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앞서 쿤타를 비롯한 1천 명의 진군은 시범적인 선발대였다. 이 전투를 통해 적의 역량을 파악하여 완벽한 플랜을 짜기 위함이었다.
이후 카일이 나설 군사 작전 속에는 당연히 마법사들의 포지션이 있었다. 그들이 나서준다면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작전을 알리며 협조를 요청했더니 단칼에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저희는 탑주님의 명령에 따라 이 전쟁에 나서지 않겠습니다.”
황제의 알현실. 주요 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황좌를 향해 턱을 치켜든 니얀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여기까지 와서는 손을 놓고 있겠다니 말이 되는 소리요?”
“무엄하군요! 감히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다니.”
이에 길게 늘어서 있던 신하들이 분노로 항의하고 나섰다. 그때까지 무신경한 표정으로 황제를 보고 있던 니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일 대 다수로 시선이 맞부딪혔다. 서릿발 같은 눈빛이 면면들을 꿰뚫듯이 훑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에일린 앞에서 실실거리며 웃던 니얀은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압사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대마법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감히 제게 토를 다는 겁니까?”
니얀의 왼쪽 눈썹이 아치형으로 휘었다. 아주 사소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섬뜩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신하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일제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카일 역시 몹시도 못마땅했으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탑과 제국. 어느 쪽이 우세한가. 그것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우위를 논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직 전투력으로 상정되는 힘만을 가지고 논한다면 마탑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이었다.
현 마탑주를 비롯하여 눈앞에 있는 저 차기 마탑주는 위험한 인물이다. 마음 먹었다 하면 하루아침에 제국을 삼키지는 못해도 모조리 파괴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 누구보다도 스스로의 목숨이 소중했기에 카일은 입을 닫는 선택을 해야 했다.
‘마탑. 너희들은 대체 무슨 꿍꿍이냐.’
카일은 니얀의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 그는 상대의 속 심리를 잘 읽어내지만, 아직까지 니얀의 속내만큼은 파악하지 못했다. 한결같이 차가운 저 무표정함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안을 철저히 감추기 위해서 마탑주가 그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카일은 마법 사단 없이 진군해야 했다.
“폐하. 제게 맡기시고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저 악랄한 대공 세력이 태양이신 폐하를 해칠까 봐 염려됩니다.”
이번에 사령관으로 임명된 바이칼이 허리를 깍듯이 굽히며 말했다. 그러나 말 위에 올라탄 카일은 말을 몰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에일린을 위해서라면 두렵지 않아.”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먼 곳을 응시하는 쓸쓸한 눈동자에는 누가 봐도 제 약혼녀를 그리워하는 기색이 담겨있었다. 바이칼도, 곁에 있던 군사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짙은 감동을 느꼈다. 과연 소문대로 황제는 순정파이자 사랑꾼이었다.
카일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 약혼녀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전장에 뛰어드는 역할을 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는 화살로 그 약혼녀의 심장을 노린 몹쓸 놈인데 말이다.
‘이 괘씸한 여인을 어떻게 혼내줄까?’
카일은 황좌의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내리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황제인 자신과 대공을 양손에 올려놓은 채로 저울질하다가 결국 대공에게로 가버리다니.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들 만큼 분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부모를 데려다가 협박을 해볼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레이몬드를 칠 명분으로 ‘약혼녀 구출’이라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진행하기 위해서 일찌감치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직접 응징하는 방식이었다. 경고를 내린 자신의 손으로 활을 쏘아 심장을 맞추리라.
그러나 에일린을 죽이는 것도, 러스를 함락하는 것에도 결국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황제가 출전한 전쟁은 잠시 미쳐버린 대공의 활약으로 어이없게 마무리가 되었으니까.
그 실패의 대가는 고스란히 시종들이 치러야 했다.
카일은 시종들을 한데 불러 모아 매질을 하면서 분을 풀었다. 대외적으로 성군인 척하는 그가 화풀이를 하는 고약한 방법이었다.
시종들은 카일의 불편한 심기를 풀고 자신들이 살아나기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수를 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모두의 고심 끝에 나온 새로운 작전은 ‘잠입’이었다.
“잠입?”
카일이 눈꺼풀을 느른하게 들어 올리며 관심을 가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황제는 피로를 풀기 위해 매일 목욕재계했다. 그는 목욕하면서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황금 욕조 안에는 나신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를 둘러싼 채 시중을 들고 있었다.
“예, 폐하. 공녀님을 구하기 위해 러스 안으로 침투할 실력자를 보내는 겁니다. 전면전에 무리가 있다면 틈을 노리는 것이 좋겠지요.”
“오호라. 그거 좋은 방법이구나.”
아직 정식으로 임명되진 않았지만 시종장 노릇을 하고 있는 켈른 백작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있었다. 정치를 논하는 중요한 자리에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황제의 본 모습을 보아도 보지 못한 척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 순정파로 소문난 카일의 실체였다.
