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전쟁의 시간은 하루하루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정확하게 이때라고 결정된 시기는 없지만, 세력이 규합되고 준비되어 가는 속도로 보아 머지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레이몬드도 초조한 마음이 드는지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수장으로서 책임감을 깊이 통감해가는 거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빛이 어스름한 어느 날 밤.
레이몬드는 밤 산책을 하자며 나를 조용히 불러내었다.
정원으로 내려가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나를 맞아주었다.
어둑어둑한 사위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푸른 눈동자 안에 낮게 깔린 어둠이 있었다. 날 보며 지은 옅은 미소가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갈까?”
레이몬드가 내게로 손을 내밀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 큰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로 저택 안의 정원을 거닐었다. 수도와 달리 화려하게 꾸며지진 않았지만, 제법 걸으면서 구경할만한 소박하고 귀여운 산책길이었다.
일이나 특별한 주제보다는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꽃과 나무를 보며 감상을 나누고, 날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마치 전쟁을 앞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처럼, 언제까지나 평화만이 이어질 것이라 믿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사실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가 내게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근거도 없이 점차 짙어져 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에일린.”
정원의 끝쪽 담벼락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넌지시 불렀다. 이제야 본론을 말하려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네. 레이몬드.”
“혹시 최근에 나에 대해 꾼 꿈이 있을까?”
아, 이걸 물어보려고 그랬구나.
사람은 누구나 큰일을 앞두게 되면 불안함이 증폭된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노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그럴수록 신력 쪽에 기대게 되어 점, 사주, 타로 등을 보곤 한다. 아마 레이몬드에게도 그런 기대감이 있나 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예지몽을 꾸지 않는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원작소설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생각해낸 핑계에 불과했으니까. 이 순간 그를 위해 정말로 예지력을 갖고 싶은 열망이 들었지만, 흘러가는 물을 붙잡으려는 시도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바람이었다.
“아니요. 없어요.”
“그렇군.”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레이몬드가 알겠다며 끄덕였다.
내게는 마음의 짐이 있었다. 나의 예지력 때문에 레이몬드가 나를 마음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조금이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와 사이가 깊어진 이상, 도저히 거짓말을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레이몬드. 사실은요.”
“뭐지?”
“저, 더 이상은 레이몬드에 관한 꿈을 꾸지 않아요.”
“그런가.”
그는 의외로 익히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예지몽을 꿨다면 제게 알려줬을 텐데, 오랜 기간 침묵하고 있었으니까 그리 여겼나 보다.
분명 내게 실망했을 거야.
“미안해요.”
“그게 왜 미안할 일이지?”
“돕고 싶은데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길을 알면 안내를 해줄 수 있을 텐데.”
내 절박한 목소리를 듣던 레이몬드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나와 마주 섰다.
그는 입술 끝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에일린.”
“그렇지만.”
“앞으로는 나와 같이 헤매자.”
그때 마침 한 줄기의 바람이 우리의 몸을 감싸며 스쳐 지나갔다. 흑색과 분홍색 머리칼이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며 나부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건 둘 다 같은 마음이라는 걸. 그리고 알았다. 레이몬드 역시 그 바람, 어쩌면 욕심인 그 마음을 딛고서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있다는 걸.
그는 자신이 역사의 거대한 벽 앞에 선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일 뿐임을 인정했다. 나를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버릴지라도 함께 손을 잡고 이겨내자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요.”
고개를 한껏 들어 올린 나는 레이몬드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감동이 벅차올라 그의 두 손을 힘주어 꼬옥 붙잡았다.
깊어가는 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달빛은 우리 두 사람을 좀 더 환하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
세상에 완벽한 준비라는 게 있을까?
그런 건 분명히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완벽에 가깝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그동안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황제는 이제 움직임을 개시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입맛대로 쓴 기사를 대서특필한 신문을 프라레스 제국 전역에다가 쫙 돌렸다. 루슬로 대공이 대제국 황제의 약혼녀인 코웻 공녀를 납치해갔다는 소식이 1면에 도배된 것으로 말이다.
<예비 황후를 훔친 도둑, 루슬로 대공>
코웻 공녀가 납치되어 사라진 지도 한 달째.
그간 제국 전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코웻 공녀를 찾지 못했고, 남은 곳은 오직 루슬로 대공의 영지뿐이다. 이에 폐하께서 문을 열어 안을 볼 수 있도록 명령하셨으나 루슬로 대공은 이를 거절, 사실상 그는 스스로가 납치범임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공은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 전에 세력을 소집했다.
