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니얀을 동료로 받아들이게 되자 두 가지 이점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대마법사를 수하처럼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뜻밖의 수확이었는데, 가장 좋은 건 역시 자유로운 텔레포트의 사용이었다!
니얀은 내가 부르면 바로 올 수 있게 내 손등에다가 마법 표식을 새겨주었다. 반대편 손으로 슥 문지르면 신호가 가는 방식이었다. 비록 현재 마탑과 황실에 얽매인 몸이라 수시로 부를 순 없겠지만 유사시에는 가능할 테니까. 우선은 존재만으로도 든든했다.
두 번째 이점은 황제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니얀과 헤어지기 전에 그를 붙잡고서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에일린 님.”
“구슬은 어떻게 해요? 황제에게 영원히 안 보여줄 순 없잖아요.”
“아, 그거요? 괜찮아요. 에일린 님께서 공작 저에 계신 모습만 반복 재생해서 보여주면 되거든요.”
“헐. 그런 것도 가능해요? 진짜 CCTV 같네.”
“네? 그게 뭐예요?”
“음. 몰라도 돼요.”
이제는 어서 가보라며 손을 흔들었다.
행동 제약이 풀리고 자유로워지자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덕질하기. 당연히 최애 충전이지!!
그다음 날 오전에 나는 코아를 데리고 레이몬드에게로 갔다. 그러고는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그에게 돌진하고서는 품 안에 안겨 가만히 있었다.
“에일린.”
레이몬드가 또 당황하는 듯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긴급상황이라고! 거의 일주일 동안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체향이라도 흡수해야 했다.
“흡하, 흡하.”
그의 가슴에다가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는데 귓가에 일정하게 들려오던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그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혹시 키스보다 포옹을 더 깊이 느끼나?
전부터 궁금했던 터라 오늘은 아예 대놓고 물어보자 싶었다.
“레이몬드.”
“응?”
“나랑 키스까지 해놓고 안는 게 부끄러워요?”
“그게, 에일린이 먼저 안아주니까.”
“아하.”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게 좋아서 그러는구나.
언제까지고 카리스마만 뿜뿜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의 최애는 귀엽기 짝이 없잖아? 이 덕질은 하면 할수록 빠져들면서 만족도가 마구마구 상승하고 있었다.
나는 구석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턱을 괴고서 레이몬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덕질의 최고봉은 동영상 시청인데 그걸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거지.
그는 서류를 보기도 하고 부하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사람은 일에 집중할 때 가장 섹시하다고 했던가. 그 모습 하나하나를 하트가 흘러나오는 눈으로 사진을 찍듯이 정성껏 담아냈다.
“아, 맞다.”
어느 정도 충전이 되어 정신이 차려지면서 니얀에 대해서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바로 그때였다.
쿠궁. 멀리서 폭발음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뭐지?
이상을 감지하고 고개를 번쩍 들자, 레이몬드가 잽싸게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서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는 회색빛 연기가 보였다.
잠시 후 벌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에반이 들어와 다급히 보고했다.
“대공 전하. 마법사들이 공장을 부수고 있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요?”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법사들의 행각도 충격이지만 무엇보다도 큰 충격은 내 안에 몰아친 의문이었다.
황성에 파견된 마법사들의 우두머리가 내 편이 됐는데 이게 무슨 일이래?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레이몬드와 나는 당장 말을 타고 공장 쪽으로 이동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연기가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도착했을 때엔 마법사들은 이미 가고 없었다. 물탱크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져 불에 활활 타고, 부차적인 시설들이 산산조각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공장 내의 시설은 간단했기 때문에 부서뜨리고 곧바로 돌아간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격리되어있는 바람에 한동안 공장가동을 대폭 줄인 상태라는 거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멜라스는 공격받을 당시 일하고 있던 사람이 닉스와 클로이뿐이라고 말해주었다.
“닉스와 클로이는 어디에 있나?”
“저쪽입니다.”
레이몬드의 물음에 그의 안내를 따라 근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있는 두 사람을 만났다. 닉스가 마법사들에게 대항하려다가 팔에 화상을 입었고, 그를 말리던 클로이는 팔에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었다.
“바로 치료해줄게요.”
나는 병과 물을 가져와 치유액을 만들어 두 사람에게 사용했다. 발갛게 부풀어 올랐던 닉스의 팔이 가라앉았고, 클로이 또한 흉터 하나 없이 멀쩡해졌다.
“공녀님 정말 대단하세요!!”
닉스는 고통이 실시간으로 사그라지는 경험을 하자 흥분하여 외쳐댔다. 기쁨에 못 이겨 나를 껴안으려고 다가오다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 대공을 발견하고는 바로 뒷걸음질을 쳤다. 클로이는 차분히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두 사람을 치료하고 나서 레이몬드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그에게 니얀에 대해 간단히 말해주었다. 그러고는 그를 불러내어 직접 설명을 듣기 위해 손등을 쓰다듬었다.
슈르륵.
텔레포트로 인한 바람이 일면서 드러난 은발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잠시 후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빛나더니 나를 발견하자마자 옆으로 곱게 휘었다.
“부르셨습니까, 나의 주인이시여.”
