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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92화 (92/125)

92화

나의 전리품인 켄지스는 내가 말하면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홱 돌려버리기 일쑤더니, 코아는 멀리서 머리카락만 보여도 쫓아 달려갔다. 누가 보면 코아가 어릴 때부터 키운 주인인 줄 알겠네.

눈물겨운 애정을 보이는 녀석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어쨌든 황제는 전혀 그립지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인 걸까? 그리하여 이 망할 녀석은 결국 코아에게 하사하기로 했다.

“이렇게 귀한 말을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됐어. 귀한지는 모르겠고. 얘가 코아가 좋다니까 코아 거 해.”

“고맙습니다. 공녀님. 잘 타고 다니겠습니다.”

코아는 장난감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렇게 소유권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켄지스는 내가 마구간을 지나갈 때마다 나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어느 날 버럭버럭 화를 냈더니, 그 모습을 발견한 아드리엔이 한심하다는 듯 내게 쏘았다.

“너는 무슨 애가 동물이랑 싸우고 있냐? 진짜 그러고 싶을까.”

“이 녀석이 나한테 먼저 건방지게 굴었다고!”

“말은 말이야. 이렇게 섬세하게 다뤄줘야 해.”

아드리엔은 한껏 우쭐대더니 켄지스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러고는 얼굴 쪽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는데, 녀석은 아예 대놓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뭣, 뭐야?”

후훗. 그럼 그렇지. 너도 동물한테 무시당하니 기분이 어때?

이렇게 비웃어주려고 했더니, 아드리엔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를 냈다.

“아니. 이게 말 주제에 사람을 무시해? 나랑 한 판 해보자는 거지?”

“너는 무슨 애가 말이랑 싸우니? 그러고 싶을까.”

“….”

나는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말을 똑같이 돌려받은 아드리엔의 표정은 썩어들어갔고, 그 옆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나비엔이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다.

***

요새로 돌아오자마자 레이몬드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코웻 공녀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 모습을 발견한 멜라스는 나를 즉시 대공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한껏 들떠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려댔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라 생각했더니 칼루였다.

“너희들은 못 봤지? 공녀님이 대공 전하를 번쩍 들고 가는데…!”

자신의 무용담을 신나게 떠들어대는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칼루.”

“헛. 공녀님!”

멜라스가 슬쩍 이름을 부르자, 그가 우리 쪽으로 냅다 달려왔다.

“오셨어요?”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문질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공녀님.”

“네?”

“일전에 제가 무례하게 굴었던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칼루는 힘차게 외치더니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에? 이 사람 그때 그 칼루 맞아?

나는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태도가 변해있었다.

사과를 받았으니 뭐라도 대꾸를 해야 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칼루의 입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어쩜. 공녀님은 힘만 세신 게 아니라 마음까지 넓으시네요!”

그는 양손으로 엄지를 척척 올리며 아부를 떨었다. 진심이 깃든 칭찬인지는 몰라도 알랑거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 우린 대공 전하께 가보겠다.”

“예! 살펴 가십시오!”

이야기가 길어지자 멜라스가 대화를 끊어냈다.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칼루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다시 대공에게로 향했다. 거리가 벌어지고 나니 멜라스가 볼을 긁적거리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칼루 녀석. 공녀님께서 대공 전하를 구하신 게 대단히 인상 깊었나 봅니다.”

“그런가 보네요.”

“공녀님에 대해 자랑하느라 입이 쉬지를 않습니다.”

멜라스는 180도로 변한 그의 태도를 민망해하면서도 내게 말해줘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다. 내게 무례했던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사실 칼루의 심경의 변화도 알만했다. 내가 피해를 주는 존재에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바뀌었으니 그런 거겠지. 전시 상황에서 짐 덩어리를 반기는 사람은 없으니까.

알고 보니 굉장히 단순한 성격이구나?

처음에는 편견 가득한 마음이라 내 치유력도 가볍게 생각했을 테지. 그 일 이후로는 기적 같은 능력이라며 추켜세우고 다닌다는 소식까지 들을 수 있었다.

“대공 전하.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와. 에일린.”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기대어있던 레이몬드가 나를 반겼다. 그의 곁에는 부하들이 몇몇 서 있었다.

“레이몬드. 괜찮아요?”

“등이 너무 아파.”

