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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역이 집착남이 되었다-83화 (83/125)

83화

열흘은 꽤 바쁘게 흘러갔다.

화장품 공장을 복구하고 사전답사를 하느라 대공의 부하들은 분주하게 보냈다. 나 또한 오랜만에 화장품 사업에 몰두할 수 있었는데, 니얀이 내게 CCTV 실드를 건 이후로는 황제가 아예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얀과 나는 나란히 서서 공장 설비가 고쳐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레이몬드 쪽 세력을 주시하고 있겠죠?”

“공장을 고치느라 바빠 보이니 눈가림이 확실하지요.”

“부하들을 치료하느라 바쁠 테고 말이죠.”

그날 다쳤던 닉스와 클로이는 요양하는 척하기 위해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 빠져있었다.

“나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아요?”

“가끔 구슬을 보여주며 행동 패턴에 거의 변화가 없다고 알리고 있죠.”

“그렇구나.”

재설치가 완료되자 시범작동을 시작했다. 곧 시설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역시 지엄하신 대마법사님이라 신뢰를 받고 있나 보다.”

“아니요. 실은 당분간은 못 나올 것 같아요. 오늘은 그걸 알리려고 왔습니다.”

“어째서요?”

“황제가 자신의 명을 거부한 온건파의 존재에 충격을 받은 거지요. 그들이 나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걸 알게 되자, 제게 불신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거든요.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공장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두고 마법사들끼리 파가 갈린 게 문제가 되었나 보다. 마탑의 일이니 황제의 입장에서는 직접 간섭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을 잘 믿지 않는 카일의 성정 상 의심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건수였다.

‘카일이니까.’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니얀이 비죽 튀어나온 입술로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에일린 님.”

“응?”

“왜 섭섭해하지 않으세요?”

“뭘요?”

“제가 당분간 못 온다고요.”

“아아. 당연히 섭섭하죠.”

“정말요?”

“그럼! 텔레포트가 정말 편했는데 말이죠.”

“….”

나는 박수까지 짝, 치며 호응을 해줬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둘이 죽이 아주 잘 맞나 보군.”

그때 근처에서 살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쳐와 몸을 돌려보니, 뒤에 두 눈을 흉흉하게 빛내고 있는 레이몬드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그는 미간을 구긴 채로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레이몬드! 왔어요?”

비록 무서운 표정이었지만 내 최애는 언제 봐도 즐겁다.

나는 눈을 휘어 접으며 레이몬드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만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와서 정말 큰 일이야.

“에일린.”

내가 팔에 매달리자, 표정이 금세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반대편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왠지 강아지가 된 것 같았으나 이것도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오셨습니까. 대공 전하.”

이제는 나의 부하가 된 콧대 높은 대마법사께서는 레이몬드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쓰며 고개를 숙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그로서는 드물게 예의 바른 모습이었는데, 내가 우기는 바람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저 불만 가득한 표정까지는 어쩌지 못하고 있지만.

“공녀님. 잠시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알겠어.”

드류가 부르는 통에 나는 붙들고 있던 레이몬드의 팔을 놓으며 설비 쪽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남은 두 사람이 등 뒤에서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의 일까지 일일이 신경 쓸 수야 없는 법이지.

“이제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뭘.”

드류는 본격적으로 설비를 가동하여 에센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수동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곧 관성을 받아 자동으로 움직이게 되어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요즘에도 항의하러 손님들이 많이 와?”

“말도 마세요. 문 닫힌 상점 앞에 피켓 들고 난리들이에요. 당장 판매 재개하라고요.”

“저런.”

원래는 그가 상점 쪽 담당이었다. 눈속임으로 요양하는 척하는 두 사람을 대신해서 현재는 공장 쪽을 맡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원망의 화살은 아니더라고요. 소문의 덕을 본 거죠.”

“맞아. 잘 됐어.”

에레 에센스를 구할 수 없다고 귀족들이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모른다. 그들의 하인과 하녀들이 가게로 항의하러 오는 일이 내내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까. 심지어 지역 신문에까지 연일 보도되고 있다고 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몇몇 사람들은 원인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그들에 의해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황제가 마법사들을 시켜서 공장을 파괴했다는 꽤 정확한 소문이 사교계를 휘감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망의 대상은 황제가 되었고 우리는 여론적 이점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일이 잘 풀린 셈이었다.

공장이 다시 잘 돌아가기 시작하자 염려를 하나 덜었다. 이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완을 한층 강화해놓고서, 우리는 창고 털이의 날을 맞이하였다.

열흘 후 디데이의 새벽 시간.

나는 레이몬드, 에반 그리고 바람 속의 온과 함께 위치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비밀 창고로 향했다.

