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됐다!”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뻐서 외쳤더니 옆에서 “커헉.” 하며 기함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반이었다. 그는 다급히 입을 막아 소리를 줄여보려는 듯했지만 이미 다 들었는걸?
“공녀님의 힘이 그리 강하신 줄을 몰라서. 제가 그만 결례를 했습니다.”
예의 바른 에반은 즉시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딱히 그럴 것도 없어 보였다. 왜냐면 내가 힘이 센 걸 이미 알고 있는 레이몬드 조차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으니까.
설마 내가 본인보다 센 줄은 몰랐던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으니 움직일 시간이었다. 나는 자물쇠를 걷어내고서 손잡이를 당겨 문을 양옆으로 열어젖혔다.
묵직한 문이 열리면서 형성된 바람이 얼굴에 쓴 복면에 와 닿았다. 눈앞에는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드러났다.
“와.”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가 저절로 환해졌다. 곳곳에 설치된 마법 등이 켜져 밝아진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수월하게 안을 살필 수 있었다. 길게 펼쳐진 공간에 붉은 벨벳으로 덮인 수십 개의 테이블이 놓였고, 그 위에 물건들이 하나씩 진열되어 있었다. 물건은 칼이나 방패, 왕관에서부터 희귀한 옷감이나 용도를 알 수 없는 것까지 다양했다.
“안이 정말 잘 되어 있는데요?”
“그러게.”
잠시 감탄하며 구경할 시간을 가진 후에, 레이몬드와 에반은 준비해온 자루에다가 옮기기 쉽고 가벼운 물건 위주로 담기 시작했다.
“저는 안을 좀 더 살펴보고 올게요.”
나는 두 사람이 열심히 나르는 동안에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따라온 목적이었던 그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걸으며 하나하나를 시선으로 빠르게 훑어가던 중, 특이한 생김새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테이블 위 폭신해 보이는 작은 방석 위에 올려져 있는 건 알사탕처럼 보이는 작고 붉은 구슬이었다.
‘오. 이건가?’
긴가민가하며 다가가서는 손을 뻗어 구슬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냥 사탕처럼 보였지만, 평범한 사탕을 여기에 뒀을 리가 없지.
나는 구슬을 반대편 손바닥 위에다가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치 자체발광하듯이 빛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내가 찾던 그거다!’
책에서 보았던 방법대로 확인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그 영험한 약이라는 걸.
원작소설에 따르면 이 알약을 먹은 사람은 전투력이 기존보다 두세 배가 상승한다고 한다. 황제는 소설 속에서 이 약을 먹고 반란군을 상대했었다. 검술이 대공만큼 뛰어나지는 않음에도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열 명씩 해치웠으니 효과가 대단한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어 그것을 품속에다가 집어넣었다. 보관했다가 훗날 필요할 때 사용하리라고 결심하면서.
“다 담았어요?”
입구 근처로 돌아가 보니 레이몬드와 에반이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들의 아래에는 부피가 큰 보따리가 양쪽으로 하나씩 놓여 있었다.
“양이 엄청나네요?”
“이 정도는 거뜬히 옮길 수 있죠.”
“좋아요. 그럼 서둘러 떠나요.”
나의 재촉에 두 사람은 양어깨에 짐을 하나씩 짊어지고서 발을 내디뎠다. 개인 창고를 몽땅 털었으니 황제가 내일 알게 되면 배가 아주 많이 아플 거다. 우리는 흔적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고서 왔던 길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
비밀 창고를 알차게 턴 대공 세력은 몇 개의 창고를 새로운 귀중품들로 꽉꽉 채웠다.
황제는 하룻밤 새에 빈털터리가 되었건만, 그곳들은 비리와 얽혀있는 공간들이라 정식 수사를 명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범인을 알면서도 놓아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니 속으로 얼마나 약이 오를까?
황제가 대공의 공장을 부순 일과 대공이 황제의 창고를 턴 일은 한 번씩 주거니 받거니가 되었고, 이 두 가지 일을 계기로 제국 내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신문에 나오진 않아도 황제와 대공의 갈등 구도가 대외적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구도로 인해 여태껏 조용히 있던 반 황제 파들이 대공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공의 세력은 나랑 차기 마탑주 니얀, 그리고 런 가의 남매를 기본토대로 했다.
먼저 니얀의 합류였다.
그는 마탑주의 요청에 의해 마탑으로 소환되었고, 일을 마친 후 레이몬드의 아지트 쪽으로 넘어왔다. 황제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볼 일을 틈타 들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레이몬드, 멜라스가 모인 자리에서 니얀은 마탑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마탑주께서는 처음부터 황제에게 추가 병력을 내줄 수 없다고 딱 자르셨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몰래 중립을 지키라고 새롭게 명령을 내리셨죠.”
