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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89화 (89/125)

89화

대공의 대의 선언으로 반역 세력이 된 우리는 굳이 퍼먼트로 병력을 끌고 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예측한 대로 황제 쪽에서 먼저 병사들을 출정시켰기 때문이다. 최종 회의 소집을 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러스로 쳐들어온 건 군사령관 쿤타를 필두로 한 천명의 군대였다. 작은 마을을 뚫기에 그 정도 숫자로 충분하다고 여긴 듯했다. 한마디로 얕보고 있는 거였다.

군대가 쳐들어오자, 레이몬드는 궁수들에게 요새를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자신도 전장에 직접 나서기 위해 채비를 했다. 그가 방에서 아머를 착용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은 점점 초조함으로 물들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이 전장에서 지휘하는 모습이긴 한데…. 막상 실제로 전쟁터로 보내려고 하니 그딴 게 문제가 아니었다. 위험에 처하면 어쩌나, 다치면 어쩌나 걱정으로 물든 가슴이 물 먹은 종이처럼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준비를 마치고 선 레이몬드는 나와 마주 보고 섰다.

“레이몬드.”

“걱정 마 에일린. 작은 국지전일 뿐이야.”

“그래도 전쟁인걸요.”

“승리하고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가만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차분한 손길을 받아도 들썩이는 내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제가 바로 옆에서 도울게요.”

“안 돼. 위험하니까 에일린은 여기에 있어. 위기가 오면 바로 후퇴할 테니까 염려 말고.”

함께 나서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해버렸다. 그러고는 내 곁에 선 코아에게 당부를 전했다.

“코아. 너는 에일린을 잘 지켜라.”

“예. 알겠습니다.”

“다녀올게.”

그는 방안에 나를 남겨두고 떠나면서 손을 흔들었다.

내 아이돌을 군대 보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최애를 전쟁터에 보내놓고 나니 눈과 심장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

하지만 레이몬드의 말대로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내가 이 소설 속에 빙의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대공을 지키기 위함이거든!

기껏 가짜 납치극까지 벌이며 합류했는데 방 안에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야.

‘걱정되니까 나가봐야지.’

그리하여 코아가 잠깐 볼일을 보러 사라진 사이에 방 탈출을 감행했다.

코아를 따돌리고서 방에서 나오니 복도는 텅 비어 고요했다. 한창 전쟁으로 바쁜 때라 저택에 돌아다니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복도를 내달렸다. 전시라는 이유로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활동복을 입고 있었으니 움직이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저택을 빠져나와 무작정 성곽으로 달렸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저택은 가장 바깥쪽 성곽으로 둘러 있는 곳. 5분 정도만 달리면 도달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높은 곳에 도착해서 전장을 휙 둘러보자 싸움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 편이 우세한 상황 같아 보였다. 그 사실에 안심하며 레이몬드를 찾기 위해 전장의 세부적인 장면들을 훑었다.

“헙.”

내가 발견한 레이몬드는 전투의 최전방에 서 있었다.

어떤 반역의 우두머리가 최전선에서 싸운대?

못 말리는 그의 열의에 나는 탄식을 터트렸다. 과연 굉장한 목표물을 발견한 적들이 그를 겹겹이 둘러싼 채로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아무리 검술 실력이 좋고 힘이 세더라도, 수십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역시나 위험이 닥쳤다. 연속으로 덤비는 다섯 개의 검을 쳐내다가, 그만 왼쪽에서 들어온 칼에 옆구리를 허용해버리고 만 것이다.

“크윽.”

“꺅. 어떡해!”

레이몬드는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얼른 몸을 돌려 기습으로 들어온 검을 빠르게 처리해냈다. 상처는 단 하나였지만 부위가 부위인지라 출혈량이 많을까 걱정되었다. 제국 시대에 미흡한 의학으로 수혈을 하기도 만무할 테니까.

‘안 되겠다. 더 심해지기 전에 내가 가야겠어.’

적들이 쓰러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전투 중이었다. 레이몬드는 상처를 입고도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에 그를 치료해 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편이 이기고 있다 해도 이곳은 전쟁터. 나는 근처의 경비병에게 동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비병은 기꺼이 그러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쪽문을 열고 요새 밖으로 나온 우리는 조심스레 레이몬드 쪽으로 접근했다. 자신에게 덤벼들었던 무리를 다 처리한 그는 옆으로 쭉 걸어가면서 싸우고 있는 아군들을 도왔다.

‘저쪽이다.’

이제 그에게 닿기까지는 채 삼십 걸음도 남지 않았다. 다 와 간다는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게 방심의 원인이었나보다. 길 건너편에서 엄마를 발견한 아이가 차가 오는 줄도 모르고 도로로 뛰어드는 것과 비슷한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다.

