다. 황제와 사랑에 빠진 이후에 제국의 모든 비리를 척결해내는 올곧고도 유능한 황후가 되니까. 여주는 그런 포지션이었다.

“황제가 다른 왕국에 파병을 요청할 가능성은?”

대공은 일부러 떠보는 질문을 흘렸다. 멜라스가 인정했다고 해도 아직은 알지 못하는 아멜리아를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미 그러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프라레스 제국으로 진격할 병사를 지원받는 모양이더군요. 이웃한 스무 군데의 왕국에서 포착한 사실입니다.”

“헛. 벌써 진행 중이라니.”

그녀의 대답을 통해서 이웃 왕국들이 황제의 요청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파병의 대가가 후할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백성들을 몇백 명 내어주면 제국 황실과의 연결고리를 획득할 수 있으니 마다할 리가 없겠지.

“황제는 빈털터리일 텐데 어째서 그런 게 가능하지?”

의아하게 여긴 멜라스가 물었다.

우리는 황제의 비밀창고를 턴 전적이 있었다. 이는 곧 카일의 수중에 재산이 넉넉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파병의 대가로 제국 내의 이권을 받기로 약조했다고 한들, 요청을 승인한 왕국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예 제국을 탈탈 털어서 내어주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규모였다.

“황제의 비리는 상상 이상입니다. 제국 내에서만 재산을 축적하고 있을 거라는 건 큰 착각이죠. 제가 알고 있는 제국 바깥에 황제의 창고만도 열두 군데가 넘습니다.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요.”

“헛!”

“그럴 수가.”

아멜리아가 이야기해 준 창고의 규모는 우리가 털었던 것의 몇 배에서 몇십 배가량 되었다. 제국 내와는 달리 국외는 귀족이나 다른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나 또한 이런 구체적인 정보는 처음 접했다. 원작소설은 정치보다는 사랑 이야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여주와 남주가 만난 후로는 정치 상황이 상당히 뭉뚱그려서 표현되어 있던 것이다.

“그렇군. 앞으로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바로 보고해주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멜라스의 당부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황제의 재력에 대한 경악과 파병 사실이 주는 절망만을 잔뜩 안은 채로 끝이 났다. 한 가지 더 붙이자면, 아멜리아의 빼어난 미모와 정보력에 대한 놀라움이 추가될 수 있겠지.

다른 사람들은 오직 아멜리아의 사회적 영향력만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긴 하지만 원작을 아는 나는 그녀의 진짜 가치를 알고 있다.

원작에서 아멜리아는 카고미슬의 수장으로서 카일 황제를 견제한다. 카일은 절대 권력자로서 자리매김한 이후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건방진 무리를 쓸어버리려고 일을 도모하다가 황성의 정원에 침입한 아멜리아와 마주친다.

그곳에서 둘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보자마자 상대에게 빠져들다니 너무나 터무니없지만 원래 주인공들의 만남이란 그런 게 아니겠어? 소설에서는 서로가 적이었다가 헤어 나올 틈 없이 상대에게 몸과 마음이 젖어 들어 버린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고로 아멜리아의 등장은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발견한 희망 그 자체였다. 원작대로 황제와 아멜리아가 만나 사랑에 빠지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으니까.

나를 빙의시킨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녀는 우리에게 최상이자 최후의 패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

아멜리아의 합류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소설에서 보았던 대로 화끈하고 능동적이며 리더십이 빼어난 캐릭터였다.

아는 정보를 아낌없이 풀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 위계질서에 익숙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카리스마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었다.

또 검술에 관하여 일가견이 있었는데, 변방에서 직접 몸을 부딪치며 전투를 익혔기에 실전 감각이 남달랐다. 개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특히 가르치는 능력이 빼어났다. 그래서일까. 아멜리아는 직접 데려온 몇백의 부하들을 대공의 군사로 합류시키면서 훈련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럴 땐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피하기보다는 칼날을 더욱 바짝 세워서 한걸음 나서는 게 훨씬 이롭지.”

그녀는 실력이 모자란 병사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개별적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여주의 섬세함에 감격하곤 했다.

조교로 활동하는 에반도 처음에는 아멜리아의 행보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모자란 부분을 채워준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양상이 달라졌다.

그녀의 적극적인 전술은 병사들의 실력을 수직 상승시킬 만큼 강렬했다. 검이 실전에 맞게 날카로워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점차 영향력이 커지더니, 급기야 병사들은 에반보다는 아멜리아를 더욱 따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검술 대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는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돼. 앞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나면서 틈을 노려야지.”

“하지만 아멜리아 님께서 이렇게 가르쳐주셨는데요.”

에반이 조언을 주었는데도 아멜리아의 조언을 들어 반박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는 점잖은 성품의 소유자로 이런 일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그냥 넘기곤 했다.

하지만 급진파가 있다면 반대로 점진파도 있는 법. 아멜리아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인 만큼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도드라진 것이 코아였다.

본격적으로 갈등이 일어난 계기는 이것이었다. 단체훈련을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훈련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에반. 잠깐만요.”

아멜리아는 훈련을 중지시키고서 에반을 옆으로 불러냈다. 그러고는 자신과 맞지 않는 검술 방식에 대해 이것저것을 집어내었다.

“아무래도 그 방법은 실전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다소 거친 여주의 성정 상 말투도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지방의 남작이라도 귀족은 귀족이니까. 아멜리아는 평민 출신인 에반을 가르치려 들었다.

그 장면을 포착한 코아가 잽싸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건방 떨지 마시죠.”

“뭐라고?”

며칠간 지켜보면서 많이 참아왔기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코아는 충성심이 높은 부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기보다는 윗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도리인 줄로 여겼다. 길거리에서 영원히 헤매며 살뻔했다가 레이몬드에게서 구원받았으니 그 충성심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바로 그런 타입이었다.

“이곳에도 이미 세워진 방식이 있습니다. 윗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끼어드는 것이 옳다고 보십니까?”

“평민 나부랭이가 잘도 말하는군.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침묵해야 한다는 건가?”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지요. 다른 방식은 무조건 틀렸다고 치부해버리고 자신의 것만 고집하는 게 맞을까요? 병사들이 두 조교의 존재로 혼란을 겪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왜들 그럽니까. 싸우지 말죠.”

두 사람은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말다툼을 주고받았다. 오히려 피해자 격인 순한 에반이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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