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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95화 (95/125)

95화

성곽을 오르자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니얀은 계단 대신 바깥으로 나가 몸을 공중으로 띄워서 우리를 성곽 위에 안착시켰다.

어느덧 더 몰려온 까만 복면이 여섯. 총 열다섯 명의 복면 대 레이몬드와 네버레스트의 싸움이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레이몬드가 네버레스트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요란하게 장식했다.

코아의 설명에 의하면 까만 복면들은 검술이 거칠고 우악스럽지만 그만큼 힘이 좋아 상대하기가 버겁다고 했다. 빛이 드문 밤의 어두운 복장 때문에 미처 몰랐는데, 저들은 일반적인 암살자들과는 다르게 덩치가 상당히 커 보였다.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또 가서 싸우려고요?”

나는 다급히 코아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조금 전 일곱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느라 지쳤을 텐데 또다시 전장에 뛰어들려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네. 대공 전하께서 싸우시는데 가만히 있는 건 도리가 아니지요.”

“그럼 치료하고 가요. 여기저기 다쳤는걸.”

“나중에 하겠습니다.”

“안 돼요. 지금 하고 가요.”

나랑 코아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 옆에서 보다 못한 니얀이 끼어들었다.

“에일린 님. 자꾸 그러시면 경이 곤란합니다. 전쟁터에서 주인이 싸우는데 아랫사람이 놀고 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마저 말리자 나는 실망스러움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면 대신 제가 버프를 걸어드리겠습니다.”

“버프요?”

니얀은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서 탕탕 두드렸다. 그가 내민 손에서 빛이 나와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어둠을 물리친 빛은 바람을 타고 코아에게로 날아가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마치 강림한 천사처럼 그녀의 온몸에서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안이 벙벙한 코아와 나를 향해 니얀이 설명을 덧붙였다.

“자동 상처치유 및 실드, 그리고 힘과 속도 향상의 효과가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코아는 니얀을 향해 묵례하고는 잽싸게 전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일별하며 배웅한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에요?”

그러면 대체 왜 여태껏 아껴두고 있었던 거야?

나는 니얀의 멱살을 쥐고서 짤짤 흔들었다.

“당장 레이몬드한테도 걸어줘요.”

“아, 그건 안 됩니다.”

“어째서?”

“대공 전하의 몸에는 기이한 약효가 돌고 있거든요. 효과가 중첩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그래요?”

“과도한 약물 및 버프 사용은 몸에 해로워요.”

그는 손가락과 고개를 동시에 좌우로 저었다. 뭔가 미심쩍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기를 보십시오. 충분히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니얀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레이몬드가 여러 명의 적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일 대 다수의 싸움이라기엔 일 쪽이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그건 그렇네요.”

“그렇죠? 저희는 가만히 앉아서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성곽 끝자락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기에 생각해보다가 문득 의문이 든 지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니얀은 왜 안 싸워요?”

“아, 저는 몸을 사려야 합니다. 러스 내에서 마법사의 공격이 터지면 어떤 식으로든 알려질 수가 있으니까요.”

“아하?”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군.

나는 팔짱을 끼면서 그를 불만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내 눈만 아플 뿐 니얀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하지만 그의 말대로 레이몬드에게는 따로 버프가 필요 없어 보였다. 힘과 검술로 충분히 상대를 제압해가고 있었으니까. 네버레스트도 왕의 암살자 출신들이라 실력이 출중했다. 이쯤 되니 우리 편이 승리하리라는 건 자명했다.

슬슬 마무리되자 포로가 된 복면들을 포박해서 무릎을 꿇려 앉혀두었다. 전투 과정에서 죽은 몇 명은 따로 구석에 쌓아두고, 숨이 붙어있는 자들은 증언을 얻기 위해 한데 모았다.

일부 네버레스트는 순찰을 돌아 나머지 세 명의 복면을 더 찾아내어 이쪽으로 끌고 왔다.

네버레스트의 단원들이 모조리 복면을 벗기자 적들의 면면이 드러났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이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레이몬드가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물었다. 목소리만큼이나 냉담한 표정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적들을 떨게 만들었다.

이럴 때 보면 내게 웃으며 다정하게 굴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내 최애는 이런 모습도 멋있지만 말이지.

“사실대로 말하면 살려줄 거요?”

“감히 대공 전하께 건방지게…!”

네버레스트의 단장 온이 분노하여 버럭하자, 레이몬드가 손을 가볍게 들어 저지했다. 그리고는 압살할 듯한 무거운 기세로 상대를 짓눌렀다.

