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너피스와 블록은 황제로부터 어마어마한 돈을 약속받게 되었다. 켈른의 옆에 서 있던 호위하나가 커다란 돈주머니를 그림 옆에다가 올렸다.
“계약금은 여기에 있소. 성공한다면 바로 잔금을 치르겠소.”
“좋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크흐흐.”
원래라면 블록은 의뢰비를 무조건 선불로 받았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선금이 보통의 의뢰비를 충당했기에 괜찮았다. 특히나 성공 시에 받을 돈이 기가 막힌 액수여서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블록은 자신의 단원 중에서 특별히 아끼는 날쌘 자들을 골랐다. 이너피스 내의 최고 실력자 열여덟 명이었다. 돈에 살고 돈에 죽기에, 이번 의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사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선택이었다.
이너피스는 재빨랐다. 황금 배가 라푸 섬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퍼지기 전에 움직이려 했다. 그보다 진실은 하루빨리 큰돈을 맛보기 위함이었다. 선택된 열두 명의 암살자는 켈른이 다녀간 그 날 밤 러스 안으로 몰래 잠입했다. 라푸 섬의 바로 옆에 자리했기 때문에, 이너피스에게 있어 러스는 앞마당과 같았다.
“너희는 이쪽, 너희는 저쪽으로. 우리는 전방을 향한다.”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옷차림에 까만 복면을 쓴 이들은 암살단장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퍼졌다.
요새를 타고 넘어가기 위해서 갈고리를 높이 던졌다. 뾰족한 부분이 성곽 끝에 걸리자 줄을 몇 번 당겨 안전 여부를 확인했다. 밧줄을 타고 벽을 밟으며 올라가는 움직임이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밤손님으로 활동해온 경험치였다.
타다닷.
“누구…! 컥.”
순찰을 하며 돌아다니던 몇몇 경비병이 갑작스레 뒤에서 덮친 공격을 받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이제 카운트다운의 시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분 후, 다른 경비가 교대하러 오기 전까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야 했다.
***
어스름한 달빛에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밤.
나는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바깥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전 상을 이유로 방 안에만 갇혀 지내는 나날이 길어지자 갑갑함이 차오른 것이다.
레이몬드는 바빠서 얼굴을 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나는 종일 치유 약병만 만들다가 하루가 다 가는 일이 허다했다. 하루걸러 하루씩 놀러 오던 옥희도 오늘따라 소식이 없었다. 잠깐 다녀온다던 코아도 곁에 없었다. 후에 내게 붙여주었던 네버레스트의 판은 전시 상황이 되자 다른 일로 불려가 더 이상 내 호위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가고 싶어졌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찬 공기가 걱정이 되어 의자에 걸려있던 숄을 어깨에 두르고는 방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보자, 마침 방으로 돌아오던 코아와 마주쳤다.
“어디 가십니까?”
“산책을 가고 싶어서….”
나는 자신 없는 말투로 말하고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코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날숨과 함께 피식 웃으며 정중히 손짓했다.
“저랑 같이 가시죠.”
“고마워. 코아.”
나는 얼른 코아의 옆자리에 붙었다.
우리는 조용한 복도를 걷다가 나선형의 계단을 만났다. 이곳을 오르면 마을의 야경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대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높은 곳은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래서 상쾌했다.
오랜만에 맞는 시원한 공기가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폐 속도 정화했다. 내려다보이는 마을에는 집마다 작은 불빛이 아른거려 소박하고 멋스러운 정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도저히 전쟁 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지금이 전시 상황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대공 전하께서 잘하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바람에 헝클어뜨리는 머리칼을 붙잡으며 내가 말했다. 코아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시선을 눈에 담았다.
“방어선이 무너지면 이 평화로운 풍경도 더는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네.”
“준비가 다 되고 나면 저희도 황성으로 진군하겠지요. 그러면 오늘 본 야경이 그리워지실 겁니다.”
“네 말이 맞아. 떠나기 전에 눈에 많이 담아둬야겠어.”
나는 마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곧 깨어질 평화. 그것이 두려웠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고통과 슬픔으로 물드는 건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안주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괴로움 속에 살아가게 되겠지. 그저 나 몰라라 고개를 돌리는 것밖에 되지 않겠지.
현재 카일이 지배하는 제국에서는 루슬로 가를 비롯한 몇몇 영지에서만 백성들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귀족들의 지나친 착취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불어났다고 한다. 이곳 러스도 루슬로 가의 영지라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었으니까.