스스로 코아의 최상급 호위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도 있었다. 예상과 다르게 경비병은 그녀의 실력에 한참 미치지 못했으니까.

“레이몬…!”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는데, 옆에서 날이 선 검날이 튀어나왔다. 쓰러진 적들 중에 하나가 나를 발견하자 마지막 회심의 공격을 날린 것이다. 옷차림도 그렇고 머리카락도 모자에 가려 있어서 내가 누군지 모르는 듯했다.

“꺄앗.”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가능한 한 다치는 부위를 줄이기 위해 배웠던 호신술을 활용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쇠가 피부를 스치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적의 모습 대신에 레이몬드가 보였다.

“여긴 대체 왜 왔어. 내가 위험하다고 했지?”

레이몬드는 적의 가슴에 마지막 일격을 찔러넣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가 상대의 검을 재빠르게 거둬낸 것이었다.

공격을 받고 나자 놀란 내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왔다. 레이몬드가 화를 내면서 호통을 쳤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서 이걸로 치료하세요.”

놀란 건 놀란 거고, 이곳에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했으니까. 나는 마구 뛰는 심장을 움켜쥔 채로 품에서 병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병을 쳐다본 레이몬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뚜껑을 열어 옆구리에 뿌리자, 상처가 실시간으로 회복되는 게 보였다. 이제야 안심이 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에일린. 다리를 다쳤군.”

“네?”

조금 전, 적의 공격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약간 모자랐나 보다. 허벅지가 한 줄로 살짝 찢어져 있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면 침 바르면 금방 나아요.”

나는 더 혼날까 봐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레이몬드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팔을 어깨에 하나, 무릎 아래에 하나씩 찔러넣고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앗. 레이몬드. 안 그래도 돼요.”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공작 저로 돌려보내 버릴 거니까.”

“그런…!”

치사하게 협박이라니.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기 힘든 게 사실이었기에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팔을 그의 목에 꼭 둘렀다.

“잔당들만 마무리하고 모두들 후퇴한다.”

“예!”

대공이 큰소리로 외쳐 명령하자, 주위에서 우렁찬 대답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안겨있는 모습이 주목을 끈 것 같아서 더욱 민망해졌다.

***

나를 안고 방으로 돌아온 레이몬드는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하녀들을 불러다가 옷을 갈아입혀라, 따뜻한 물을 받아와라, 수건을 가져와라, 명령을 내리더니 방 한쪽 구석에서 몸을 돌린 채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 되었습니다.”

“잘했다. 모두 나가봐라.”

하녀들을 모두 물린 그는 침대 끝에 앉아있는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고서, 내가 갈아입은 하늘하늘한 치마 끝자락을 허벅지 끝까지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레… 레이몬드.”

“그대로 있어.”

말리려고 했지만 여전히 화가 난 음성에 얌전히 있어야만 했다. 그는 팔을 걷어 올리더니 대야 속 물로 내 상처 부위를 직접 씻어 주기 시작했다.

“아얏.”

따끔한 감각에 신음을 흘리자 그의 손길이 한결 더 섬세해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야릇한 감정마저 들었다.

상처 부위를 한 차례 씻고 나자, 그는 내가 만들어둔 약병을 열어 허벅지에다 부었다. 레이몬드의 옆구리처럼 내 상처도 점차 사라지며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따가운 통증이 가시자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나 치료가 다 된 후에도 레이몬드는 얼른 일어서지 않았다. 옆에 둔 수건으로 내 다리를 톡톡 두드려 닦아주고, 향유까지 손에 발라 다리에 문질러 주었다.

“하지 마요. 제가 하면 되는데.”

“가만히 있어 봐.”

“가… 간지러워요.”

커다란 손이 종아리와 무릎을 지나 허벅지로 올라오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얼굴에는 어느덧 열기가 잔뜩 올라 볼이 홧홧했다.

“내가 에일린처럼 치유력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레이몬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내 무릎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물컹하고 촉촉한 감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릎 키스를 한 그가 고개를 들더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푸른 물결이 자리한 눈동자가 또 한 번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조금은 달랐다. 그때는 아주 욕망 덩어리였는데, 지금은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속에 깃든 깊은 애정이 보이자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의 따뜻한 시선을 받는 건 정말이지 행복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리면 좋겠다. 만약 신이 있다면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이 시간과 공간, 그의 숨결, 방안을 감싸는 알맞은 온도, 아릿하게 퍼져와 코끝에 닿은 향유의 냄새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랑이었다. 누구도 감히 방해하거나 찢을 수 없는.

대기를 울리는 서로의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우리는 지금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실제로 닿은 것은 손가락 끝 하나일지라도 모든 감각이 서로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아.

내뱉은 숨이 공기를 촉촉하게 적셨다.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대야 속의 따뜻한 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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