‘몰래 잠입해서 잡아 온다면 내 곁에 강제로 눌러 앉혀 둘 수 있겠군.’
마음에 드는 제안에 황제가 몹시 흡족해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지금 대공 쪽에는 네버레스트를 비롯한 실력자들이 많았다. 반면 황제 쪽에는 최고 실력자인 황실특임대가 많이 남지 않은 상태였다. 기껏해야 황제의 호위 정도만 가능했다.
이는 대공과 있었던 여러 번의 마찰에서 잃은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하여 새로운 실력자들의 확보까지 대공에 의해 가로막혔고 말이다.
“그런데 그곳을 뚫을 자들이 있을까?”
카일이 고뇌했다. 안 그래도 얼마 없는 황실특임대를 내어주기는 싫었다. 아무리 그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자신의 안위보다 중요하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켈른은 유능한 시종장이었다. 이제 막 새롭게 자리를 도맡은 만큼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은 자였다.
“제게 좋은 방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러스의 변방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도적 떼가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해적, 때로는 산적, 때로는 암살자가 되어 활동하기에 실력이 매우 뛰어난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큰돈을 주어 일을 시키신다면 거뜬하게 해낼 겁니다. 실제로 돈만 많이 주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낸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괜찮은 생각이군. 시종장의 말대로 하게.”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폐하.”
기분이 좋아진 카일은 당장 켈른을 시종장이라고 불렀다. 제국에 썩어나는 것이 돈이니,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가장 값을 싸게 치른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
시행을 허락한 카일은 곁에 있던 여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황제가 덮쳐오자 여인은 꺄르르 웃으면서 그의 황금빛 머리칼에 얼굴을 비벼댔다. 켈른은 얼른 허리를 숙이고서 욕실에서 그만 물러났다.
***
러스 변두리로 길게 이어진 섬은 퍼먼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켈른은 호위를 몇 명 데리고서 몸소 섬을 찾아갔다.
러스를 통해서 가면 금방이지만, 대치 상태인 지금으로서는 배를 타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솜씨 좋은 항해사를 데리고서 호화스러운 배를 타고 가장 가깝고도 큰 라푸 섬에 도착했다.
켈른이 황제에게 언급했던 도적 떼의 이름은 이너피스. 이너피스는 출발은 도적 떼였지만, 현재는 규모도 크고 체계가 잘 잡혀있어 어엿한 용병 단으로 발돋움했다. 다만, 돈만 쥐여 주면 뭐든지 하는 자들이기에 태생이 어디 가진 않는다는 세간의 평가를 들었다.
배에서 내린 켈른은 깔끔한 손님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소파에 앉은 그는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값비싼 가구와 고급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는 것을 보아 VVIP 손님을 맞는 응접실인 듯했다.
잠시 후 하녀들이 차와 디저트를 내어왔다. 안내를 맡은 부하들이 상체를 깍듯이 꺾으며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블록 님께서 지금 오고 계시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한편, 황금 배가 라푸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이너피스의 우두머리인 블록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많은 손님을 맞이해보았지만 대놓고 값비싼 배를 타고 오는 손님은 정말 드물었다. 보통은 의뢰를 비밀스럽게 맡기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분을 드러낸다는 건 그만큼 돈에 있어 자신감이 넘칠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돈 냄새를 잘 맡는 그의 판단은 옳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블록은 켈른을 보자마자 손을 비비며 맞은편에 앉았다. 고급의류를 입은 백작의 모습은 누가 봐도 고위 귀족이었다.
“자,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디저트와 차는 드셨습니까?”
“그렇소. 급한 사항이라 본론부터 얘기하고 싶소만.”
“예. 그래 주시면 저희가 더 감사하지요. 그래, 무슨 의뢰를 맡기러 오셨습니까?”
블록은 능수능란한 태도로 대화를 이끌었다. 켈른은 상상보다 유한 상대의 모습에 반쯤 긴장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대행인만큼 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프라레스 제국의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소.”
“어이쿠. 황제 폐하라니. 그러시구나.”
“잘 알 거라 믿지만 이너피스에 의뢰를 맡긴 건 비밀이라오.”
“예예. 물론입니다.”
블록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의뢰를 맡겼다는 사실이 후에는 알려져도 별 상관이 없지만, 당장은 입단속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켈른은 이어 의뢰를 입에 담았다.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현재 황제 폐하의 약혼녀인 에일린 코웻 공녀가 러스에 납치되어 있소. 잡혀있지만 신분상의 이유로 감금은 되어있지 않는 것 같은데, 그분을 찾아서 황성으로 모셔오면 되오.”
“그렇군요. 공녀님의 인상착의는 어떻습니까?”
“여기 초상화가 있소.”
켈른은 테이블 위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올려두었다. 의뢰를 맡기기 위해 화가에게 시켜서 급하게 그린 에일린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