잡념이 많아지자 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코아. 레이몬드는 이길 수 있겠지?”
“이겨야지요. 그러려고 시작한 일인걸요.”
코아는 드물게도 고개를 야무지게 끄덕였다. 확신 있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지으려는 그때, 코아의 뒤에서 느닷없이 까만 복면이 나타났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험…!”
찢어질 듯한 내 외침은 한발 늦었으나, 코아는 몸을 돌려 공격을 막아냈다.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상대의 검을 쳐내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몸을 바닥으로 숙이십시오.”
코아의 말에 얼른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여섯 명의 복면이 코아에게로 한꺼번에 덤벼들었으나, 뛰어난 그녀의 실력에 모조리 막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 대 다수.
잘하고 있는 건 맞지만 버거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드레스 끝자락을 돌돌 말아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어서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내 편이 아니었다.
휘이익!
근처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반대편에서도 복면을 쓴 자들이 튀어나왔다. 앞선 세 명이 내게로 접근하는 것을 거뜬히 막아내던 코아는 내 쪽으로 다급히 다가왔다.
이제 적의 숫자는 아홉. 아무리 코아라도 나를 지키면서 적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숫자였다.
저들은 대체 누구지. 무엇을 노리는 거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무슨 좋은 수가 필요해.
마음은 필사적이었으나 날붙이가 난무하는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방해되지 않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힘이 세면 뭐 해? 아드리엔 말대로 싸움은 스킬인 걸.
나는 왜 산책을 나오자고해서 이런 사달을 만들어버린 거야!
머리 위로 검이 오가는 상황에서 속으로 마구 자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하고 머릿속에서 내리쳤다.
그래. 힘이 센 걸 이용해보자!
나는 코아와 내가 붙어서 서 있는 발아래를 쳐다보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 이 아래는 나선형 계단의 뻥 뚫린 중앙 부분. 지금 딛고 있는 바닥이 꺼진다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발을 들어 쿵쿵 굴렀다. 과연 이 두툼한 돌바닥이 부서질까 의문이 든 것도 잠시, 금이 쩍쩍 갈라지더니 순식간에 동그라미 모양의 금이 그려졌다.
“코아. 갈게.”
“…?”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코아는 내 말의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아래로 쑥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코아와 적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일을 도모한 나조차도 놀라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발판과 함께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데, 끝을 모르고 계속 떨어졌기 때문이다.
“으… 으아아아아!”
나는 코아의 몸을 꼭 붙든 채로 비명을 질렀다. 살려고 시도했던 일인데 꼼짝없이 죽겠구나,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런데 그때, 몸을 아래로 당기던 힘이 사라졌다.
꼭 감았던 눈을 떠보자 나와 코아의 몸이 공중에 두둥실 떠 있었다.
“참으로 무모하시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니얀이 있었다. 그 역시 우리처럼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를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주었다. 발이 땅에 닿자 다시 온몸에 중력이 느껴졌다.
“여길 어떻게…?”
반가우면서도 놀라움에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대마법사의 혜성 같은 등장에 목숨을 건진 거였으니까.
“내가 구슬로 지켜보고 있는 걸 아는 거 아녔어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만 빠끔히 뜨고 있자, 니얀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세워주더니 반말로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모르고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요? 아니,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적한테 칼 맞아 죽으나 떨어져 죽으나 비슷하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아니, 그게 아니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한 거죠.”
“새로운 죽음의 기회를 판 것 아니고?”
우씨. 그럴 거면 좀 더 일찍 나타나서 구해주던가!
내 딴에는 절호의 돌파구를 판 거였는데 혼이 나니까 억울함이 솟구쳤다.
니얀이 비꼬는 말로 꼬투리를 잡으며 잔소리를 퍼부어대는 그때 구원의 손길이 등장했다. 코아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뭘요. 경도 에일린 님을 지켜내느라 수고하셨어요.”
니얀은 머쓱해져 뒤통수를 문질렀다. 각 잡고 인사를 하니 오히려 수줍어하는구나.
나와 코아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게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내 잘못도 잊고 감사의 마음까지 잊고서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한편, 우리를 덮쳤던 복면들은 뻥 뚫린 바닥 아래를 내려다보며 망연한 눈빛이었다. 저들의 행태로 보아 내가 목적인 것 같은데, 따라 뛰어내릴 수도 없고 난감한 기색들이다.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런데 복면들 옆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이 몸을 휙 돌려 사라졌다.
“우리 어서 올라가 봐요!”
내가 위를 가리키며 외치자, 코아와 니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