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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87화 (87/125)

87화

“둘이서만 먹나요?”

“그래.”

우리는 따로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창가에 붙은 테이블은 바깥 풍경이 잘 보일 수 있도록 기다란 소파가 단 하나만 배치되어 있었다.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이 어깨에 비쳐 내려 포근했다.

별다른 말이 없던 레이몬드는 내가 디저트를 먹기 시작하자 눈동자에 담으려는 듯 동작 하나하나를 응시했다. 턱을 괸 채 바라보는 그 눈빛이 데일 것 같이 뜨거웠다. 나는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레이몬드. 혹시 저한테 할 말 있어요?”

“나한테 키스해줄래?”

“네?”

갑작스러운 요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입에 있던 내용물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젠 대놓고 요구하다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네.

상대를 황당함에 몰아놓고서 그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더 다가왔다.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면서 내 쪽으로 상체를 확 기울였다.

“나도 새들처럼 힘을 내고 싶어서.”

“그…럼 물뿌리개로 뿌려드릴까요?”

“아니. 직접 해줘.”

“…….”

얼마 전에 내 포옹만으로도 심장이 달음박질치던 그분이 맞나요?

세상 어딘가에 파란 용암이 있다면 이런 걸까? 그의 눈동자는 묘한 열기로 가득했다.

내가 어리벙벙하여 주저하고 있자 밀어붙이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그가 수를 던졌다.

“안 해주면 나 다쳐서 올 거야.”

“그러면 안 돼요!”

이 대공님이. 장난도 정도가 있지!

나는 그를 혼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야. 그러니까 해주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고서 내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고 비벼댔다. 높게 잘 빠진 그의 콧대가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간지러웠다. 남들 앞에서는 저 세상 카리스마를 뿜뿜 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만 귀여운 애교를 부려대면 어떤 기분이 들까? 더군다나 그 사람이 내 최애라면?

정답, 한 여름날 아스팔트 위로 내던져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아… 알았어요.”

나는 쑥스러움에 저기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두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인가?”

“네. 그러니까 맘대로 다치지 말아요.”

“약속하지.”

개미만 한 소리로 대답하고서 고개를 돌리니,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파란 용암이 눈앞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 얼굴이 열기로 달아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나는 오른손을 올려 그의 턱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가 단정하게 놓인 입술에다가 내 입술을 갖다 포개었다. 그러자 강한 팔 힘이 내 허리를 둘러 가까이 당기는 게 느껴졌다. 가벼운 입맞춤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깊어졌다. 더 격렬해지려 할 즈음, 나는 레이몬드의 어깨를 밀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가빠진 숨을 고르며 그에게 물었다.

“치료라면서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아냐, 멀었어. 조금만 더.”

그가 도로 내 허리를 잡아당기며 입술을 붙이려는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대공 전하. 멜라스입니다.”

휴우. 방해꾼이 등장하자 반사적으로 레이몬드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에 불만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냥 둘이서 확 도망가 버리고 싶군.”

그리 말하는 눈빛이 진심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절로 반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일을 다 벌여 놓고 가긴 어딜 가요.”

“글쎄. 난 에일린만 가지면 되는데.”

“레이몬드. 진짜.”

내 작은 손이 그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원래 이런 경우라면 남자가 웃으면서 간지러워해야 하는데, 레이몬드는 어찌된 영문인지 고개를 푹 숙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공격을 받은 것처럼 가슴을 움켜쥔 채 아파하고 있었다.

아 맞다, 나 힘세지?

“헉. 괜찮아요?”

“큽. 그래.”

깜짝 놀라 물었더니 그가 가까스로 고통을 추슬렀다.

똑똑. 다시 한번 더 재촉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자세를 가다듬은 레이몬드가 할 수 없이 허락을 입술에 담았다. 그의 입술은 못마땅한 듯 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말이다.

***

우리는 같은 집에서 지내다 보니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스스로가 절제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도 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연애에 빠져 있는 건 말도 안 되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그리움을 억지로 짓눌렀다. 대공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만큼 나도 마냥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 대비를 위해 많은 양의 포션을 제작했고, 틈틈이 운동으로 체력도 단련했다. 레이몬드는 코아에게 나의 개인 훈련을 맡겼다. 훈련은 주로 힘을 사용하는 스킬이나 민첩하게 움직이는 법 등 호신술을 익히고 회피력을 높이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가는 어느 날, 방 안에 홀로 앉아있던 나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반지 함처럼 생긴 그것의 뚜껑을 열자, 안에는 붉게 빛나는 구슬이 새초롬하게 앉아있었다. 일전에 황제의 창고를 털 때 따로 챙겨온 알약이었다.

이걸 레이몬드에게 먹일 때가 된 것 같아.