“그 건방진 말투를 당장 뜯어고친다면 한 번 고려해보지.”

질문을 내뱉었던 사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자기편을 휙 둘러보더니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 저희는 이너피스입니다.”

“이너피스라면, 라푸에 있는 그?”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의뢰자는 누구인가?”

사내는 다시 한번 더 숨을 크게 고르더니 낙심한 듯 입을 열었다.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황제입니다. 황제의 시종장 켈른 백작에게서 의뢰를 받았습니다.”

전시 상황에서의 적은 하나. 거짓말을 했다 한들 어차피 추측이 가능했겠지만, 이너피스는 거침없이 진실을 술술 뱉어냈다. 애초에 목숨을 걸면서 비밀을 지키는 의리 있는 자들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군.”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려놓았던 검을 도로 치켜들었다. 그들에게로 다가가는 몸짓에는 살기가 잔뜩 실려있었다.

분위기를 깨달은 사내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마… 말하면 살…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고려해본다고 했지 약조하진 않았어.”

“그… 그런!”

“살아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내가 경고하지 않았던가? 투항하려면 그때 했어야지.”

레이몬드는 처음에 선언한 대로 복면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나. 저 모습은 진짜로 악역 같아.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경악 섞인 감탄을 하고 있는데, 니얀이 내 눈앞에 손을 슬쩍 갖다 댔다. 앞을 보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당황하긴 했지만, 반박하지 않고서 얌전히 니얀의 배려를 받았다.

이윽고 귀에 들린 건 피 튀기는 소리와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소리만으로도 장면이 상상되어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눈을 가리는 건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모습은 그 대상이 아무리 적일지라도 유쾌한 장면이 아니니까.

응징이 끝나자 레이몬드의 낮은 명령이 들려왔다.

“대마법사. 에일린을 먼저 데리고 가지.”

“분부대로 하지요.”

니얀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감각이 느껴졌다. 곧 텔레포트가 일으키는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다.

***

“미안해요.”

레이몬드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잘못을 이실직고했다.

일을 다 처리하고 나니 자정에 다다른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릴 줄 알고서 서둘러 씻고 들른 것이다.

넓은 등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던 레이몬드는 내게로 몸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스레 찔려서 변명을 나불거렸다.

“가슴이 답답해서요.”

“그래.”

“바깥 공기가 쐬고 싶었거든요.”

“그럴 수 있지.”

그는 이해한다는 식으로 턱을 주억거렸다.

“그래서 코아한테 물어보고 같이 나간 건데.”

“코아랑 함께 간 건 잘했어.”

칭찬도 해주었다. 그래서 별로 화가 나지 않았구나 안심하려는 찰나, 레이몬드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질책을 해왔다.

“그렇지만 위험에 처했지.”

“네.”

“마법사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죠.”

“코아가 한순간이라도 실수를 했다면?”

“….”

“나와 네버레스트가 오지 않았더라면?”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겸허한 마음으로 야단을 들어야 했다. 그러자 이어지던 레이몬드의 말이 멈추더니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마주친 그의 눈빛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노리는 포식자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을 저질렀으니 혼이 나야겠지?”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을 감으며 다가온 레이몬드는 곧게 뻗은 콧날을 옆으로 꺾었다. 말캉한 촉감이 닿자 시무룩함이 가시고 마음이 아찔해졌다. 포개어진 입술이 천천히 움직여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의외의 벌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혼나는 거라면 나는 계속 사고를 쳐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의문에 사로잡히며 그의 목에 부드럽게 팔을 둘렀다.

***

이너피스의 잠입 이후로 마치 휴전처럼 한동안 평화롭고 고요한 시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전시 상황이란 언제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적을 주시하며 중요한 정보들을 취합하는 게 필수였다.

니얀은 회의에 참석하여 황성에서 물어온 정보들을 풀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신전의 사제들을 불러와서 힐러들이 충원되었습니다. 병사들 대부분이 컨디션을 회복했다고 하네요.”

“허.”

“싸운 의미가 다 사라져 버렸잖아?”

“처음으로 돌아갔네.”

그의 말 한마디에 부하들이 너도나도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소식은 따로 있었다.

“황제가 다른 왕국에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런…!”

그 소식이야말로 기함할만한 내용이었다.

집안싸움에 남을 끌어들이는 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이권들을 얼마나 많이 내어주게 될까.

“상황이 갈수록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전면전이 시작되면 완벽하게 밀릴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니얀의 분석은 정확했다.

다른 왕국들이 돕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 러스 안에 완전히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뜻밖의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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