그동안 합류한 주요 세력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전쟁 직전의 중요한 회의인 만큼 모두가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이 자리에는 각 지역에서 대공을 지지하는 귀족 세력의 대표자들이 집합했다. 남쪽의 런 백작 가의 나비엔과 아드리엔, 서쪽의 델루스 백작, 동쪽의 그나르 후작, 북쪽의 이맥 백작이었다.
게다가 어렵사리 황성을 빠져나온 니얀과 나이트워치의 수장 제트렌, 그리고 나와 레이몬드, 멜라스도 함께했다.
방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는 신문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1면 기사를 쭉 읽어 내려간 레이몬드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좋은 명분을 제공해준 모양이로군.”
황제의 약삭빠른 행동에는 또렷한 저의가 보였다. 바로 나의 치유 능력을 탐내는 것이다.
하지만 카일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예상한 지점이었다. 오히려 이러는 편이 우리에게도 유리했다.
“그래도 공녀의 부모가 안전할 수 있으니 잘됐어.”
황제가 정의의 사도로 둔갑하여 움직이는 이상 코웻 공작 가를 건드릴 순 없을 테니까. 이럴 때는 카일이 보이는 걸 중시하는 성정이라는 게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본래 남자 주인공이라 최소한의 도덕성은 지키는 설정인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내 부모님의 안전을 먼저 염려해주는 레이몬드가 고마웠다.
“원래 기회를 잘 노리는 자이지 않습니까.”
대공의 말에 멜라스가 다독이자, 델루스 백작과 그나르 후작이 이에 차례대로 호응했다.“차라리 잘됐습니다. 이런 건 오히려 처음부터 드러나는 쪽이 좋습니다. 황제가 무너질 때 명분도 함께 무너져 내릴 테니까요.”
“맞습니다. 승리를 거머쥔 후에 공녀께서 스스로 선택한 연유를 밝힌다면 귀족들과 백성들은 납득하며 따를 겁니다.”
두 귀족은 40대 즈음으로 젊은 축에 속했다. 나이가 젊을수록 대체로 변화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대공의 편으로 돌아선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훈련은 잘 진행되어가고 있나?”
“저희 가문에서 미리 사람 몇을 보내어 놓았습니다.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레이몬드의 확인에 곧장 대답한 것은 이맥 백작이었다.
“오, 고맙군. 아주 든든한걸.”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이맥 백작은 수도에서 먼 변방에 거주하며 국경지대를 지키고 있었다. 입바른 말로 선황제의 눈 밖에 났으나, 운 좋게도 죽지 않고 변방으로 좌천된 케이스였다.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라 실전 감각이 뛰어난 자들이 많아, 이 일에 부대장 자리들을 맡겨 놓았다.
작전 회의는 그 뒤로도 쭉 이어졌다.
큰 틀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요새 형태로 만들어진 소도시인 러스를 선택한 순간부터 기본적으로 판이 짜인 셈이었다. 이제는 적진이 되어버린 수도에는 중요한 것들을 남겨두지 않았고 대부분을 이곳으로 옮겨두었다.아직까지는 대공에 합류한 귀족 가들의 명단이 다 알려지지 않았기에, 후방을 칠 요량으로 제국군인 척하거나 일부러 수도에 남겨둔 병력도 있었다. 나이트워치의 경우도 수도에 점조직으로 흩어져 있어, 전쟁 중에 정보를 나르는 역할을 도맡기로 했다.
“대공 전하. 한 말씀 하시지요.”
회의가 끝나가자 멜라스가 대공에게 마무리를 요청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가운데, 레이몬드는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자신에게로 모여든 면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주위를 돌아보는 모습만으로도 군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지금 대제국 프라레스를 유린하고 있는 것은 부패한 황제와 귀족들이다. 선황제 때부터 폭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말이지.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다. 바로 황위를 차지하는 형태로 말이다.”
대공의 말의 무게와 기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는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나를 믿고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존명!”
“황제폐하 만세!!”
드디어 레이몬드의 입에서 대의 선언이 떨어졌다. 그러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입을 모아 크게 외쳤다. 이제부터 이들에게는 레이몬드가 황제였다.
제2 황위권자의 선언. 이는 곧 전쟁의 시작이었다.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아 미세하게 떨려왔다. 두려움이 일었지만 비단 그뿐만은 아니었다. 해낼 수 있다는, 해내야 한다는 자신감과 전의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잘 되기를…!
나 또한 결심을 다지며 주먹을 있는 힘껏 꾹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