“중립이라면 이기는 편이 우리 편, 뭐 그런 건가요?”
“그런 셈이죠.”
나의 물음에 니얀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마탑의 행동은 박쥐 같았지만,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현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싸움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는 거겠지?”
“네. 앞으로 저희는 철저히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레이몬드의 확인 사살에 그가 다시 한번 단언했다.
마법 사단의 세력이 마탑주 파와 차기 마탑주 파로 갈라져 있으나, 그 두 사람의 의견이 같은 이상 걱정할 게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혹시 황제가 포션을 요구하진 않았나요?”
“마탑주께서 제공하기로 약속하신 포션은 단 세 병입니다.”
“얼마 없네요.”
“네. 자기 자신한테만 쓰겠지요. 그렇기에 에일린 님을 더 원할 겁니다.”
마탑에서 많은 양의 포션을 제공했다면 황제를 이기는 게 힘들어졌을 텐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덕에 내 주가는 수직상승 했지만 말이다.
니얀은 이어 눈썹 양 끝을 아래로 기울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에일린 님의 편이나 전면에 나설 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대신 간자로 활동하면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알아요. 그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에일린도 겉으로는 아군인 척하고 있어. 속을 드러내 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알겠어요.”
레이몬드의 당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무진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람이 불고 니얀이 텔레포트를 써서 사라지자, 멜라스가 레이몬드를 보며 한 가지 제안을 올렸다.
“대공 전하. 우리도 편을 모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괜찮은 가문에서 지원을 해준다면 소문이 퍼져나가 너도나도 몰려들 겁니다.”
“과연 그렇겠지. 누가 좋을까?”
“런 가문이 어떠십니까.”
“혼사를 거절했는데 괜찮을까?”
“흐음. 그렇군요. 나비엔 런 아가씨께서 크게 상심하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걱정 마세요.”
멜라스가 망설이는 틈을 타,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자신만만한 내 표정으로 시선이 몰려들었다.
“제가 보증하죠!”
허리춤에 두 주먹을 얹은 채 당당하게 외쳤다.
인맥은 이럴 때야말로 빛을 발하는 게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거래에 이용할만한 확실한 무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나비엔의 속마음을 안다는 거였다.
나비엔은 대공의 혼사 거절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었다. 내게서 이 사실을 소상히 전해 들은 레이몬드는 런 가에다가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의 답으로 지금 나비엔, 아드리엔과 함께 마주 앉게 되었고 말이다.
“정말로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요. 런 영애.”
레이몬드가 거래로 내세운 것은 나비엔이 결혼을 하지 않고 유학을 떠나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거래내용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공 전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지.”
거래가 성사되자, 두 사람은 일어나 악수를 나누었다. 런 가문이 황제냐, 대공이냐를 선택하는 중요한 일은 나비엔이 주도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드리엔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고 말이다.
나는 그를 한 번 불러보았다.
“아드리엔.”
“응?”
“차기 가주는 너 아냐?”
“나였어? 쟤 아니고?”
“….”
본인까지 그렇게 말하는 마당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대공은 무사히 런 가와의 동맹을 체결했고, 이 소식이 곧 사교계에 퍼지면 앞으로 많은 가문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나비엔은 떠나기 전에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고마워 언니. 덕분에 원하는 도움을 받게 되어서.”
“아냐. 내가 더 고맙지.”
“사실 거래가 아니었어도 대공 전하께 협조했을 거야. 난 언니 편이거든.”
그녀는 내 귓가에 속닥대더니 팔꿈치를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다 안다며 눈짓을 주는데 그게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절로 달아올라 화끈거렸다.
런 가는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한다고 하지만, 레이몬드와 혼사까지 의논한 사이일 만큼 황제 쪽보다는 대공 쪽 세력에 가까웠다. 검술 명가라 집안 대대로 정의를 추구하는 신념이 강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민은 내 쪽이었다. 코웻 공작 가야말로 카일이 황태자일 때부터 밀어줄 만큼 친 황제 파 집안이니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해바라기 씨를 콕콕 찍어대는 옥희를 보며 막연한 기분이었다. 대공의 편이 되고 싶은데, 부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도 어렵고 말이지.
“휴….”
한숨을 푹 내쉬자, 옥희가 고개를 들고서 “옥옥.”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왼쪽으로 45도가량 꺾어 기울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깃털의 결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도 먹으면서 먹으렴.”
“옥.”
옥희는 짧게 대답하더니 컵 속에 부리를 쏙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