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퉁명스럽게 굴던 니얀은 이날 밤 또 정원으로 찾아왔다. 지난번에는 밤하늘의 별구경이더니 오늘은 대뜸 불꽃 쇼를 보여준다고 했다.
“웬 불꽃 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다시 웃는 낯으로 변한 그는 이번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저택의 하녀들까지 몽땅 모았다.
“어머. 불꽃 쇼라니 정말 기대돼요.”
“대마법사님의 마법을 볼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요?”
정원으로 모여든 하녀들은 하하호호 떠들며 설렘을 마음껏 표출했다.
모두의 앞에 선 니얀은 매직쇼를 펼치는 마술사처럼 손가락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자 공중에 작은 원이 그려지더니 하늘 위로 곧장 올라갔다.
펑 퍼벙.
노랗고 빨갛고 초록빛을 띠는 불빛이 까만 하늘에서 사방으로 번졌다. 꽃 모양으로, 혹은 단순한 원을 그리며 동그랗게 퍼져나갔다. 온 하늘을 덮을 만큼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원을 덮을 만큼은 되었다.
임윤경으로 살았던 시절에 많이 보았던 불꽃 놀이었다. 그곳에는 불꽃놀이 축제나 행사 때 불꽃놀이로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일이 잦았으니까. 내게 있어서는 전생의 추억 같은 거였다.
“어머어머.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요!”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하녀들은 환호하며 감탄을 터트렸다. 누군가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린 채로 있기도 했다. 저들은 이런 진귀한 광경을 난생처음 보겠지.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일까.
불꽃이 터질 때마다 내 심장도 같이 쿵쾅거렸다. 이제는 전생이 되어버린 어린 시절, 엄마 아빠와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건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으니까. 하늘로 쏘아졌다가 반짝거리며 떨어지는 불꽃을 볼 때면 설렘으로 가슴이 떨리곤 했었지.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다가 끝에는 그만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버렸다.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 게 될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잊고 살았던 생각들이 불현듯 나를 덮쳐 왔다.
문득 돌아본 니얀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를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낯이 이 순간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
옥희는 아주 오랜만에 내게 치료를 요청해왔다. 방에서 편안히 책을 읽고 있던 내게 날갯짓으로 자신을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던 것이다. 나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곧장 녀석의 뒤를 따랐다.
역시나 밤의 숲으로 들어섰다. 꽤 깊이 들어가나 싶더니 어느새 호수 근처까지 다다랐다. 옥희는 나지막한 나무 위에 내려앉아서는 여기라고 알려주려는 듯이 “옥옥.”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나무의 아래쪽에는 웬 빛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지난번에 만났던 빛 여우 광호였다.
녀석은 자신을 구해주었던 걸 기억하는지 나를 보자마자 세차게 낑낑거렸다. 철창 안에 갇혀 도움을 구하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먹이 트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걸려든 걸까? 애초에 신수로 추정되는 광호에게 먹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말이지.
나는 철창으로 다가가 바깥 부분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일반적인 쇠 철창처럼 아주 튼튼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때 가까운 숲속의 빈 공터에 공간이 이지러지더니 바람이 일었다. 텔레포트를 사용할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짜잔! 나 왔어요.”
바람이 휘감은 허공에서 나타난 것은 어김없이 니얀이었다. 내게 올 때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자연스레 숲으로 온 걸 보니 좌표가 나로 설정되어 있나 보다.
그러나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는 삐친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어? 약속이랑 다르다? 나 반겨주기로 해놓고선… 헛?”
오자마자 투정을 쏟아내던 그는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나보다. 떠들던 입이 다물어졌다. 그 덕에 나는 다시금 상황 해결에 몰두할 수 있었다.
광호를 가두고 있는 철창은 위아래가 나무고 그 사이 철로 된 창살이 듬성듬성하게 서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땐 철보다는 나무를 부수는 쪽이 맞았으나, 그쪽을 건드렸다가는 자칫하다 광호가 다칠 위험이 커 보였다.
나는 고심 끝에 나란히 선 창살 중 하나를 꽉 쥐어 붙잡고 바깥으로 강하게 당겨보았다. 그러자 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살 하나가 튀어나왔다.
“헉!!”
옆에서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한 채 작업을 속행했다. 하나만 더 빼면 광호가 통과하기에 간격이 충분할 것 같았다.
팅!
예상대로 창살을 하나 더 빼자, 광호가 그곳에서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녀석은 방방 뛰면서 내 팔에 매달리고는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반짝이고 보드라운 녀석을 두세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광호의 왼쪽 앞다리에 화상 자국 같은 것을 발견했다. 즉시 침을 묻혀서 문질러주자, 발갛게 부어오른 상처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가라앉았다. 그때 옆에서 또 한 번 기함하는 탄성이 터졌다.
“잘 가. 다음부터는 조심해.”
광호는 제자리를 몇 번 빙글빙글 돌더니 숲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나무에 앉아있던 옥희도 녀석을 따라 푸드덕 날아갔다. 그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던 나는 천천히 다가온 니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왔어요?”