이곳은 황성 내에 있어서 따로 사전답사를 오지 않았다. 의논 끝에 오히려 잦은 방문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에 나와 있는 위치설명이 수수께끼 같아서 내가 직접 가야만 했다.

“에일린은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가야 헤매지 않는다니까요.”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복장을 한 채 새벽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 역시 복면을 써서 누가 봐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완벽히 가린 상태였다.

레이몬드도 위험할 거면서 다른 사람만 걱정이람?

황성에 도착할 때가 다 되어 가는데도 그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염려하는 중이었다.

이 창고로 그가 직접 가는 이유는 분명했다. 만약 황성 내 침입이 들켰을 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다는 것. 적진의 한가운데로 침투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포기하면 되지 않냐고? 노놉. 그건 결코 안 될 말이다. 그곳이야말로 황제가 개인 창고처럼 사용하는 곳이라 아끼는 귀한 물건들이 많았다. 특히 내가 꼭 써야 할 물건도 있고 말이지.

ㅡ 황금 정원에 다다라 곧게 솟은 다섯 번째 나무의 끝이 닿는 곳에서.

레이몬드가 아는 비밀 통로를 통해 황성 내로 잠입한 우리는 황금 정원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도착했다. 진짜 황금으로 된 정원은 아니고 푸른 신록이 우거진 곳인데, 해가 질 무렵이면 태양 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마치 황금처럼 빛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곳은 황제의 개인적인 공간인 데다가 늦은 시간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소설 속 힌트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떼었다.

ㅡ 왼쪽으로 열 걸음을 가고 또다시 오른쪽으로 스무 걸음을 가라.

“그럼 이쪽인가?”

“아니에요. 이건 황제의 방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라서요.”

우리가 들어온 방향 대신 황제가 황성에서 나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움직여야 했다. 곧게 솟은 나무는 대나무를 일컫는데, 지칭하는 다섯 번째 대나무는 다른 애들보다 유독 키가 작았다. 그 끝을 기준으로 고개를 돌리자 통로와 같은 공간이 보였다.

“여긴가 봐요.”

역시 지시대로 두 번 꺾어 들어가자 웬 막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ㅡ 옆 벽 중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있으니 지그시 눌러주어라.

꼭 보물을 찾아 떠나는 도굴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인걸.

스릴을 만끽하면서 다가가 벽을 더듬어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예민한 손의 감각을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이윽고 유독 도드라진 돌을 찾아내어 힘을 주어 눌렀다.

생각보다 돌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돌로 되어있는데도 작은 마찰음 하나 나지 않은 걸 보면 평소에 관리를 잘 해두는 듯했다.

ㅡ 벽이 회전하면 그것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딘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이 공기가 바뀌어있었다. 레이몬드가 정면으로 가 팔로 슬쩍 밀자, 돌로 된 벽이 회전문처럼 가동되었다.

“들어가지.”

그의 지시에 나와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동했다. 바람 속에 있던 온은 바깥을 지키기 위해 함께하지 않았다.

돌문을 따라 회전을 마친 우리는 또다시 막다른 공간 앞에 섰다. 이번에는 바위 문 대신에 손잡이까지 달린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문이 떡 버티고 있었다. 특별한 점은 손잡이에 사람의 머리통만 한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는 거였다. 우리 셋은 동시에 그것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문이 잠겨 있는데 어쩌죠?”

결국은 에반이 각자의 머릿속에 든 공통된 의문을 입 밖으로 내며 잠시간의 침묵을 깼다.

저 자물쇠가 튼튼한 쇠로 만들어졌든 마법이 걸려있든 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깨부숴야지.”

레이몬드의 검이 날 선 음을 내며 검집에서 뽑혔다.

휘리릭. 묵직한 힘이 실린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타앙! 하는 파열음이 퍼지며 불꽃만 튈 뿐이었다.

“이런.”

“칼로는 안 되나 봅니다.”

검을 든 레이몬드가 뒤로 물러나자 에반이 앞으로 나섰다. 혹시 특별한 장치가 있을까 싶은지 앞뒤로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레이몬드가 실패하자 에반은 검으로는 다시 시도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제국의 최고 검호인 레이몬드는 힘으로 당해낼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안 된다면 당연히 자신도 될 리가 없다는 믿음이겠지.

이번에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나는 에반과는 달리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는 쪽을 택했다. 자물쇠의 몸통과 여닫는 부분을 몇 번 두드리고 흔들어보다가, 양손으로 몸통을 꽉 쥐어 아래로 세게 잡아당겼다.

뿌드득. 텅.

그러자 쇠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나더니 윗부분이 박살나면서 곧바로 몸통에서 분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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