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런 후작 가가 대공 편이 되었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퍼지면서, 암암리에 동조의 뜻을 내비치는 귀족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때마침 바람을 맞은 배처럼 대공은 세력을 순탄하게 확장해가고 있었다.
그만큼 내 시름은 더욱 깊어져 버렸다.
나는 그의 편에 서겠다고 주장했다가 레이몬드에게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안 돼.”
“어째서요?”
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토독 두드리면서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나는 내 목소리가 방 바깥으로 들리든가 말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서도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걸 알 터였다.
“에일린도 잘 알잖아. 그대의 집안이 친 황제파인걸.”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래서 에일린이 카일의 약혼녀인 거니까.”
레이몬드는 근거를 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말했으나 그게 더 화를 돋웠다.
“아, 그럼 저는 예비 황후로서 황제 편에 서야겠네요?”
“그런.”
“아예 황성에 살아야겠어요. 안 그래도 거의 매일 불려가다시피 하는데.”
씩씩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곁눈으로 슬쩍 보니 레이몬드가 턱을 괸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악역한테 너무 까불었나?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것도 도울 수 없게 되어버린단 말이야.
“에일린.”
“네?”
강단 있게 소리 지른 것과는 딴판으로 이름이 불리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내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순간 그 기세에 눌려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이어진 건 레이몬드의 달콤한 손길이었다.
그는 손으로 내 팔을 붙잡아 부드럽게 자신 쪽으로 당겼다.
“왜 그대답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거지?”
“뭐… 뭐요?”
이런. 너무 오버해서 속마음을 들킨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말까지 더듬거리며 나왔다.
“내가 그대와 그대의 부모님을 걱정한다는 걸 잘 알잖아.”
“그렇지만 저도 레이몬드가 걱정된단 말이에요. 함께 싸우고 싶어요.”
이제 머지않아 황제와 대공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류를 탄 일로 돌이킬 수 없이 예견된 미래가 되었다. 그 현장에 나만 쏙 빠진 채 싸움 구경이나 하는 건 질색이었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야. 너무 위험해.”
“하지만 황제가 저를 잡아가서 치료사로 부려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거기에 대해선 따로 방도를 생각하는 중이야.”
그는 또다시 고심에 빠졌다.
역시 나를 끌어들이지 않을 작정이구나. 나 역시도 무작정 레이몬드를 따르기가 곤란한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답답함이 차올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뽀로통해진 나는 팔짱을 끼며 볼을 부풀렸다.
“다시 납치라도 하던가.”
“납치!”
그러고 무심코 말을 내뱉었는데 레이몬드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는 잃어버렸던 길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게 좋겠어.”
“네?”
“그대를 납치해야겠어.”
“….”
저 사람, 진심이구나!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있는 것은 광기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
납치는 갑자기, 뜬금없이, 예상치 못하게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지만, 나의 두 번째 납치는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그 누구도 납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주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게 설계를 했다. 나의 마법 선생인 헤링턴의 권유에 따라 서점에 가다가 코아와 함께 사라지는 것. 이것이 베스트였다. 둘 다 대공의 사람이라서 심적 부담이 없을 테니까.
이 일에서 가장 마음이 쓰이는 점은 부모님이 받을 충격이었다. 처음 에일린의 몸에 빙의되고 납치되었다가 돌아갔을 때, 수척한 두 얼굴에서 떠오른 환희와 기쁨을 보았으니까. 황제의 편이어야 한다는 가문의 뜻을 거스르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그리하여 레이몬드와의 의논 끝에 몰래 편지를 전해주기로 했다. 옥희를 이용해 사정을 전달한다면 반드시 믿고 기다려 줄 터였다. 에일린의 부모님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골목골목을 샅샅이 뒤져.”
“예.”
납치 자작극이 일어난 후 수도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공작 저가 뒤집히고, 거리에는 경비병들이 쫙 깔렸다. 황제는 이번만큼은 나를 진심으로 찾아 헤맨 듯했으나, 차마 대공의 세력 안까지는 침투하지 못했다. 벌써 대공은 그에 견줄 만큼 막강했기에 무력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 허리를 단단히 잡으시죠. 아가씨.”
“알겠어요. 코아.”
한편 납치를 당한 당사자인 나는 서점 나들이를 가는 척하다가 말 머리를 돌려 유유히 레이몬드에게로 향했다. 남들이 상상한 두렵고 급박한 상황이 아닌, 아주 편안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레이몬드와 만나 식사를 하고 옆에 앉아 디저트를 먹으면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내내 구경했다. 심심하면 한 번씩 대화도 하면서 말이다.
