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똑똑.
“아가씨. 클레어예요.”
“들어와.”
클레어는 수업이 끝난 내 방을 청소하기 위해서 들른 듯했다. 문을 닫고 뒤돌아선 그녀는 니얀을 보자마자 어깨를 들썩였다.
“엄마야. 깜짝이야!”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예고라도 해줬어야 했나?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사이, 클레어가 눈으로 니얀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누구…세요?”
“저는 니얀 올리버츠입니다.”
“방문자 기록에는 없었는데 여기는 어떻게….”
“텔레포트를 써서 왔어요. 저는 이번에 임명된 황실의 수석마법사거든요.”
“아! 아이고. 폐하의 마법사시구나!”
자나 깨나 황제 편인 클레어는 황제의 마법사인 니얀을 너무나도 반겼다. 그리고 수다쟁이에게 발견된 니얀은 곧 공작 저 내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훈훈한 외모와 능글맞은 성격은 하녀들에게서 대단히 인기 있었다. 속에 백 년 묵은 구미호가 사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그저 달콤한 언어가 흘러나오는 붉은 입술을 사랑했다.
“오늘은 머리칼이 더욱 윤기가 돌고 풍성하네요. 아름다우세요.”
“어머멋. 니얀 님이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호호호.”
니얀은 어떤 하녀를 만나든지 상대에게 꼭 맞는 칭찬으로 환심을 사는데 성공했다.
아주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네!
그가 내 집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꼴을 보니 우습고 짜증이 났다.
“그놈이 좀 안 왔으면 좋겠어.”
한 번은 이렇게 푸념을 날렸더니 클레어에게서 등짝 스매싱에 버금가는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머. 아가씨, 품격 있는 입술! 니얀 님께 그놈이라뇨. 위대한 대마법사님한테!”
“모두들 속고 있는 거라고.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니까?”
“모든 사람은 겉과 속이 달라요.”
“그런 게 아니야. 진짜로 위험한 사람이야.”
“위험하기는 뭐가 위험해요. 어후. 이 피부 좀 봐. 아가씨 얼굴이 훨씬 위험해. 오이 팩 좀 하셔야겠어요.”
“….”
공작 저에 내 편은 아무도 없어!!
불퉁해진 나는 니얀 대신에 클레어가 가져온 오이를 마구 씹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니얀이 공작 저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놀러 가요.”
어느 날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책을 읽고 있을 때, 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난 니얀이 내게 대뜸 졸라 댔다. 이런 한밤중에 레이디의 방에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오다니, 내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그러나 태클 걸어 봐야 뺀질거리며 빠져나갈 게 분명하니 입만 아프지. 나는 그런 사사로운 걸 따지는 대신에 눈에 힘을 잔뜩 주어 노려보았다.
“이 야밤에 어디를 간다는 거예요?”
“제가 밤하늘을 구경시켜드릴게요.”
“밤하늘?”
“별이 반짝거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까만 도화지에 보석이 강처럼 뿌려져 있다고요.”
침대 끝에 앉은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저 요사스러운 입술과 미소 같으니.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 같단 말이야.
차기 마탑주라면 자고로 막 무게감 있고 진중해야 하는 거 아냐?
내 생각이 편견일지는 몰라도, 애교 있는 타입이란 피곤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가요. 네?”
“아, 아닛.”
내가 되물은 것을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니얀은 다짜고짜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나는 테라스로 끌려 나오자마자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항의했다.
“이런 옷차림으로 어떻게 가요.”
“아, 옷차림이 문제였어요? 그건 걱정 마세요.”
옷이라도 갈아입으려고 몸을 돌아서려는데 그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계시죠.”
니얀은 손바닥에다가 환한 빛을 내더니 그것을 내 한쪽 어깨에다가 얹었다. 그러자 마치 요술
공주가 변신을 하듯이, 옷차림이 잠옷에서 활동복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자, 됐죠? 공녀님의 옷장에 있는 걸 골랐어요.”
“허.”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요술 같은 것도 할 수 있단 말이야?
CCTV도 설치해서 볼 수 있고, 수월한 교통수단인 텔레포트도 있고, 옷도 손만 까딱하면 갈아입을 수 있다니. 마법사의 삶은 일반인의 것과는 전혀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전혀 관심 없던 마법의 끝은 어디일까 새삼스레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제가 많이 멋있죠? 어때요. 관심이 좀 가시나요?”
“….”
니얀은 달빛을 받은 은발을 부드럽게 흔들며 웃었다.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위험하고도 뇌쇄적으로 보였다. 그의 외모는 아름답긴 했지만, 정말 솔직한 나의 감상을 말하자면 미친놈 같았다.
도끼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어. 그것도 중증으로.
우리 저택의 하녀들이 볼 때마다 꺅꺅대며 환호해주니까 콧대가 하늘 끝에 올라붙었나 보다.