나의 박치기는 덩치가 좋은 레이몬드를 기절시킬 만큼 강렬한 한방이었기에, 그는 깨어나고 나서도 계속 등이 얼얼하다고 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그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그 모습에 그만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나도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잔소리를 쏟아내었다.

“그러니까 왜 그랬어요. 안 그랬으면 됐잖아.”

“그대가 다쳤다는 생각에 한순간 정신이 날아갔어.”

“한 세력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성을 멀리 던져놓고 감성적으로만 행동하면 안 된다고요.”

“맞아. 내 생각이 짧았군.”

잘못한 점을 하나하나 지적하자 레이몬드가 바로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대공의 부하들은 입을 헤 벌린 채로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이 일을 어째요.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스레 말했다. 주변에서는 나의 말에 티 나게 움찔거렸다. 가장자리에 서 있던 이든은 어깨까지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말한 나처럼 레이몬드의 태도도 태연자약했다. 그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에일린이 치료해주면 되겠네.”

“치유 약병을 가져올까요?”

“아무래도 내상인 듯하니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어.”

대공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대부분이 못 알아듣고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서 있던 멜라스는 “크흠.”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제야 부하들의 존재를 인지한 레이몬드가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모두 나가라.”

“예.”

축객령이 떨어지자 부하들은 안도하며 물러났다. 이제 방에는 레이몬드와 나, 단둘만이 남았다. 그 사실에 괜스레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부… 부하들은 왜 내보낸 거예요?”

“에일린한테 키스 치료를 받으려고 그러지.”

“에엑?”

조심스럽게 물은 게 무색하게도 레이몬드는 내게 대놓고 이유를 밝혔다.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를 꽥 질렀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내 쪽으로 한 걸음씩 단단하게 내디뎠다.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주춤한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남자의 생명이 허리라면서? 새로운 걸 알았네.”

“그… 그래요? 하핫.”

“에일린이 다치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지. 나중에 그대에게 쓸지도 모르는데.”

네? 저에게 쓰다니요?

레이몬드는 어느덧 다가와 자신의 몸에 내 몸을 밀착시켰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전혀 다친 사람 같지 않은데? 문득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성도 있고 말이지.

“잘 걸어오는데 실은 멀쩡한 거 아니에요?”

합리적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의 등을 주먹으로 퉁 쳐보았다. 그러자 “윽.”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헉. 레이몬드. 괜찮아요?”

“안 괜찮아.”

가벼운 확인 작업만으로도 그는 허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 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잡아먹듯이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자 도로 안쓰러워져 버렸다.

“어서 이리 와봐요.”

나는 다짜고짜 그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리고는 입술 박치기를 시전했다. 그는 내 기습키스에 깜짝 놀란 듯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금세 적응했는지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내 허리를 품으로 당겼다. 레이몬드의 큰 키 때문에 나는 무릎을 세운 채로 그에게 달라붙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건 키스가 아니라 치료 행위야! 레이몬드도 그렇게 말했잖아?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새겼음에도 불구하고 치료 행위는 점차 녹진해져 가고 있었다. 격렬한 키스로 숨이 가빠질 때쯤, 레이몬드는 내게 숨 쉴 틈을 주기 위해 입술을 살짝 떨어뜨렸다.

“에일린.”

열기가 잔뜩 오른 그의 얼굴과 마주하자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처음에는 나의 최애였다가 이제는 나의 연인이 되었다. 최애인 것만으로도 소중한 존재, 내가 목숨을 걸고 구해내고자 한 존재인데. 그런 그가 이제는 나의 연인이 되었으니 그 소중함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직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사랑이지만, 서로를 향한 짙은 마음을 확인한 이상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나를 위해 대업을 결심한 사람.

그의 푸른 눈동자를 나는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깊이 허락하고,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처음 빙의했을 때부터 그랬지만,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내 사람이었다.

“레이몬드. 나를 깊이 안아줘요.”

나는 그윽한 눈동자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 안에는 소설 속 악역에게 빠져버린 분홍빛 머리칼의 여인이 들어있었다.

“밤새도록요.”

레이몬드는 내 말에 놀란 듯 눈이 살짝 커졌지만 마다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며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그대가 부탁한 거야.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의 눈에 담긴 화염이 내 눈동자에도 똑같이 담겨있을까? 나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내 등을 깊이 감싸 안았다. 다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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