이 영험한 약은 한 번 먹으면 약효가 일 년 가까이 유지된다고 한다. 약효가 제대로 돌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주일 전에 미리 먹이는 것이 좋고 말이지.나는 반지 함을 도로 닫고서 눈동자를 빛냈다.똑똑.

“레이몬드. 에일린이에요. 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그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일린. 어서와.”

내 얼굴을 본 레이몬드의 표정이 별빛처럼 환해졌다. 그는 집무실에서 혼자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전해줄 게 있어서요.”

“그게 뭐지?”

나는 집무용 책상으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반지 함을 그 위에 살포시 올려 두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은지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가득 차올랐다.

“한 번 열어보세요.”

그는 다른 부연 없이 내 요청대로 반지 함을 들었다. 어떤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눈빛은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모조리 증발해버렸다. 대신 물음표로 가득해졌다.

“이건?”

“지난번에 황제의 창고를 털 때 챙겨두었던 약이에요. 이걸 먹으면 전투력이 한층 더 상승할 거예요.”

“오호. 이렇게 챙겨주다니 고마운걸.”

“뭘요.”

“혹 청혼하는 건가 기대했는데 아니라니 아쉽군.”

“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전쟁을 앞둔 마당에 결혼하자고 덤비면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그나저나 레이몬드는 농담처럼 던져놓고서 정말로 청혼이 아니어서 아쉬웠던 걸까. 실망감이 깃든 표정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며칠 후, 레이몬드는 청혼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생각을 철회하고 싶어 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뜬금없이 내 방으로 찾아와 항의했다.

“에일린.”

“왜 그래요. 레이몬드. 어디 아파요?”

노크를 한 그가 비틀거리며 문에 기대자, 깜짝 놀란 내가 다가가 팔을 뻗었다.

“실은 내게 청혼하려던 게 맞았던 건가?”

“네?”

한밤중에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람?

영문을 몰라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자니 레이몬드가 이마를 짚으며 끄응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가만히 보니 그는 평소와 어딘가가 달라 보였다. 퇴폐미가 흐르는 치명적인 느낌에 위험한 분위기를 풍겨대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전에 내게 준 약 말이야. 무슨 약이야? 나한테 대체 뭘 먹인 거지?”

“말한 그대로예요. 강해지는 약인데….”

설마 부작용이 있나?

원작소설에서 황제가 먹었을 때는 부작용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 혹시 레이몬드의 몸에는 안 맞는 걸까?

“어디가 안 좋아요?”

“그게 말이지, 실은….”

나는 그를 살짝 부축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몇 걸음을 걷는 동안 초조했지만,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소파에 앉은 레이몬드는 애써 긴장을 풀려는 사람처럼 크게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열린 그의 붉은 입술이 왠지 유난히도 야릇해 보였다.

“에일린의 말대로 강해지긴 했는데.”

“오. 벌써 효과가 나타난 거예요? 빠르다.”

그리 대답하는 그의 얼굴은 점차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반가운 소식에 기뻐했지만, 끝나지 않은 뒷말을 마저 기다렸다.

“힘이 넘쳐도.”

“넘쳐도…?”

“너무 넘쳐.”

“에? 그건 좋은 거잖아요?”

의외의 좋은 소식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곧 전쟁이 터지면 힘을 표출할 일들 투성이일 텐데 뭐가 걱정이람?

“주체가 안 돼. 피로하지 않아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야.”

“와, 약효가 정말 엄청나구나.”

부작용이 아니라 특별 작용 같은데?

“게다가 자꾸만.”

“자꾸만…?”

“에일린이 생각나.”

“아…?”

레이몬드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응시하는데 순간 그의 진득한 눈빛이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무서운 것과는 느낌이 조금 다른데.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생각나는데. 밤에는 특히 견딜 수가 없어. 널 안고 싶어서.”

그의 설명을 들으며 눈동자가 담고 있는 분위기를 가만히 짐작해보았다.

아, 그래! 야한 소설을 읽을 때 그런 느낌이야! 그런… 느낌이라고?

“헙.”

나는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서둘러 두 손으로 막았다. 다시금 천천히 생각해 보니까 원작소설 속에서 황제가 먹었던 구슬은 파란 구슬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뒤늦게야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레이몬드가 삼킨 붉은 구슬은 황제가 여주를 만나고 나서 먹은 그것이로구나. 행복한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어주었던 바로 그 명약 중의 명약!

내 경악 어린 표정에 그는 다시 한번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한 손을 무릎에 걸쳐 가운데가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가린 채로 말이다.

“어쩌죠? 약이 바뀌었나 봐요.”

“역시 그렇군. 이대로는 내가 정말 곤란하다고.”

이거 큰일인데.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하며 약을 주었는데 다른 데서 기대하게 생겼네?

약효는 일 년을 간다는 말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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