별이 뜨는 까만 밤이 되고, 나는 내 마음과 상황을 간단히 적은 종이를 옥희의 다리에다가 묶었다. 쪽지가 다리에 매달리자 옥희는 커다란 두 날개를 펄럭이더니 공중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어머니, 아버지. 저 에일린이에요.
저는 황제 폐하를 곁에서 따를 수 없을 것 같아요. 이것이 제 결심이에요.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꼭 강건하세요.]
예상대로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하던 공작 저는 옥희가 다녀간 후에야 비로소 대부분의 방이 소등되었다. 연기가 필요하니 최소한의 불빛만은 남겨두었겠지. 지혜로운 나의 부모님이라면 걱정과 한탄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대책을 세워나갈 것이다.
내가 납치라고 쓰고 요양이라고 읽는 연유로 머물러 있는 이 저택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퍼먼트 옆의 러스라는 마을이었는데, 러스는 루슬로 대공 가의 영지 중의 하나였다. 크지 않은 소도시로,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마을 전체가 여러 겹의 요새로 이루어져 있어 전쟁을 치르기에 알맞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요 며칠 저택에 머무르면서 나는 간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른바 슬기로운 납치 생활. 전쟁이 다가오고 있기에 스쳐 갈 짧은 여유지만 우선은 즐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최애를 실컷 볼 수 있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었다.
나를 자유롭게 방치해두었던 예전의 납치와는 달리, 레이몬드는 하루 종일 나랑 붙어 다녔다.
“대공 전하. 명령하신 대로 무기를 점검 및 정비하여 1에서 9 무기고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잘했다. 근데 에일린은 어디 있지?”
“저 여기 있어요.”
멜라스한테서 보고를 듣던 그는 책장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서류를 보다가도, 의논을 하다가도, 지시를 내리다가도 나를 찾았다. 떨어지면 꼭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녀야만 했다.
사실 나도 좋다고 따라다녔지만. 헤헷.
잠을 자는 첫날 밤에는 늦게까지 내 방에 머물며 쉬이 떠나지를 못했다. 말로는 “피곤할 테니 어서 쉬어.”라고 말하면서도 발걸음이 머뭇거렸다. 내가 다섯 번째 하품을 하고 나서야 레이몬드는 억지로 방을 떠났다.
***
따사로운 햇살이 사방으로 부서져 내리는 아침.
나는 물뿌리개를 들고서 테라스에 앉았다. 내게 배정된 방 앞에는 키 큰 나무가 솟아 있었는데, 거기에는 수많은 종류의 새들이 아침의 영광을 노래하며 쫑알쫑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때, 테라스로 들어서는 유리문이 열리더니 레이몬드가 들어왔다.
“에일린.”
“레이몬드. 왔어요?”
그가 아침 인사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앞으로 향했다.
레이몬드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식물한테 물을 주듯이 물뿌리개로 새들한테 뿌리고 있으니 아주 희한했겠지. 더 신기한 건 그걸 좋다고 맞고 있는 새들일 테고.
한참을 구경하고 있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뭘 하고 있는 거지?”
“아, 이러면 치유력이 발동돼서 활력이 생기거든요. 얘들이 해달래서요.”
“그…래?”
진기한 장면을 마주하자, 레이몬드는 말없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이한 활동을 끝마치자 그가 나를 재촉했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지.”
“저기, 레이몬드.”
“음?”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어냈다. “저는 레이몬드랑 붙어 지내는 게 정말 좋지만요,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얼 말이지?”
“제가 계속 레이몬드 옆에 있으면 불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레이몬드에게만 해야 할 말이 있을 수도 있고요.”
최애와 내내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건 내 일생일대의 소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전시상황. 내 사리사욕만 챙길 때가 아니었다. 말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지만, 고민을 거듭한 끝에 모두를 위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흐음.”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겠어. 에일린에게도 할 일이 있을 테니까 이제부터는 좀 자제하도록 하지.”
“네. 좋아요.”
나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서, 내 조언대로 우리는 식당 앞에서 곧장 헤어졌다. 그 이후로 그는 점심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듣자 하니 회의에 들어갔다고 했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생겨 무엇을 할까 고민했지만, 막상 할 일이 없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내 유일무이한 취미인 덕질을 포기한 셈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휴우.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이야. 에일린.”
“레이몬드!”
점심시간에 다시 식당 앞에서 마주친 레이몬드를 보자 어찌나 반가운지. 고작 몇 시간이건만 우리는 최소 한 달은 보지 못했던 것처럼 즐거워했다.
시리도록 푸른 그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내 가슴이 찡해오면서 울컥했다. 괜히 떨어지자고 했나 싶은 후회마저 밀려들었다.
그렇게 다가올 이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가 식사 후 같이 디저트를 먹자며 자리를 마련했다. 밥을 다 먹고서 곧장 헤어지지 않아도 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