“세상에. 방금 공녀께서 뭘 한 줄 알아요?”
“광호를 구해주고 치료해줬죠.”
“광호가 뭐죠? 아아. 저 여우 신수를 말하는구나.”
차기 마탑주로 거론되는 천재마법사께는 세상만사 놀랄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니얀은 세상에 이런 건 처음 본다는 듯 신기해하는 눈빛이었다. 게다가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광호가 신수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내 침에는 치유력이 있거든요.”
황제에게도 다 밝혀졌겠다, 현장을 소상히 다 들킨 판국에 딱히 감출 것도 없어서 그냥 말해 줘버렸다. 그러자 붉은 눈동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치유력이요? 와. 이럴 수가. 세상에.”
“그게 그렇게 신기해요?”
“당연하죠! 저 철창에는 어마어마한 저주가 걸려있었다고요.”
“저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저주라니? 금시초문이었다. 니얀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언가 일이 일어나야 할 텐데 나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니까.
이에 그가 말을 이었다.
“숨길 것도 없어요. 저 철창은 여우 신수를 잡기 위해 마탑에서 설치해둔 겁니다.”
“아니, 마탑에서 왜 광호를 잡으려는 건데요?”
“저 여우 신수가 모든 동물들의 부리미거든요. 녀석을 사로잡으면 마법 재료를 무궁무진하게 공급받을 수 있으니까요.”
“동물로 마법실험을 하는 거예요? 악독해라.”
“마탑주님이 연구마법사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죠. 아무튼 저 날쌘 녀석을 꾀어내고 잡기 위해서 온갖 저주계통의 마법 트랩들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공녀님이 그걸 맨손으로 깨뜨린 겁니다.”
“오. 굉장하네요?”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지만 니얀은 남 얘기하는 거냐며 어처구니가 없어 했다.
실제로 와닿지 않긴 했다. 왜냐면 정말로 아무것도 안 느껴졌으니까. 그의 말을 신뢰하느냐 마냐의 문제와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다음으로 취한 니얀의 행동은 이 일의 중대성을 알게 해주었다.
그는 대뜸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고개를 숙였다. 마치 왕 앞에서 충성맹세를 하는 기사의 모습 같았다.
“니얀, 지금 뭐 해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에일린 님. 앞으로 저 니얀 올리버츠는 그대의 충성스러운 종이 될 겁니다.”
“에? 왜요?”
갑자기 180도로 달라진 그의 태도에 이번에는 내가 펄쩍 뛰었다. 이게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마법을 정식으로 배우신 적이 없는 에일린 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요.”
“네, 잘 몰라요.”
“그래서 더 대단하세요. 저기에 걸려있던 저주들은 생명을 파괴하는 겁니다. 시전자 조차 풀 수 없는 위험한 힘으로 흡사 마족의 힘과 유사하죠. 이를 부수는 힘을 가진 에일린 님은 신의 권능을 가지신 겁니다.”
“아.”
신의 힘이라니 그게 정말인가! 내가 가진 치유력은 상상 이상으로 굉장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죽음과 생명은 정반대의 성질이니,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 신의 권능이라는 것도 꽤 납득할만한 설명이긴 했다.
내가 치유력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사이에, 니얀은 입술을 옴짝거리면서 머뭇거렸다. 뭔가 조심스럽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
“뭔데요?”
“실은요.”
얼마나 어려운 고백이길래 저토록 머뭇거리는 걸까. 태생이 성질 급한 한국인은 바로 닦달 모드에 들어갔다.
“빨리 말해 봐요.”
“저는 나이트 워치의 멤버입니다.”
“나이트 워치….”
“네. 황제에게 복수하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선황제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거든요.”
“저런.”
그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헐. 그렇다면 정말로 내 모든 입장을 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
“그랬구나. 황제에게 원한을 품게 된 사연은 안타깝긴 한데, 그럼 여태 내 마음을 알고도 놀려댔던 거네요?”
“네? 놀리다니 말도 안 돼요. 우리 서로 친분을 쌓은 것 아닌가요?”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교통정리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끝까지 능청스럽게 구는 니얀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벗어나지 못한 채로 몸이 굳은 그에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통보지만.
“제가 한 대만 때려도 되겠죠?”
“그…그 창살을 우악스럽게 뜯어낸 맨손…으로요? 아프지 않을…까요?”
니얀은 내가 쥐고 있는 주먹을 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당연히 아프겠죠. 그러라고 때리는 거니까.”
“아얏!”
그리고 꽉 쥔 주먹으로 꿀밤을 먹였다.
양심은 있는지 마법으로 방어막 같은 걸 치진 않았나 보다. 그의 머리 위에 혹이 실시간으로 볼록 튀어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도대체 이놈이 적인지 아군인지 엄청 헷갈렸는데 이제야 갈피가 잡히자 속이 다 후련했다.
또 하나 다행인 건 레이몬드가 까불어대는 니얀을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가진 치유력으로 공손해지길 천만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났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천재마법사를 조력자로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