니얀은 내게로 다가와 손을 붙잡고는 손등에다가 입술을 대었다. 속으로 ‘안 돼!’를 외치는 동시에 레이몬드가 그의 팔을 거칠게 쳐내었다. 깜짝 놀란 니얀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항의하듯이 물었다.
“헛, 에일린 님. 이 무례한 자는 누굽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전에는 황제랑 레이몬드의 알력 싸움이더니 이제는 레이몬드랑 대마법사의 충돌인가.
급작스레 피로해졌지만 나는 레이몬드의 팔을 당겨 찰싹 달라붙었다.
“이쪽은 루슬로 대공 전하세요. 저의….”
“보호자다.”
최애라는 설명을 곁들이려다가 멈칫했는데 그 틈에 그가 끼어들었다.
보호자? 보호자라니.
레이몬드는 내게 있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뜻밖의 지점을 발견하여 감격하고 있을 때, 니얀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분이 바로 그 루슬로 대공이시군요.”
그가 흥미로우면서도 위험한 눈빛을 발산하자 관심을 차단해야 할 필요성을 감지했다. 잽싸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첨언했다.
“제게 아주 소중한 분이니 저에게처럼 잘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끄응. 알겠습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으나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수긍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황실의 마법사들이 공장을 공격했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 그건.”
내 질문을 들은 니얀은 침통한 표정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황성에 파견된 마법사 단은 실질적으로 두 파로 나뉘어있었다. 한쪽은 현 마탑주를 지지하는 강경파, 다른 쪽은 차기 마탑주인 니얀을 지지하는 온건파로 말이다. 자신은 마탑주를 묵묵히 따르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승계자란 이유로 세력이 갈렸다고 한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마법사 단에 황제의 긴급한 명령이 전달되었다. 기회의 순간이 왔으니 대공의 공장을 파괴하기를 재촉한 것이다. 이에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이 나뉘었다. 그 당시 부재중이던 니얀을 두고서 황제의 명령을 이행할 것이냐, 그를 기다릴 것이냐로 말이다.
두 파는 극명하게 다투더니 결국 강경파만이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이동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공장을 부수고 달아난 것은 강경파 마법사들이었다.
“어쨌든 카일의 명령이라 이거군.”
“레이몬드가 운영하는 걸 알고 세력을 줄이기 위해 움직였나 봐요.”
“그렇겠지.”
황제는 대공을 견제하기 위해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설 참인 듯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침통한 분위기가 흐르는 내부를 쭉 둘러본 나는 힘을 돋우기 위해 호기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복수전으로 가죠.”
“복수전?”
“네. 당하기만 하면 억울하잖아요. 혹시 돈 필요 없으신가요?”
모두를 둘러본 나는 한쪽 눈동자를 찡긋 감았다.
그리하여 아주 오랜만에 원작의 지식을 꺼내 들었다.
황제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비리 귀족들의 뒤를 봐주는 대신에 뇌물을 착실히 받아내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관해 두는 비밀 창고가 제국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바로 그 창고들을 털 계획을 세울 것이다.
“여기를 봐주세요.”
대공의 아지트로 돌아온 나는 에반이 구해다 준 지도를 건네받고서 테이블 위에다가 넓게 펼쳤다. 그러자 모두가 몰려들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프라레스 제국의 지형이 제법 상세하게 나와 있는 지도였다.
“비밀 창고는 동서남북을 나누어 봤을 때 세 곳, 네 곳, 일곱 곳, 두 곳이 있어요.”
손가락으로 정확한 위치를 탁탁 짚어주었더니, 지켜보고 있던 이든이 감탄을 터트렸다.
“와,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알 수가 있지?”
“예지몽을 꾸신다잖아.”
“나라면 꿈에서 깨어나면서 다 까먹을 것 같은데.”
드류의 설명에 이든이 뒤통수를 문질렀다. 지도를 빤히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에반이 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나저나 북쪽에는 두 군데뿐이로군요.”
“과연 남쪽에는 일곱 군데나 되고 말이지.”
환경이 열악하기도 하고 지리적으로 먼 북부 쪽은 창고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수도가 있는 남부는 황제가 있는 만큼 많은 게 당연했고.
말을 받은 레이몬드가 느른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매끈한 턱선을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기다란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돌렸다.
“한날한시에 시행하는 게 좋겠어. 남쪽과 동쪽 창고를 공략해야겠군. 영지 쪽에도 명령을 해두지.”
“저희가 했다는 게 드러나도 괜찮을까요?”
“물론. 오히려 드러나는 편이 더 좋아.”
“제가 위치를 표시해드릴게요.”
나는 동의하며 끄덕이다가 할 일을 깨닫고서 움직였다. 내 손이 꼬물꼬물 움직인 곳에는 까만 점이 열 개가 찍혔다.
회의가 끝나자 레이몬드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수도의 부하들뿐만 아니라 영지에까지 날짜와 시간을 첨가하여 장소가 표시된 지도를 배부했다. 완벽한 일 처리를 위해서 사전에 가서 위치를 파악해두라는 당부까지 넣어서 말이다.
수도 쪽에서도 사전답사를 다녀오면서 준비를 철저히 마쳤다. 레이몬드도 모자란 인력을 채우기 위해 직접 뛰기로 결정했다.
디데이는 지금으로부터 열흘 후. 모두가 잠들어있을 새벽 세 시.
그날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