“빨리 가기나 해요.”
“좋습니다.”
그대로 무시한 채 귀찮다는 듯 재촉했더니 니얀이 입꼬리를 잔뜩 올렸다. 그는 내 손을 가져가 깍지를 끼더니 팔까지 휘감았다.
“아니, 잠깐.”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항의를 하려 했더니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테… 텔레포트 쓰는 거 아녜요?”
“날아서 가면 시원하고 재밌어요.”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상상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팔짱을 낀 걸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다가, 반대로 내가 니얀의 팔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신세가 되었다.
“무… 무섭단 말이에요.”
“꽉 잡으세요. 안 그러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히익.”
사색이 된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를 꼭 잡았다. 니얀은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하늘로 붕 날아올랐다.
실사판 롤러코스트를 타면 이런 기분일까. 안전 바를 놓치면 바로 저승행이라는 공포는 스릴이고 뭐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을 머릿속에 꽉 채웠다.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0미터라고 했던가.
그 구간을 벗어나자 아득하게 멀어진 거리가 꼭 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물에서 헤엄치듯이 발을 휘적대자 공중에서 뜻대로 방향을 움직일 수 있었다. 금세 적응을 마친 나는 이제는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거의 다 왔어요.”
니얀은 어스름한 불빛이 있는 마을에서 벗어나 산등성이를 따라 꼭대기 쪽으로 올라갔다. 곧 빛줄기 하나 없이 어둠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펼쳐졌다. 사방이 어둠에 침잠해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쳐 위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이동하자, 암흑인 줄 알았던 세상은 알고 보니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우와.”
까만 우주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이 물결을 형성해 흐르고 있었다. 니얀의 말대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강물은, 그야말로 천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이런 광경은 처음 봤어요.”
“아름답죠?”
내가 입을 헤 벌린 채 감탄을 연발하자 니얀이 뿌듯해하며 어깨를 한껏 들어 올렸다.
아주 높이 올라온 탓도 있겠지만, 이곳은 내가 살았던 지구보다 등불이 적고 덜 밝은 곳이었다. 그 덕에 자연 그대로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물론 대마법사와 엮인 이유도 있고.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은하수를 구경하느라 저도 모르게 니얀에게서 떨어져 하늘만 바라봤다. 그러다가 어느새 내가 그의 팔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헙!”
“놀랄 것 없어요. 혼자서도 날 수 있게 마법을 걸어두었으니까요.”
“뭐? 그럼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게 거짓말이었어요?”
순간 발끈한 내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니얀이 공중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가 아직 공중이라는 걸 잊지 않으셨죠?”
“이젠 협박까지?”
“협박이라니 그럴 리가요. 그래도 제 덕분에 좋은 구경 하셨잖아요?”
“그건 뭐. 그렇네요.”
니얀의 말이 일리가 있긴 했다.
처음엔 억지로 끌려 나온 감이 있었지만, 놓쳤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진귀한 경치인 건 사실이니까.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눈을 떼지 않고 있으려니까, 그가 에스코트하듯이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시죠.”
“안 잡아도 된다면서요?”
팔짱을 끼며 뾰로통하게 대답하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이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칫.”
끝까지 스킨십을 하려고 군단 말이지. 불만스러웠지만 하는 수 없이 손을 들어 그 위에 포개었다. 그 모습에 니얀이 흡족한 듯 미소를 짓더니 바람을 일으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
그 후로 니얀은 하루에도 몇 번씩 유령처럼 찾아왔다. 그게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좋은 구경을 시켜줬다고 해서 없던 신뢰가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의 애매하고 어중간하며 내 편인 듯 아닌 듯한 태도는 목표가 분명한 내게 굉장한 부담이었으니까.
왜 자꾸 찾아오는 건데?
할 일도 어지간히 없는지. 자기 입으로 마법사들은 엄청 바쁘다더니 차기 마탑주님은 예외인가보다. 내가 정원 테이블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옆에서 할 일 없이 나뭇가지로 땅이나 파고 있는 걸 보면.
“나 심심해요….”
“…….”
마탑의 불투명한 미래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달까?
땅은 그만 파고 생산적인 일을 해보라며 권하고 있을 그때, 하녀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알렸다.
“아가씨. 아드리엔 도련님과 나비엔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두 남매가 공작 저를 방문하기로 한 거였다. 며칠 전 편지로 방문을 알렸기에 안 그래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나를 보며 환하게 빛나던 아드리엔의 낯빛은 니얀을 발견한 즉시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어두워졌다.
“에일린. 이 사람은 누구야?”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첫눈에 뭔가를 감지한 걸까? 아드리엔은 니얀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아드리엔과 니얀 사이에는 때아닌 신경전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참이나 노려보며 서 있었다.